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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 ‘춘’(春)자의 변화
봄 ‘춘’(春)자의 변화 ⓒ 서성 그림
중국인이 봄을 어떻게 생각하였는지에 대해서는 먼저 봄 ‘춘’(春)자를 가지고 생각해볼 수 있다. 갑골문에서는 나무들 사이에 해가 있는 것으로 보아 새로 자라나는 가지들을 가리키는 듯하다. 그러나 한대의 허신(許愼)은 <설문해자>(說文解字)에서 ‘춘’(春)의 뜻을 ‘밀다’(推也)라고 풀이하였다.

다시 말해 풀과 나무가 땅밖으로 나오는 모습이라고 본 것이다. 소전(小篆)의 글자를 보면 풀 ‘초’(艸) 아래에 ‘둔’(屯)자가 있는데 일부 학자들은 땅 위로 싹이 나오는 모습으로 본다. 그런데 땅위에 있어야 할 ‘해’(日)가 왜 아래에 있을까. 옛날 사람들은 눈이 녹고 땅이 풀리는데서 땅속에 태양과 같은 게 있다고 생각한 것은 아닐까. 실제로 일부 학자들은 이 글자를 땅속에 있던 양기가 음기를 밀어올린다로 해석하기도 한다.

예컨대 <오경통의>(五經通義)를 보면, “동지 때는 양기가 아래에서 움직여, 음기를 밀어 올린 까닭에 큰 추위가 오게 된다. …음기와 양기가 서로 밀면서 사물을 빛나게 한다.”(冬至, 陽動於下, 推陰而上之, 故大寒於上. …陰陽相推, 使物精華.) 이러한 설명은 아마도 나중에 나온 듯싶다. 왜냐하면 갑골문 등에 날 ‘일’(日)자가 없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싹이 나오는 자연현상에서 봄을 이해했다가, 나중에는 음양설을 가지고 이를 해석한 것으로 보인다. 요컨대 싹이 돋아나는 데서 봄의 의미를 주었던 것이다.

우리말 ‘봄’의 어원도 재미있다. 보통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햇볕’의 ‘볕’이란 말에서 ‘볻’이 나왔고 여기에서 ‘봄’이 되었다고 하는 설과, 다른 하나는 새로운 사물을 ‘보다’에서 ‘봄’이 되었다는 설이다. 일본어에서도 봄을 뜻하는 ‘하루’는 만물이 ‘자라나는’(發) 때이거나 초목이 ‘펴지는’(張) 때에서 나왔다는 설이 가장 유력하다.

영어의 ‘스프링’도 개구리 등이 껑충 뛰어나오는 데서 봄을 이해하였다. 이들 말들 사이에는 어느 정도 인식의 차이는 있지만, 어떤 경우든 봄은 새로운 사물의 출현에 무게를 두었음을 알 수 있다. 춥고 긴 겨울을 보내면서 사람들은 과연 봄이 올지 도저히 믿을 수 없었는데, 황무지에서 풀이 나고 죽은 나무등걸에서 싹이 트는 것이다. 이 가운데 초목의 성장이야말로 가장 명확히 봄의 도래를 표시하였다. 마치 싹의 움틈이 봄을 이끌고 오는 듯했던 것이다.

중국고전시 가운데 초목의 성장을 잘 형상화시킨 시로 나는 먼저 한대(漢代) 교사가(郊祀歌) 가운데 '청양'(靑陽)을 들고 싶다.

靑陽開動, 봄의 양기가 열리어 움직이니
根荄以遂. 초목의 뿌리가 뻗어나기 시작하도다
膏潤幷愛, 비와 이슬이 내리고 잎이 무성해지며
跂行畢逮. 벌레와 짐승이 모두 몰려들도다
霆聲發榮, 천둥이 치니 싹이 움트고
壧處頃聽. 굴속의 동물들이 귀를 기울이도다
枯槀復産, 시들고 마른 초목에 생기가 돌아
乃成厥命. 그 생명을 다시 만드는도다
衆庶熙熙, 만물이 즐겁고 기뻐함이
施及夭胎. 모태 중의 생명에도 미치는구나
群生啿啿, 뭇 생명이 살찌고 풍성해지니
惟春之祺. 봄의 복스러운 기운이 가득하도다


물론 위 시는 궁중에서 봄의 신에게 제사지낼 때 부른 노래이어서 정치적인 분위기가 없지 않지만, 나름대로 경건함과 계절에 대한 감수가 잘 담겨있다. 여기에는 비단 초목의 성장만을 노래하고 있지 않지만, 그래도 “초목의 뿌리가 뻗어나기 시작하”고, “시들고 마른 초목에 생기가 돌아, 그 생명을 다시 만드는” 모습은 식물의 자람을 기쁜 마음으로 노래하고 있다. 이는 곧 생명의 고리를 함께 붙들고 있는 동물의 성장과 이어진다.

당대 백거이(白居易)는 풀의 강인한 생명력과 영원한 순환을 다음과 같이 노래하였다.

離離原上草, 언덕 위에 무성히 자란 풀
一歲一枯榮. 해마다 한 번 꽃 피고 한 번 시드네
野火燒不盡, 겨울 들불도 다 태우지 못하여
春風吹又生. 봄바람이 불면 또 다시 자라난다
遠芳侵古道, 멀리 뻗은 풀은 길을 뒤덮고
晴翠接荒城. 화창한 봄날 황량한 성까지 이어졌네
又送王孫去, 다시금 길 떠나는 친구를 보내니
萋萋滿別情. 이별의 정은 봄풀처럼 무성하이
-'언덕의 풀'(古原草)


전반 4구는 봄을 통해 자연의 영원한 순환을 노래하고 있다. 질긴 생명으로 상징되는 풀은 겨울의 들불에 다 타버린 듯하여도 봄바람이 불면 다시 돋아난다. 후반 4구는 친구의 이별을 노래하였고, 그것도 무성한 봄풀을 이별과 연결시킨 중국고전시의 오랜 전통을 빌려오고 있다.

봄날에도 사람들은 만나고 헤어진다. 그러나 여기서도 오래된 길(古道)과 황량한 성(荒城)은 멀리 뻗은 풀(遠芳)과 화창한 봄날의 풀(晴翠)이라는 자연의 생기에 대비되어 있다. 다시 말해 낡음과 새로움이 강렬하게 대조를 이루어 봄풀의 생생함을 강조하고 있다. 이는 또한 들풀이 시들고 다시 자라듯 이별이 만남으로 이어지기를 바란다는 뜻일까.

올해도 봄풀이 푸르러지기 시작하였고, 나무에도 잎이 나기 시작하였다. 봄이면 으레 봄풀이 피기 마련이라고 친다면, 그것은 관념으로 봄을 이해할 뿐이다. 계절과 자연은 머리로 생각하기 이전에 눈과 귀로 느껴야 할 것이다. 수만 년간 인류가 그렇게 해 왔듯 추운 겨울을 지나 어떻게 다시 싹이 피어나는지 느껴야 봄이 보일 것이다.

덧붙이는 글 | 서성 기자는 열린사이버대학교 실용외국어학과 조교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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