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남방의 풍모를 보여주는 지엔수웨이의 나무.
남방의 풍모를 보여주는 지엔수웨이의 나무. ⓒ 최성수
몇 해 전 처음 운남 여행을 계획했을 때, 나는 운남성의 여러 곳을 돌아보고 난 뒤 베트남으로 갈 생각이었다. 쿤밍에서 시작해서 따리, 리지앙, 루구후 등 운남의 북서부쪽을 훑고 내려와 지엔수웨이(建水)를 거쳐 허코우(河口)로 가서 며칠 보낸 뒤 베트남으로 떠날 계획을 짜고 마음이 부풀었었다.

그러나 운남성에 도착해서야 나는 나의 그런 계획이 얼마나 무모했는지를 깨달을 수 있었다. 운남성 서북부 쪽만 돌아보는데도 보름이 모자라는데, 나같이 전문 배낭여행자가 아니라 휴가 때 떠나는 여행자의 시간으로 베트남까지 간다는 계획은 무리라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그래서 여행은 추상으로 시작해서 구상으로 끝나는 것인지도 모른다. 가기 전에는 모든 것이 지도 위에서만 판단될 뿐이다. 아무리 많은 자료를 뒤적여도, 그 구체적 거리는 잡혀지는 게 아니다. 직접 가서 부딪치고 느껴보면서 여행은 비로소 체화되는 것이리라.

그런 점에서 지엔수웨이는 나에게 추상이 구상으로 바뀌는 경외감 같은 것을 느끼게 해 준 도시다. 국경 가까운 도시, 그래서 다른 곳으로 이동하기 위해 거쳐야 하는 곳일 뿐이라고 생각한 지엔수웨이는 그 안에 쏠쏠한 볼거리를 감춘 옛 도시였다. 그리고 동시에 새로운 변화를 꿈꾸며 꿈틀거리는 도시이기도 했다.

장지아화위안(張家花園), 시간이 멈춘 자리

지엔수웨이에서 꼭 찾아보아야 할 곳 하나를 꼽으라면 나는 주저 없이 장지아화위안을 꼽겠다. 장지아화위안은 한자 그대로 풀이하면 장씨네 집안 정원이라는 뜻이다. 장가화원의 원래 이름은 단산민거(團山民居)다. 이름으로 보아 장가화원의 뒤에 있는 산이 단산인 듯하다. 그리고 그 아래 오밀조밀 집들이 모여 있는데, 이 마을이 민거다. 백성들의 집단 거주지인 셈이다.

장가화원의 출입 문 중 하나. 원과 네모가 잘 어울려 아름답다.
장가화원의 출입 문 중 하나. 원과 네모가 잘 어울려 아름답다. ⓒ 최성수

장가화원의 문의 조각. 동물 조각의 머리 부분은 다 떼어가버렸다.  그 문에 세월이 더께처럼 앉아 있다.
장가화원의 문의 조각. 동물 조각의 머리 부분은 다 떼어가버렸다. 그 문에 세월이 더께처럼 앉아 있다. ⓒ 최성수
입장권에도 '중국 역사 문화 명촌(中國歷史文化名村), 단산 민거'라고 이름 붙어 있지만, 사람들은 모두 장가화원이라고 부른다. 그만큼 장씨 집안의 위세가 대단했다는 뜻을 반증해 주는 셈이다.

장가화원은 지엔수웨이에서 13㎞ 정도 떨어진 교외에 자리 잡고 있다. 가는 길이 번듯하게 잘 꾸며지지도 않았고, 표지판도 제대로 붙어있지 않다. 물어물어 찾아가야 하는 곳이고, 좁은 길을 감내해야 하는 곳이기도 하다.

마을에 들어서면 무슨 역사적 건축물이라기보다는 현재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는 조그만 시골 마을에 도착한 느낌이 먼저 든다. 부겐베리아를 비롯한 여러 꽃들이 환하게 피어 마을을 밝히고 있는 장가화원의 골목길은 한적하고 편안하다.

흰 칠을 한 벽들도 깨끗하다. 그런 담장을 경계로 집들이 서로 이웃하고 있다. 고개를 내밀면 이웃과 쉽게 아침 인사를 할 수 있을 것 같은 마을 풍경은 불과 반세기 전의 우리네 마을 풍경과 별반 다르지 않다.

골목길을 돌아서자 잘 꾸며진 커다란 건물이 나온다. 이층으로 지어진 이곳에 장가화원이라는 현판이 붙어 있다. 그러니까 장가화원은 이 마을의 부분을 일컫는 셈이다. 깔끔하고 세련된 외양을 갖춘 화원 안에는 제법 큰 연못이 있다. 연못에는 물고기들이 느긋하게 헤엄을 즐기고 있다.

장가화원 민가의 어느 집 들어가는 길. 저 길에서 금방 옛 친구가 뛰어나올 것만 같다.
장가화원 민가의 어느 집 들어가는 길. 저 길에서 금방 옛 친구가 뛰어나올 것만 같다. ⓒ 최성수
화원 이곳저곳을 둘러본다. 온갖 문양의 조각을 해 달아놓은 문짝과 벽화들이 가득하다. 자세히 살펴보니, 문살 조각 하나도 그냥 깎아 덧붙인 것이 아니다. 통짜 나무를 파고 깎아 문양을 새겨놓은 것이다. 얼마나 많은 노력과 정성이 들어간 것인지를 한 눈에도 알 수 있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문짝 곳곳이 헐어있고, 공작이나 코끼리 같은 동물들의 목이 모두 없어져 있다. 금으로 칠해놓은 그 부분을 도둑들이 모두 떼어가 버렸다고 한다. 아예 문짝을 떼어간 곳도 있다. 문 한 짝에 홍콩에서 일억 원에 거래되기도 했단다. 나는 그저 상상 속에서 원형을 복원해 볼 뿐이다.

장가화원 곳곳에는 여전히 사람들이 살고 있는 집이 있다. 허름한 집에서 느릿느릿 사람들이 걸어 나오기도 한다. 바쁠 것도 없다는 듯, 그들의 걸음걸이는 느긋하다. 집 안을 들어다보니, 생활의 흔적이 고스란히 배어 있다. 가난이 조롱박처럼 달려있는 것 같은 옹색한 살림살이는 이곳에 사는 사람들의 처지를 그대로 보여준다.

화장실을 찾으니, 골목을 지나던 할아버지가 담 한쪽을 가리킨다. 그리 돌아들자 가운데에 조그만 연못이 있고, 연못 주위를 돌아가며 재래식 변소가 하나씩 있다. 변을 보면 그대로 연못으로 떨어지는 구조다.

마을 한곳에 커다란 공터가 있다. 그곳에 어른 열 명이 넘게 팔을 벌려도 다 에두를 수 없을 만큼 큰 나무가 있다. 용수(榕樹)란다. 용(榕)은 보리수나무의 일종이다. 앙코르와트 사원에 있는 바로 그 나무다. 마을의 상징적인 장소에 나무를 심고, 그것을 신령시하는 것은 어디나 마찬가지인 듯싶다.

공터 한 쪽으로 이제는 폐교된 학교도 있다. 학교에 들어가 본다. 적막하다. 폐교된 곳은 어디나 쓸쓸하다. 마구 쌓아놓은 책걸상에, 낡은 칠판에는 낙서만 남아 세월의 흔적을 남기고 있을 뿐이다.

태양산이라는 꽃. 지붕 위에 자란다.
태양산이라는 꽃. 지붕 위에 자란다. ⓒ 최성수
나는 일몰의 장가화원을 느릿느릿 걸어 나온다. 모든 것이 정지한 시간 속에 머물러 있는 곳 같은 장가화원, 돌아보고 돌아보면 지난 시절의 어느 하루로 돌아갈 수 있을 것 같은 장가화원 너머로 해가 지고 있다. 지는 햇살은 더 쓸쓸하고 더 장려한 법일까? 장가화원은 청나라 때 한족의 전통적인 민간의 삶을 잘 보여주는 건축물이 많은 곳이라고 한다.

그 말대로 아름답고 화려한 건물들에, 돌 조각, 나무 조각들이 살아있는 것 같이 생생하고, 벽화나 숱한 문양이 눈을 휘둥그레지게 하지만, 그러나 금방 그 화려함이 쓸쓸함으로 바뀌는 것은, 장가화원이 지닌 역사적 아픔 때문일까? 문화혁명 당시 이곳의 토호였던 장가를 내쫒고 일반 사람들의 집단 거주지로 만들었다는 장가화원은, 그 내력 때문에 더욱 스러지는 풍경으로 비춰지는 지도 모른다.

장가화원을 돌아 나오는 길, 저녁 햇살이 비치는 어느 집 지붕에 이상한 꽃이 빛나고 있다. 태양산(太陽傘)이란다. 태양 우산? 그 꽃은 스러지는 장가화원에 깃들어 사는 사람들처럼 껑충한 모습이었다.

쌍룡교에서 늦둥이의 역사 이야기를 듣다

쌍룡교는 그저 강물 위에 세워진 다리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지엔수웨이에서 쌍룡교는 그냥 다리가 아니다. 쌍룡교는 지엔수웨이의 상징처럼 느껴진다. 그것은 지엔수웨이라는 이름 때문이다. '물에 세운(建水)' 도시에 멋진 다리 하나쯤은 있어야 아름다움이 완성되는 것일테니까 말이다.

그래서일까? 쌍룡교는 멀리서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아름답다. 다리 주변의 풍경들도 마음을 느긋하게 만들어 준다. 작은 숲과 주변의 논밭이 어울려 전형적인 농촌의 풍경을 만들고 있는 곳에 물줄기가 흐르고, 그 강물을 가로질러 다리가 놓여 있다.

쌍룡교. 누각을 얹어놓은 모습이 특이하다.
쌍룡교. 누각을 얹어놓은 모습이 특이하다. ⓒ 최성수
다리는 돌을 쌓아 만들었는데, 바닥돌은 어찌나 반질반질한지 걷기에도 미끄러울 정도다. 마침 오토바이 한 대가 다리를 건너려고 달려오다 바닥에 미끄러져 헛바퀴질을 한다.

세월의 더께가 켜켜이 내려앉아 있는 것 같은 다리는 그래서 그냥 다리가 아니다. 그것은 이 땅에 발 딛고 살아온 사람들의 삶의 자취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다리를 건너다니며 살아왔을까? 그래서 쌍룡교는 마치 세월의 이편과 저편을 연결해 주는 것 같다.

다리 가운데에 커다란 누각을 얹어 놓았다. 3층이나 되는 큰 누각을 다리 위에 지어야 했던 사람들의 마음은 어떤 것이었을까? 다리는 교각과 교각 사이를 무지개처럼 둥글게 마무리한 무지개다리 형식이다.

쌍룡교 아래에는 원래 로강하(瀘江河)와 현충하(埍冲河)가 흘렀다고 한다. 이 두 강물이 마치 용이 꿈틀거리는 것 같아서 쌍룡이라고 불렀고, 다리 이름도 쌍룡교라고 짓게 되었단다. 그러나 지금은 강물 하나는 농지 개간으로 사라지고, 작은 강물 하나만이 쓸쓸히 흐르고 있으니, 쌍룡교가 아니라 외룡교인 셈이다.

쌍룡교를 오가며 사람들의 삶은 이어진다.
쌍룡교를 오가며 사람들의 삶은 이어진다. ⓒ 최성수
나는 다리 중간 누각 아래에 세워진 안내문을 보며, 그런 설명을 함께 여행 중인 늦둥이에게 들려주다가 고개를 갸웃거린다. 다리를 세우기 시작한 것은 청나라 건륭제 때였고, 도광제 때 완성이 되었다는 기록을 보다, 도광제가 누군지 알 수 없어서였다.

"도광제가 청나라 왕인 것은 분명한데…."

내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었는지, 늦둥이가 얼른 입을 연다.

"도광제는 청나라 8대 황제예요. 아편 전쟁 때 황제지요. 도광제가 즉위했을 때 아편 밀수가 매우 심했대요. 그래서 도광제는 아편을 모두 불태워버리라고 했어요. 그래서 영국에서는 자기나라 아편을 수출할 수 없게 되자 청나라를 침략하게 되었어요."

늦둥이는 도광제 설명을 하다 생각이 났는지, 신이 나서 아편전쟁 이야기로 옮아간다. 평소 역사책을 많이 읽더니, 이렇게 쓸모 있을 때도 있구나 하는 생각에 나는 흐뭇해진다. 재잘재잘 이야기를 풀어가는 녀석을 보며, 학원도 안 보내고 과외도 안 시키며 내가 늘, '과외비 대신 여행 데리고 다니는 거야'라고 농담 삼아 했던 내 말이 결코 헛되지는 않았다는 느낌도 든다.

청나라 건륭제가 처음 이 다리를 만들 때는 무지개 같은 다리 구멍이 3개였는데, 도광제 19년(1839년)에 완성될 때 14개의 구멍을 더 만들었다는 다리, 기러기의 이빨이 이어져 있는 모양을 본떠 만들었다는 아름다운 누각. 그러나 어쩌면 나는 그런 미적 가치나 역사적 의미보다는 늦둥이의 설명 때문에 오래도록 쌍룡교를 기억할지 모른다. 모든 대상은 결국 보는 이의 경험이나 느낌과 연결될 때 더 생생해 지는 법이니까.

쌍룡교를 등지고 돌아 나오는 길, 나는 자꾸 뒤를 돌아보았다. 거기 몇몇 사람들이 짐을 진 채, 혹은 수레를 몰고 다리를 건너고 있었다. 내게 그들의 모습이 흐릿한 환영처럼 보인 것은, 쌍룡교가 그들의 배경처럼 시간 속에 머물고 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오마이뉴스> 명함으로 공자묘에 무료입장하다

지엔수웨이 시내에 있는 공자묘(孔子廟)를 찾아간다. 공자묘는 공자의 무덤이 아니라 사당이다. 문묘(文廟)니 공자의 제사를 지내는 곳이다. 원래의 명칭은 건수문묘(建水文廟)지만, 공자묘로 더 많이 알려져 있는 곳이다.

시내 한 복판, 임안로(臨安路) 중간에 널찍하게 자리 잡은 공자묘는 1285년인 원나라 때 건립된 사당이다. 총 10 헥타의 방대한 면적에 1개의 연못, 큰 집(殿) 한 채, 곁채(廡,) 둘, 당(堂) 세 채, 각(閣) 두 채, 정자(亭子) 셋, 다섯 개의 문(門), 다섯 개의 사당(祠), 여덟 개의 방(坊)으로 구성되어 있어 중국에서 가장 큰 지방 문묘라고 한다.

문묘(공잠묘)의 문 중 하나. 의로(義路)라는 이름이 붙어있다.
문묘(공잠묘)의 문 중 하나. 의로(義路)라는 이름이 붙어있다. ⓒ 최성수
문묘 입구에는 문묘만큼 큰 규모의 공원이 조성되어 있고, 그곳에 바라보기만 해도 어마어마하게 큰 공자의 동상이 서 있다. 얼후(二胡) 쯤 되어 보이는 악기를 연주하고 있는 모습이다. 공원에서는 할머니들이 부채를 들고 아침 운동을 하고 있다. 느릿느릿하면서도 기가 느껴지는 운동이다. 잠시 그 모습을 구경하다 입장권을 사기 위해 매표소로 간다.

매표소에 붙어있는 가격을 보니, 60원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20원이라는 얘기를 들었는데, 맙소사, 그새 세 배나 값이 올랐다. 아마 공원을 조성해 놓고 가격을 올린 것 같다며, 함께 간 병규씨가 어이없다는 표정이다.

요즘 중국은 각 지방 정부마다 관광지 요금 올리기가 경쟁처럼 벌어지고 있다고 한다. 아무리 그래도 300% 인상은 좀 심했다 싶다. 혹 기자라고 하면 할인이 될까 해서 물어보니, 기자는 무료입장이란다. 얼른 지갑을 뒤져 <오마이뉴스> 명함을 꺼내 매표소 안에 들이민다.

"나는 한국의 기자다."

그러나 내 명함을 꼼꼼히 살펴보던 매표원이 고개를 가로젓는다.

"기자증을 보자."

시민기자인 내게 기자증이 있을 리 만무하다.

"없다. 그 명함이면 되지 않느냐."
"안된다. 명함에 사진이라도 있으면 모르지만. 당신 명함이라고 어떻게 알겠냐?"

매표원은 완강하다. 나는 여권을 꺼내 사진과 이름을 보여주고, 명함의 이름자와 대조한 끝에 결국 무료입장 허락을 받아낸다. 60원을 아낀 것이 기쁘기보다는 <오마이 뉴스> 명함이 중국에서도 통할 수 있다는 것이 더 반갑다.

그러나 공자묘 안은 정작 볼 만한 것이 별반 없다. 깔끔하게 꾸며진 정원 정도가 눈길을 끌 뿐이다. 시간이 되면 간단한 연주를 하지만, 그 역시 특별하지는 않다. 그저 여행에 지친 나그네가 잠시 숨을 고르기 위해 들러 한적한 시간을 갖기에 적당한 정도가 공자묘의 맛이라고 할 수 있다.

주지아화위안(朱家花園), 화려한 그러나 상업화된 자리

주지아화위안은 공자묘 맞은편에 있는 주씨 집안의 정원이다. 주가화원은 여러모로 장가화원과 대조적이다. 장가화원이 스러져가는 옛 모습을 간직한 정원이라면, 주가화원은 완벽하게 보존된 화원이다.

주가화원은 입구부터 상업적인 냄새가 확 풍긴다. 화원 앞으로 상가가 형성되어 손님을 끌고 있고, 곳곳이 공사 중이기도 하다. 머지않아 주가화원은 지엔수웨이의 또 다른 관광지로 관광객의 발길을 끌 것이다.

샹그리라가 번듯한 중디엔에서 번듯한 새 이름을 갖게 된 뒤, 도시 전체를 새롭게 뜯어 고치면서 관광객을 유치하듯, 지엔수웨이도 관광객을 끌어들이는데 분주해 보이는 도시다. 그 중심에 주가화원이 자리 잡고 있다.

주가화원의 화려한 문. 장가화원의 문과 대조적이다.
주가화원의 화려한 문. 장가화원의 문과 대조적이다. ⓒ 최성수
주가화원은 깔끔하게 보존된 아담한 정원이 눈에 띄는 곳이다. 총 면적이 2만여 평방미터에 건축 면적만 5천 평방미터에 달할 정도로 넓은 정원에는 오밀조밀하게 건물들이 자리 잡고 있다. 그 건물들이 온갖 치장으로 화려하게 빛나는 곳이 주가화원이다.

건물은 크게 주택과 사당으로 나뉘어 건축되어 있다. 각 건물의 본채는 세 칸의 침실과 여섯 칸의 방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큰 정원 하나에 작은 정원 네 개가 어울려 전형적인 지엔수웨이의 민가 건축 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각 건물마다 세밀하게 벽화와 조각들이 어울려 화려하기가 그지없다. 사당 앞에는 큰 연못이 있는데, 연못에는 온갖 색깔의 물고기들로 가득 차 있다.

장가화원의 벽화나 문짝, 건물들이 세월의 더께에 가라앉고 있다면, 주가화원은 그 세월 속에서 화려하게 부활한 새 건물같이 느껴진다. 더구나 화원 한 쪽에는 과거의 건물 형태를 그대로 갖춘 호텔이 있어 더 그런 느낌이 든다. 장가화원의 과거와 주가화원의 현재가 묘하게 만나는 곳, 그곳이 바로 지엔수웨이라는 도시 아닐까?

주가화원은 청나라 광서제 때의 지엔수웨이 사람인 주조영(朱朝瑛)의 민가였다고 한다. 이 먼 곳에 이토록 화려한 집을 지어야 했던 그의 마음은 도대체 어떤 것이었을까? 나는 하릴없이 화원의 이곳저곳을 배회하며 그런 감상에 빠져든다. 새삼 생의 덧없음이 밀려오는 것은 너무 화려한 건물 때문인지도 모른다. 아니면 여행자에게 수시로 밀려오는 아득함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 아득함을 맛보기 위해 여행은 계속되는 것이리라.

원조 구오치아오미시엔(過橋米線)을 맛보다

한 여인이 있었다. 남편이 공부를 위해 집을 떠나 있었다. 남편이 가 있는 곳은 여인의 집에서 다리 건너에 있는 강마을이었다. 남편은 쌀 국수를 아주 좋아했다. 여인은 남편을 위해 날마다 쌀 국수를 해 날랐다.

그러나 국수 국물은 다리를 건너기 전에 이미 식어버려, 남편이 음식을 대했을 때는 제 맛이 나지 않았다. 여인은 어떻게 하면 따뜻한 국물에 국수를 말아 먹을 수 있게 할까 궁리에 궁리를 거듭했다.

오랜 고민 끝에 여인은 기름이 둥둥 뜬 닭고기 국물을 만들었다. 그 국물은 다리를 건너 남편에게 가져갈 때까지 식지 않았다. 맛도 아주 그만이었다.

그 뒤부터 여인이 만든 닭고기 국물의 국수는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게 되었다. 사람들은 여인의 정성을 생각하며, 이 국수를 다리를 건너 남편에게 가져간 쌀 국수라고 해서 구어치아오미시엔(過橋米線) 즉 '다리를 건너간 쌀 국수'라고 불렀다.

임안반점의 쌀국수. 국물 위의 토막이 수선화 뿌리란다. 닭곰탕에 국수를 만 것 같이 시원하다.
임안반점의 쌀국수. 국물 위의 토막이 수선화 뿌리란다. 닭곰탕에 국수를 만 것 같이 시원하다. ⓒ 최성수
운남성의 곳곳에서 가장 흔하게 볼 수 있는 음식이 바로 쌀 국수다. 그 대부분의 쌀 국수는 닭고기 국물로 육수를 만든다. 기름이 둥둥 뜬 것이 처음에는 먹기 힘들지만, 맛을 보면 꼭 우리나라 곰탕 국물처럼 시원하다.

지엔수웨이가 바로 구오치아오미시엔의 본고장이다. 지엔수웨이의 임안반점(臨安飯店)이 그 미시엔의 본점이라고 한다. 제법 넓은 국수집은 손님들로 바글거린다. 역시 본점의 이름값은 대단한 위력을 지니고 있는가보다.

가는 면발의 국수를 닭 국물에 넣어 먹는 방법은 어디나 마찬가지인데, 이 집은 특히 국물의 맛이 진하고 깊다. 국물 속에는 고기와 야채를 넣어 씹는 맛도 괜찮다. 국물 위에 꼭 가래떡 같은 것이 있어 떡국인가보다 생각하며 자세히 보니 야채를 토막 낸 것이다. 무엇이냐고 물어보니, 수선화 뿌리란다. 아삭아삭하고 담백하다.

주방 쪽으로 가 보니 국수를 삶느라 김이 자욱하다. 옆에서는 연신 닭을 토막 내고 있다. 세상의 모든 음식은 그 음식이 만들어진 곳의 생존 조건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법이다. 쌀이 풍부하게 생산되는 이곳에서는 쌀로 국수를 만들어 먹는 기술이 발달한 것이리라.

내 고향 강원도에서는 설에 떡국을 먹지 않는다. 떡을 넣지 않은 만둣국만 먹는다. 반면 남도에서는 떡국만으로 설상을 차린다고 한다. 강원도 지역은 쌀이 귀하니 만둣국을 끓이게 된 것이고, 남쪽은 평야지대가 많아 쌀이 비교적 흔하니 떡국을 끓이게 된 것이리라. 나는 미시엔을 먹으며 그런 엉뚱한 상상의 나래를 편다.

지엔수웨이의 또 하나 명물은 샤오카오(燒烤)다. 온갖 것들을 꼬치에 꿰어 구워 먹는 음식이다. 흐릿한 밤, 뒷골목에 있는 샤오카오 집에 가서 술 한 잔 곁들여 먹는 꼬치구이의 맛이란! 더구나 여행의 날이 어느 정도 흘러 마음이 찬찬하게 가라앉은 때라면, 꼬치구이에 한 잔 술은 더 마음을 끌어당기기 마련이다.

나는 지엔수웨이의 늦은 밤, 한 잔 술에 온갖 꼬치구이를 구워 먹으며, 삶의 아득함과 덧없음에 대해 생각한다. 나는 어떤 인연으로 이 먼 남쪽까지 와서 이 밤을 이렇게 밝히고 있는 것일까? 잠자리에 애벌레, 돼지꼬리, 오리혓바닥 따위의, 우리 같으면 생각도 못할 온갖 꼬치구이는 그 맛보다도 이국의 풍취를 자극하는 데 그만이다. 그래서일까? 생각은 생각의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지엔수웨이, 지금은 그저 중국 남쪽의 작은 도시일 뿐이지만, 머지않아 이곳은 수많은 관광객으로 북적거릴 지도 모른다. 중국에서 베트남 하노이까지 가는 철길이 지나는 곳이기 때문이다. 하노이, 하내(河內)이니, 국경인 허코우(河口)와 이름조차 밀접한 관련이 있다.

이름대로 홍하가 흘러가는 곳이다. 중국과 베트남의 기차는 레일 궤도가 다른데, 이곳 지엔수웨이에서 기차의 궤도에 맞게 바퀴를 갈아 끼운다고 한다. 그러니 지금은 끊긴 철길이 수년 내에 연결되면, 이곳 지엔수웨이는 중국과 베트남을 오가는 수많은 사람들이 이동을 위해 머물러야 하는 곳이 되리라.

그때가 되면 지금처럼 한적하고 고즈넉한 지엔수웨이의 모습은 어쩌면 사라질지 모른다. 많은 사람들에 치여 바쁘게 밀려다니다 또 다른 곳을 향해 정신없이 떠나야 할 곳으로 바뀌어버린다면, 그래서 장가화원의 세월에 퇴색한 풍경조차 찾아볼 수 없다면, 지엔수웨이는 또 다른 번화한 도시의 하나로 남아있게 될 것이다. 자본은 늘 세상 어느 곳이든 비슷비슷한 곳으로 만들어버리는 속성이 있으니까 말이다.

그런 상념에 젖은 내게, 지엔수웨이의 밤은 '아직은 괜찮다'고 속삭이듯 느긋하게 깊어가고 있다. 아, 무상한 세월이여, 덧없는 세상사여!

덧붙이는 글 | 지엔수웨이에 대한 더 많은 사진은 제가 운영하는 카페 http://cafe.naver.com/borisogol.cafe 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시집 <장다리꽃같은 우리 아이들>, <작은 바람 하나로 시작된 우리 랑은>, <천년 전 같은 하루>, <꽃,꽃잎>, <물골, 그 집>, <람풍>등의 시집과 <비에 젖은 종이 비행기>, <꽃비> , <무지개 너머 1,230마일> 등의 소설, 여행기 <구름의 성, 운남>, <일생에 한 번은 몽골을 만나라> 등의 책을 냈습니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