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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서루 근경
죽서루 근경 ⓒ 김대갑
진주관 죽서루 아래 오십천에 흐르는 물이
태백산 그림자를 동해로 담아 가니,
차라리 그 그림자를 한강의 남산에 대고 싶구나.
관원의 여행길은 유한하고 풍경은 내내 싫지 않구나.
그윽한 회포도 많고 나그네 시름도 둘 곳이 없다.
신선의 뗏목을 띄워 내여 북두칠성 견우성으로 향할까?
사선을 찾으려 단혈이라는 동굴에 머물러볼까?
- '관동별곡' 중 본사 (2)-5


송강은 죽서루의 절경을 보고 차마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던 모양이다. 관원으로서의 의무만 없다면 그윽한 회포와 나그네 시름을 죽서루에서 실컷 풀고 싶다고 했다. 또한 신선의 뗏목을 오십천에 띄워서 북두칠성 견우성으로 가고 싶다며 칭얼거렸다.

이렇듯 '죽서루'는 송강의 맘을 단번에 사로잡았을 정도로 빼어난 절경을 자랑하는 곳이다. 죽서루는 조선 초기의 누각으로서, 세워진 연대는 정확하게 알 수 없다. 다만 고려 시대 때부터 있었다고 추정할 뿐이다. 현재의 누각은 태종 때의 삼척부사 김효손이 고쳐지었다고 한다.

기둥의 높이가 다른 1층
기둥의 높이가 다른 1층 ⓒ 김대갑
예전 전통 건축 공법 중에 '그랭이법'이라는 것이 있었다. 자연 초석 위에 기둥을 세우기 위한 기술적 방법을 말함인데, 죽서루에는 이런 그랭이법이 아홉 군데 정도 적용되었다.

즉, 다듬지 않은 아홉 군데의 자연초석 위에 누각의 기둥이 올라갔다는 이야기다. 죽서루에는 총 17개의 기둥이 있는데, 나머지 여덟 군데의 기둥은 다듬은 암반 위에 올라갔다. 그래서 죽서루의 기둥은 그 높이가 제각기 다르다. 다듬은 초석과 다듬지 않은 자연 초석의 높이가 다르기 때문이다.

그랭이법은 핀셋 모양의 대나무에 먹을 묻혀 돌과 나무 기둥에 동시에 선을 긋는 방법을 말한다. 그러면 나무 기둥에 돌의 자연스러운 곡선이 고스란히 그려지게 되고, 이 선을 따라 홈을 파내면 자연 초석과 아귀가 딱 들어맞는 것이다. 죽서루에는 자연을 파괴하지 않고 자연과 공존을 모색했던 우리 선조들의 지혜와 슬기가 고스란히 맺혀 있는 것이다.

죽서루의 마루에서
죽서루의 마루에서 ⓒ 김대갑
그런데 '죽서루'라는 이름의 유래가 무척 재미있다. 예전에 죽서루 동쪽에 대나무 밭이 있었으며 그 대밭 속에 죽장사라는 절이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죽장사 서편에 있는 누각이라 하여 죽서루라고 했다는 것이다. 확인되지 않지만 대개 이 유래를 신빙성이 있는 것으로 여긴다.

또 하나의 유래가 있는데, 다소 낭만적이면서도 애잔하다. 왜냐하면 그 유래의 주인공이 '죽죽선녀'라는 기생이기 때문이다. 죽죽선녀는 고려 시대 때 수많은 시인 묵객의 마음을 설레게 했던 아름답고 청순한 미녀였던 것 같다. 전설에 의하면 죽죽선녀는 죽서루 근처에 유희소를 하나 만들어 자신을 찾아오는 지식인들과 질탕하게 놀았다고 한다.

시로써 그들을 희롱했으며, 대나무처럼 곧은 절개를 가르치기도 했고, 선녀처럼 아름다운 자태로 그들을 유혹하기도 했다. 이 죽죽선녀의 유희소 서쪽에 있는 오십천 절벽 위에 절묘하게 세워진 누대가 하나 있었으니 그게 바로 죽서루였다는 것이다.

용문 바위
용문 바위 ⓒ 김대갑
가야산, 봉황산이 그림처럼 펼쳐진 속에 오십 구비를 휘돌아 간다는 오십천이 코발트블루 색깔을 발하며 말없이 흐르는 곳. 그곳의 천길 단애 위에 연초록 한복을 곱게 차려 입은 여인처럼 조용히 앉아 있는 죽서루. 그 죽서루에는 특이한 볼거리가 몇 개 있다.

죽서루 동쪽 연근당 자리에는 '용문바위'라는 것이 있다. 신라 문무왕이 죽어 용이 된 후 동해를 순행하다가 오십천까지 거슬러 오게 되었는데 그 경치가 너무 빼어나서 그만 흠뻑 빠지고 말았다.

용은 강변의 절벽을 주변 경치와 어울리게 아름답게 조각하고는 승천할 때 이 바위를 뚫고 올라갔다는 것이다. 또한 용문 바위 위에는 선사 시대 암각화로 추정되는 여성 생식기 모양의 구멍 10개가 있어 오는 사람들의 눈길을 사로잡기도 한다. 이 구멍에 좁쌀을 넣은 후 그 좁쌀을 가져가면 아들을 낳는다나 어쩐다나.

송강 시비
송강 시비 ⓒ 김대갑
또한 죽서루 누각 오른쪽에는 송강을 기리는 시비가 팔각형의 기둥모양으로 세워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송강 가사의 터'라고 불리는 이 시비에는 송강의 생애와 작품 활동, 그리고 죽서루를 노래한 '관동별곡' 원문들이 음각되어 있다.

'관동별곡'의 무대 관동팔경에는 수많은 정자가 등장한다. 그리고 이 정자들은 대개 바닷가 근처의 기암절벽 위에 세워져 있으며 규모도 그리 크지 않다. 그러나 죽서루는 규모 면에서 정자를 압도하는 누각이며 강변 위의 기암괴석에 있다는 특징을 갖고 있다. 특히 앞에 흐르는 오십천과 굽이굽이 서린 태백산맥의 줄기, 배흘림 기둥 사이로 불어오는 경쾌한 바람의 향은 다른 정자에서 느낄 수 없는 즐거움을 선사한다.

굽이굽이 오십천
굽이굽이 오십천 ⓒ 김대갑
정자가 개인적인 수양공간이라면 누각은 공적이자 집단적인 수양공간이었다. 자연을 벗 삼아 시와 풍류, 학문을 논했던 양반들의 지적 놀이터가 바로 누각이었다. 물론 그들의 놀이 뒤에는 수많은 민초들의 고난이 서려 있었지만.

오십 개의 굽이마다 수많은 사람의 그리움과 사연을 담은 채 말없이 동해로 흘렀던 오십천. 죽서루에 올라가 오십천을 내려다보니 사람은 공중에 떠 있고, 푸른 물결은 아래에 있어 사람의 그림자와 태백산맥의 그림자가 거꾸로 잠겨 있다.

오십천과 죽서루는 수백 년을 서로 그리워하며 태백산맥 밑자락을 지켰다. 죽서루는 오십천의 옥색 물빛에 담겨 있고, 오십천은 죽서루에서 불어오는 맑은 바람에 몸을 일렁거린다.

마룻바닥에 앉아서 옥색 물빛과 맑은 바람에 몸을 맡기니 서늘한 기운이 정수리까지 순식간에 올라온다. 그 서늘함에 취해 아까 보았던 송강 시비의 시 구절 하나가 담연하게 머리에 떠오른다.

"사람은 아니 뵈고 산봉우리만 강상에 있어
바닷구름 다 지나가도 달빛만이 곱게 비치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유포터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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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스토리텔링 전문가. <영화처럼 재미있는 부산>,<토요일에 떠나는 부산의 박물관 여행>. <잃어버린 왕국, 가야를 찾아서>저자. 단편소설집, 프러시안 블루 출간. 광범위한 글쓰기에 매진하고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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