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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 명절에 만난 어르신 가운데 한편으로는 애틋하고, 한편으로는 미움까지는 아니지만 속이 상해 가슴 속 앙금으로 남아 지워지지 않는 두 분이 계시다.

먼저 75세의 남자 어르신. 아주 오래 전, 딸 둘을 두었지만 아들을 얻고 싶어 아내 아닌 다른 젊은 여자를 보았고, 그 일은 전처와의 이혼, 그리고 새 여자와의 재혼으로 이어진다. 소원대로 아들을 얻었고, 새 아내의 경제적인 능력에 힘입어 세상 부러울 것 없이 재미있게 산다.

@BRI@전처나 두 딸과는 왕래가 없었지만 오랜 시간이 흐른 후 바람결에 들려온 소식. 딸 하나는 이혼을 했고, 또 다른 딸은 부부싸움 끝에 남편이 집에 불을 질러 화상을 입고 우울증으로 치료 중이라고 했다. 그리고 전처는 세상을 떠났고.

그래도 새로 이룬 가정에는 별일이 없을 것만 같았다. 그런데 아뿔싸, 사업한다고 여기저기서 돈을 끌어다 쓰던 아내가 돈을 갚지 못하게 되자 잠적해 버린 것. 그제야 챙겨보니 이미 모든 재산의 명의는 아내 앞으로 다 되어 있었고, 다른 남자를 따라나섰다는 소문만 무성했다.

서른이 된 아들은 자기 앞가림도 제대로 하지 못해 늘 걱정이었는데, 부자(父子) 둘만 달랑 남았으니 속수무책. 체격도 좋고 연세에 비해 피부도 팽팽했던 어르신은 그 충격으로 하루아침에 어깨 굽은 노인이 되어 나타나셨다.

다행히 적지만 연금이 나오고, 식사는 무료 급식으로 해결할 수 있어 먹고 사는 데는 지장이 없지만 사는 게 사는 게 아니라는 말씀을 하셨다. 잘나가던 시절 주위에 살갑게 군 적도 없고, 인심 한 번 제대로 쓴 적이 없으니 그 누가 늙고 힘 빠진 분을 다정하게 대해 드릴까.

아내도, 돈도, 건강도 다 잃고 홀로 앉은 구부정한 어깨가 슬펐다. 그동안 살아온 삶의 대가로 받아야 하는 노년의 그림자가 너무 어둡고 깊어 덩달아 우울했다. 공짜가 없는 세상에 무엇을 믿고 저리도 무대책으로 있었을까 싶다. 돈을 모으지 못하면 사랑이라도, 정이라도 좀 모아 두실 것을….

사람도, 마음도, 사랑도, 믿음도 좀 저축해 두지 그러셨어요

이번에는 앞의 어르신보다 10년 위인 85세 여자 어르신. 시집가보니 남편이 도박꾼이더란다. 혼수로 가져간 치맛감까지 팔아 도박을 하는 걸 보고 결혼 사흘만에 집을 나와 자식 하나 없이 평생 혼자 사셨다.

함경도에서 피난 나와 닥치는 대로 일했고, 나중에는 한 재래시장 골목에서 좌판을 벌여놓고 반찬과 젓갈류를 떼다 팔았다. 그때 너무 무거운 함지를 이고 다니고 눈길에 넘어진 것을 제때에 치료하지 않아 허리가 완전히 기역(ㄱ) 자로 굽고 말았다.

돈이면 된다는 생각에 악착같이 모은 돈이 2억 정도. 한글을 깨치지 못한 이 어르신은 믿을 곳이라곤 자기 자신밖에 없었다. 통장도 벽의 도배지를 뜯어내고 넣어둘 정도. 어렵게 입소한 양로원도, 들락날락하는 병원도 다 미덥지가 않다. 다 내 돈만 욕심내는 것 같고, 그저 다들 짜고 나를 속일 것만 같다.

굽은 허리, 아픈 몸, 의지할 가지 없는 처지, 글자도 모르니 그저 두렵기만한 세상 속에서 살아온 시간이 가슴 아프다. 그러나 더 가슴 아픈 것은 팔십 평생 살아오면서 어찌 믿을 사람 한 명도 만들지 못했을까 하는 것이다.

그저 믿을 것은 나 자신뿐, 속지 않고 살려면 아무도 믿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그 어르신이 살아오면서 몸으로 마음으로 체득한 교훈이겠지만 그 불신과 무대책이 아팠다. 아니 슬펐다.

옆에서 간병하던 분이 어르신 건강이 요즘 많이 나빠졌다며 사진을 한 장 찍어달라고 부탁한다. 수의는 해놓으셨는데 영정 사진은 없다며.

사진을 찍자고 사진관에 모시고 가거나 출장 사진사를 부를 상황도 아니고, 그렇다고 그냥 있을 수도 없다며 사정을 하는 것이었다. 들고 다니는 디지털 카메라를 꺼낼 수밖에. 그 내용을 아시는지 모르시는지 어르신은 시키는 대로 아무 소리 없이 카메라를 쳐다보셨다.

별다른 일이 없으면 언젠가 이 사진이 영정으로 쓰이리라. 집에 와 사진을 들여다보려니 나도 모르게 말이 새어나온다. 돈만 저축할 것이 아니라 사람도, 마음도, 사랑도, 믿음도 좀 저축해 두지 그러셨어요. 정말 안타까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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