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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06년 4월 29일 노무현 대통령과 김한길 당시 열린우리당 원내대표, 이재오 당시 한나라당 원내대표의 조찬 모임이 있었다. 그 자리에서 노 대통령은 사학법 재개정을 둘러싼 국회 파행사태와 관련, "여당이 양보하면서 국정을 포괄적으로 책임지는 행보가 필요한 때"라며 "대승적 차원에서 여야가 국정에 대한 책임의식을 갖고 이 문제를 풀어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것은 대통령이 사학개혁후퇴를 주문한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당시 언론보도에 따르면 동석했던 김한길 의원조차도 대통령의 양보 발언에 당황했을 정도로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사학개혁국본은 즉시 청와대 앞으로 가 항의 기자회견을 열었다.

당시 열린우리당은 즉각 긴급 의총을 열고 사학개혁 후퇴 불가를 결의했다. 그러나 그 후로도 한나라당과 수구세력의 사학법 공세는 집요하게 이어졌고 열린우리당의 대응은 무력하기 이를 데 없었다. 급기야는 2006년 말, 사학법 재개정을 기정사실화하는 사태로까지 악화됐다. 그 위기를 넘긴 것은 대선 국면을 맞이한 정치권의 혼란 때문이지 사학개혁에 대한 결의 때문이 아니었다.

한나라당과의 사학법 협의는 '사학개혁후퇴'

ⓒ 오마이뉴스 이종호
지난 9일 노 대통령은 강재섭 한나라당 대표최고의원과 만난 자리에서 사학법 문제를 2월 임시국회에서 처리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기로 합의했다고 한다. 사학법은 현재 계류 중인 법안이 아니라 이미 확정되어 시행령까지 나온 법안이다. 많은 사학이 사학법에 따라 학교운영을 하고 있다. 새삼스럽게 한나라당과 협의해 사학법을 처리한다는 것은 사학개혁후퇴를 의미할 뿐이다.

회동결과를 두고 한나라당은 대통령이 사학법 시행유보에 긍정적인 입장을 밝힌 것이라고 해석했다. 반면 청와대는 대통령은 여당에 영향력이 없다며 단지 여야간에 잘 합의해 처리해달라는 원론적인 말을 했을 뿐이라는 분위기다. 하지만 이미 시행에 들어간 법안에 새삼스럽게 또 무슨 합의가 필요하단 말인가? 대통령이 나서서 이렇게 애매한 입장을 취하면 사학개혁의 입지가 점점 더 위태로워질 뿐이다.

게다가 <한겨레>의 보도에 의하면 대통령은 이날 "지난해 초 이재오 한나라당 원내대표를 만났을 때와 같은 심정”이라고 말했다 한다. 바로 2006년 4월 29일 양보 발언이 있었던 조찬모임을 가리키는 말이다.

나경원 한나라당 대변인은 "전재희 정책위 의장도 대통령이 마음을 연 것 같다고 말했다"며 "심도 있게 이야기했다"고 회담 상황을 전했다. 전재희 의장은 사학개혁국본의 방문을 받은 자리에서 "사학법 문제는 서로의 가치관이 다른 문제이므로 타협의 여지가 없다"고 잘라 말했던 인물이다. 그런 인물에게 마음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았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장영달 열린우리당 원내대표는 사학법 재개정은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 2006년 봄과 비슷한 상황으로 흘러가고 있다. 하지만 그때보다 정세가 더 안 좋은 것은 열린우리당의 실용 탈당파가 사학개혁 문제에 대해 어떤 입장을 보일지 매우 불투명하다는 점이다. 그렇지 않아도 불투명한 정치구도에서 대통령이 더욱 상황을 악화시키고 있다.

혹시 노 대통령은 사학법을 협상이 가능한 일종의 정치적 옵션으로 여기는 것 아닌가? 만약 정말로 사학법 때문에 민생법안처리가 마비되고 있다면 국민여론이 그냥 두지 않을 것이다.

노 대통령이 원활한 처리를 바라는 것은 한미FTA나 대통령 중임제 개헌 같은 정치적 사안들 아닌가? 어느 날 갑자기 한미FTA를 1년 내에 체결하겠다고 하고, 어느 날 갑자기 대통령 중임제 개헌안을 즉각 발의하겠다고 하는 정치적 조급증이 야당의 무리한 요구를 들어주면서까지 협조를 구해야 하는 처지를 자초한 것은 아닌가?

정치 테이블에 사학법 끼워 넣는 것, 있을 수 없는 일

한미FTA나 대통령 중임제 개헌은 아직 시민사회의 공론이 모아지지 않은 것임에 반해 사학개혁은 이론의 여지가 없는 한국현대사의 숙원 사업이다. 청와대가 일방적으로 추진하는 정치의제의 테이블에 사학법을 주고받기용 카드로 끼워 넣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한나라당이 지금 사학개혁후퇴를 조건으로 통과시켜줄 듯이 말하고 있는 로스쿨 법안도 여전히 이론이 분분한 의제다. 로스쿨 등 전문대학원이 지금의 사회양극화를 더욱 심화시키고 말 뿐이라는 주장이 일각에서 계속 제기되고 있다. 이미 검증된 확실한 개혁사업과 이론의 여지가 큰 법안통과를 연계한다는 것은 정당성이 없다.

어차피 대선이 코앞에 닥쳤다. 한나라당이 사학재단만을 위해 국정을 마비시킨다면 국민의 심판에 맡기면 될 일이다. 대통령이 추진하는 올 상반기 정치일정의 관철을 위해 사학법이 희생돼야 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

물론 대통령의 사학법 처리 발언이 정말로 정치적 흥정 의도가 없는 의례적인 발언일 수 있다. 그렇다 해도 사학개혁이 위협받는 정세가 무르익도록 분위기를 조성했다는 책임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이미 수많은 사람들이 지적했듯이 지금의 사학법은 최소한의 것이다. 여기서 더 물러설 곳은 없다. 지금 필요한 건 재협상이 아니라 단호함이다. 정치가 아니라 결의인 것이다. 사학법을 정치 협상 테이블에 올리는 건 위험천만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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