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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미에서 투루판 가는 길. 길은 곧게 하늘로 뻗어있는데 바람이 심하다
하미에서 투루판 가는 길. 길은 곧게 하늘로 뻗어있는데 바람이 심하다 ⓒ 오창학
백구, 홀로 되다

이젠 완연한 혼자다. 1호차 백구만 하미의 숙소를 나섰다. '자유롭다'고 말하기엔 외롭고 우울한 정도가 깊다. 2호차는 정비소에 묶여 잘하면 오늘 늦게, 어쩌면 내일이나 수리가 될 것 같다.

2호차의 팀장이신 에릭님이 어려운 결정을 내렸다. 1호차 먼저 출발하라고. 투루판에서의 일정이 2박3일이니 기다리고 있으면 곧 합류하겠노라고, 모든 이들에 이곳에 묶여 있을 이유가 없다고.

@BRI@원래부터 1호차에 탑승하고 있던 나와 아내 그리고 교수님과 안내원 철봉씨는 투루판을 향해 출발하고 2호차에 탑승해 있던 에릭님과 자포님, 나리님은 하미에 남았다.

이들을 두고 떠나는데 마음 한 켠이 이상하다. 어차피 잠시 후엔 만날 텐데 하며 자위해 보지만 이 헤어짐이 장기화 될지 모른다는 막연한 불안이 가시질 않는다. 습관적으로 켜 두었던 무전기를 끈다. 아, 이젠 혼자지…. 침묵하는 무전기가 어색하다.

무거운 마음과는 다르게 어제 가다 만 익숙한 길이어서 차는 수월하게 움직였다. 길은 곧게 뻗은 일직선. 아스팔트의 까만 선이 하늘을 향해 솟구쳐 있다. 길 가의 표지판 '녹색통로(綠色通路)'는 이 길을 이르는 말이리라.

길은 평탄한데 강풍이 분다. 차가 좌우로 심하게 쏠린다. 흡사 바람 부는 날 영종대교를 주행하는 느낌. 불안을 느낀 아내가 운전대를 내게 넘긴다. 시속 80~90Km를 유지하며 저속운전하는 방법밖엔 별 수 없다. 그러고 보니 투루판, 우루무치를 비롯한 이 일대가 풍력발전소가 많은 곳이다.

드넓은 똥밭, 엔돌핀의 미이라들

갓길 없이 일 자로 곧은 도로에 모처럼 정차할 만한 공간이 나타난다. 차 안에 있은 지 벌써 3시간, 이제 신호가 올 때도 됐다. 차를 세우고 각자 위치를 잡는데 아무리 노상방뇨가 익숙해졌어도(후안무치라 욕하지 마시길. 만일 화장실을 찾아 소변을 봐야 한다면 하루에 두 번, 혹은 한 번도 어렵다) 바로 옆에 차가 지나는 마당에 좀 민망하다 싶어 도로 아래로 내려섰다가 깜짝 놀란다.

오! 드넓은 똥밭이여. 전후좌우 간격 1m, 혹은 50cm간격으로 배설물이 가득하다. 똥의 미이라들. 이미 다 말라 바삭바삭해 본연의 향도 색도 잃은 과거의 자취들. 설사 어제 나온 신선한 것이라 해도 신장의 태양 아래선 금세 이 모양으로 변하리라.

간만에 나타난 정차공간 옆 똥밭. 엄청난 밀도를 자랑하는데 사진에 별반 성글어 보이지 않는다
간만에 나타난 정차공간 옆 똥밭. 엄청난 밀도를 자랑하는데 사진에 별반 성글어 보이지 않는다 ⓒ 오창학
인지상정. 이 수많은 똥의 주인들이 겪었을 공통의 과정을 떠올려본다.

'기분 좋게 차를 타고 가는데 살살 신호가 온다. 한 시간을 참아 봤는데 이젠 안 될 것 같다. 염치 불구하고 아무데라도 서서 일을 치르고 싶은데 갓길이 없는 상황에서 도로를 막고 차를 세웠다간 사고로 이어질 터. 다시 한 시간을 참고 자리를 찾아 운전을 계속한다. 드디어 괄약근의 인내가 한계에 다다르고 식은땀이 이마와 뺨을 흠뻑 적실 때 저만치 정차할 만한 공간이 나타난다. 미친듯 뛰어내려 아직 잠식되지 않은 터를 찾아 시원하게 흔적 하나를 남긴다'.


뭐 이런 과정의 부산물이 아니겠나. 이 많은 똥미이라들은 고통받던 중생의 시원한 흔적이 되는 셈. 굳어진 엔돌핀이야. 그리 생각하니 똥밭에서 오줌을 누는 나도 기분이 좋아진다. 이 배설 앞에 부자도 가난한 이도 모두 공평했으리라.

다시 길을 간다. 둔황 이후의 길에선 운전이 즐겁다. 갈림길에 대한 고뇌도 없고 혼돈 그 자체인 중국의 교통상황에 대한 우려도 없다. 눈은 항상 지평선 쪽에 닿아 있고 발은 그냥 가속패달 위에 얻은 채 그대로다.

추월 때마다 방향지시등을 켜고 주행하는 승합차 한 대를 발견하고 마음이 밝아진다. 중국에도 방향지시등을 켜는 차가 있다! 운전자가 보고 싶어 일부러 그 차를 추월해 본다.

가족들인 것 같은 일군의 사람들이 승합차 안에 있다. 외국인 차량임을 알아보고 반갑게 손을 흔들어 준다. 우리도 답례. 보닛 위에 한글로 된 역사탐험 부착물을 붙인 게 잘 한 것 같다. 한류의 영향인지 한글을 보고 반가워 할 때가 많다.

싼싼(善善)까지 앞서거니 뒤서거니 그 승합차와 함께 왔다. 서로 추월할 때마다 인사를 나눴으니 열 번도 넘게 눈인사를 나눴으리라.

신장 따판지

싼싼의 길가에서 들른 음식점. 신장 따판지를 맛있게 먹었다. 우락부락한 회족 주방장은 솜씨도 있고 싹싹하다
싼싼의 길가에서 들른 음식점. 신장 따판지를 맛있게 먹었다. 우락부락한 회족 주방장은 솜씨도 있고 싹싹하다 ⓒ 오창학
13시 20분. 싼싼 시가지에 들어 처음 발견한 길가 음식점에 차를 세웠다. 2호차와 분리되어 움직인 후 일어난 첫 번째 변화다. 음식점을 찾아 음직이지 않게 된 것. 교수님이나 나나 갈 길 남겨두고 어딘가에 머뭇거리는 일에 대한 부담이 크다. 그러니 빨리 먹고 움직이자는 속.

그러나 빨리 먹고 일어나자던 본래 취지와는 다르게 신장 따판지(大盤鷄)를 시켰더니 닭 한 마리가 더디게, 푸짐하게 요리되어 나온다. 식당 옆 좌판에서 파는 과일들, 이보탕 (1위안), 홍성쉐이 (1.2위안), 하미과 (1.8위안)를 사다가 잘라 달래서 곁들이니 이만한 만찬이 없다.

결국 푸짐한 음식을 다 비우지도 못하고 젓가락을 놓으려니 하미에 남겨진 2호차 분들이 눈에 밟힌다. 왜 같이 있을 땐 소중함을 모르는 것일까. 친절하게 메뉴를 점검하고 음식을 선정해 주던 에릭님, 맛있게 드시며 개개의 음식에 대해 품평하고 식사를 풍성하게 한 자포님 그리고 시끌벅적 한껏 흥 나는 분위기를 연출하던 나리님.

음식을 먹을 때 생각나는 사람이 사랑하는 사람이라지. 그렇담 이 여행에서 그리고 이 순간 사랑하는 이들은 그들이다.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안다고 2호차의 빈자리가 크게 다가선다. 이제는 정말 혼자다. 그러나 다행히도 여럿이 함께하는 혼자다.

사실 신장에 들어서며 은근 음식에 대한 걱정을 했더랬다. 소문에 듣자하니 신장에 가면 온통 '낭(위구르족의 전통 밀가루빵)'과 '양고기'로만 매 끼를 채울 줄 알았다. 누구의 표현대로 '양기름에 비빈 밥… 아니면 밥에 양기름을 비빈 것'들만 먹을 줄 알았다. 그러나 돼지고기는 없어도 그 외의 음식은 선택할 만하다.

따판지 요리를 해준 주인 사내는 흡사 역도 선수같이 우락부락한데 살갑고 싹싹하기는 여자보다 더하다. 흰모자를 쓰고 있어 회족이냐 물으니 맞단다. 옆 식당의 위구르족 여인과 아는 체를 한다.

몸은 갸날펐으나 눈이 크고 예쁜 호리호리한 얼굴이다. 여러 인종의 땅, 이곳은 신장인 것이다. 이제 중심부로 들어갈수록 위구르인 중심이겠지만 톈진에서 여기까지의 인종 변화로도 신기하기만 하다.

불의 땅, 투루판

투루판의 상징 화염산에 앞에 선 백구. 손오공이 화초선으로 불을 껐다는 이 산은 100Km에 걸쳐 펼쳐져 있다. 마치 불에 타는 듯 이글거린다
투루판의 상징 화염산에 앞에 선 백구. 손오공이 화초선으로 불을 껐다는 이 산은 100Km에 걸쳐 펼쳐져 있다. 마치 불에 타는 듯 이글거린다 ⓒ 오창학
15:30 싼싼을 떠난 지 한 시간이 넘어 투루판에 닿았다. 과거의 지명은 '화주(火州)' 그야말로 불의 땅이다. 붉은 사암으로 형성된 산과 토양 때문일까. 이 땅은 더 붉게 타는 것 같다.

투루판 진입 32Km 전 베제클리크 천불동 들어가는 길이 보인다. 계곡으로 진입 5.5Km를 더 가니 천불동. 또 약탈 운운하며 벽화 없는 빈자리 앞에서 열 올릴 설명을 듣고 싶지 않아 이 석굴은 내부까지 들어가지 않았다. 그저 베제클릭이 위치한 실제 지형만 확인하고 싶을 뿐이었다.

베제클릭을 나와 큰 길에서 8km정도 진입해야 고창고성이 나오는데 그 바로 직전 좌측에 아스타나 고분군이 있다. 중국어로는 어쓰타나(阿斯塔那) 구펀췬이지만 이 역시 음차이니 내겐 그냥 '아스타나(Astana)'다. 위구르 어로 "영원한 휴식"이란 뜻인데, 고창성에 살다간 귀족들의 공동묘지다.

아스타나 고분군의 입구 건물. 최근에 세워진 것이다. 고분군으로 나가기 전 십이지상이 서 있는 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아스타나 고분군의 입구 건물. 최근에 세워진 것이다. 고분군으로 나가기 전 십이지상이 서 있는 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 오창학
교수님 말씀에 따르면 불과 몇 년 전까지도 허허 벌판에 무덤들만 있었다는데 지금은 버젓한 건물로 입구가 치장되어 있다. 이곳을 찾은 이는 우리 단 네 명 뿐이다. 조성된 담장을 벗어나면 이내 그냥 허허 벌판인 묘역이다. 그 중 몇 개의 묘를 개방해 관람할 수 있도록 해 놨다.

묘역에 들어섰는데 투루판 더위의 악명을 증명하려는 듯 태양은 한층 가열차다. 살도 따갑고 숨도 가쁘다. 몇 분이라도 양지에 서 있으려면 까뭇거리는 정신을 여러 차례 추스러야 할 지경이다. 굳이 이런 상황을 해명이라도 하려는 듯 입구 옆에 투루판 기후표가 크게 걸려있기는 했다.

더위가 가득한 아스타나 고분군에서
더위가 가득한 아스타나 고분군에서 ⓒ 오창학
연 평균 강수량 16mm, 증발량 3000mm. 1월엔 -24도까지 내려가고 7월엔 50도까지 오른다. 매표원의 말로는 오늘이 48도란다. 어쩐지…. 오늘 태양, 아니 여기 태양 예사롭지 않다 했다. 사방이 분지이어서 갇힌 열기가 빠져나가지 않는다는 곳. 그래서 뜨거운 사막 지대 신장 내에서도 가장 뜨겁다는 곳이 여기 투루판이다.

잠들지 못하는 희망, 아스타나 고분군

죽은 자들의 공간으로 내려가는 통로. 묘실을 보고 다시 이 계단을 오를 때의 느낌이 새롭다
죽은 자들의 공간으로 내려가는 통로. 묘실을 보고 다시 이 계단을 오를 때의 느낌이 새롭다 ⓒ 오창학
열기로부터 도망치듯 묘실로 파고든다. 비스듬히 나 있는 계단은 죽은 자들의 공간으로 난 통로다. 피라미드에 들어가는 기분까지는 아니어도 지하 무덤으로 들어가는 공간은 을씨년스럽다.

부부 미이라 한 쌍이 좌우로 전시되어 있다. 그 을씨년스러움의 근원은 이들 때문이었을까. 진짜 무덤에서 만나는 미이라는 박물관의 그것과는 사뭇 다른 느낌이다.

이곳의 건조한 기후가 시신이 흙으로 돌아가는 일을 막는다. 덕분에 영혼이 떠난 육신은 '전시물'로 무덤을 지킨다. '영원한 휴식'의 장소에서 '휴식'하지 못하는 그들이 안타깝다.

경망스럽게도 죽음은 늘 내 주변 한 발치께서 서성였다. 삶과 죽음의 경계는 명주실만큼이나 미약하고 가볍다. 이런 저런 이유로 겪은 혈육친지와 지인과의 이별. 안타깝게도 죽음엔 서열이 없었다. 열 일곱, 스물 여덟, 마흔 아홉, 일흔 여섯.

교통사고 후 대수술을 마친 아버지는 "빚이 많은데…." 한 마디를 마치고 긴 잠에 빠지셨다. 회복불가능이란, 사실상 사망선고를 받고 고향으로 내려오는 구급차 안에서 굳어가는 아버지의 몸을 느꼈다.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던 열흘 사이의 이별, '몸'이 '물체'로 변하던 때의 느낌. 그 이별을 받아들이지 못해 7년 넘게 산소에 들를 적마다 눈물을 보였더랬다.

사막의 건조한 기후로 자연 미이라가 된 부부가 좌우에 누워있다. 죽음에 대한 상념에 아내를 건드리니 화들짝 놀란다
사막의 건조한 기후로 자연 미이라가 된 부부가 좌우에 누워있다. 죽음에 대한 상념에 아내를 건드리니 화들짝 놀란다 ⓒ 오창학
이제 '물체'로 남아 유리관 속에서 전시물이 된 저들이 더욱 안타깝다. 아내도 어떤 느낌이 있는 것일까? 무덤 안에서 그녀의 얼굴이 상기되어 있다. 혼자 산다던 여인.

참 집요한 내 꾐에 넘어가 혼인하게 된 지 겨우 일 년이 지난 어느 날, 설거지를 하던 아내가 운다. 왠지 자기가 나보다 오래 살 것 같아 슬퍼졌단다.

늙고 힘없어, 그저 사방에 켜켜이 쌓인 옛 추억이나 갉아먹으며 살아야 할 때 그 때 자신의 옆에 내가 없으면 어찌해야 하냐고, 그래서 울음이 나왔단다. 어이없는 기우라며 웃음으로 일축했지만 내심 내 가슴도 울었더랬다. 항상 죽음은 현실의 문제였으므로.

그래서였을까? 연애 시절의 종지부를 찍고 부부로 살자고 보낸 서신도 이런 짧은 글이었다.

"不求同年同月同日生 但願同年同月同日死(한 날 한 시에 나기를 구하진 못하였으나, 다만 바라옵기는 한 날 한 시에 죽는 것이라)"


<삼국지> 도원결의 서약 중 한 글귀다. 그리 될까? 우린 어느 한 쪽이 불행하지 않도록 같은 날 같은 시에 눈을 감을 수 있을까.

죽어서도 함께 있는 저들이 부럽다는 생각도 든다. 나는 아내와 저렇게 한 곳에 묻힐 수 있을까? 이런 상념으로 앞에 있는 아내의 어깨를 가만히 쥔다.

"꺄악!"

돌아온 대답은 외마디 비명. 으스스한 묘실 기운에 긴장해 있던 아내가 비명으로 화답한다. 동상이몽이다. 참 분위기 깨짐이다.

무덤 주인의 고향에 자랐다는 남방지역의 식물과 새. 그는 죽어서라도 고향에 갈 수 있었을까
무덤 주인의 고향에 자랐다는 남방지역의 식물과 새. 그는 죽어서라도 고향에 갈 수 있었을까 ⓒ 오창학
또 다른 무덤엔 부장품으로 그린 벽화가 그대로 남아있다. 무덤 주인의 원래 고향은 남방 지역이었으나 타관인 이곳에까지 흘러들어와 살다가 죽음에 이르렀기에 생전에 그리워하던 고향의 나무와 풀 그리고 새들을 벽화로 꾸몄다. 죽어서나마 넋이 고향으로 가라는 배려였지만 그는 고향을 다시 갈 수 있었을까. 아직도 잠들지 못하는 희망이다.

무덤 두어 개를 더 보고 밖으로 나왔다. 교수님은 예외 없이 이 부근 전설과 신화, 지역정보에 관한 책이 없는지 확인하느라 바쁘시고 아내는 언제나처럼 장신구 판매대 앞에서 안광을 밝힌다.

나는 공원 내 설치된 십이지상 앞에 서성인다. 교수님은 책 한 권을 사시고, 아내는 더위에 질렸는지 매점 아가씨가 쓰고 있는 두건을 샀다. 나는 같은 띠인 쥐 석상 앞에서 사진을 찍었다.

잠들지 못하는 희망, 아스타나의 상념을 뒤로 하고 우린 제각각 여행의 일상으로 돌아선 것이다.

하미-투루판 여정도


2호차와 분리된 여정이 시작되어 하미에서 투루판에 이르는 420Km 주행. / 오창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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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서.화에 능하고 길떠남에 두려움이 없는 생활인. 자동차 지구 여행의 꿈을 안고 산다. 2006년 자신의 사륜구동으로 중국구간 14000Km를 답사한 바 있다. 저서 <네 바퀴로 가는 실크로드>(랜덤하우스,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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