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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주 반남 고분군 1
나주 반남 고분군 1 ⓒ 고병하
@BRI@광주에서 출발한 지 40여 분 후에 드디어 반남 고분군에 도착했다. 기다렸다는 듯이 반기면서 문화유산해설사가 우리에게 고분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해 주셨다. 그의 설명에 의하면 영산강 주위에 옛부터 사람들이 모여 살았는데, 고분에서 출토된 유물을 살펴보면 왕족이었을 것이라 한다.

금동관, 팔지, 목걸이, 화살촉, 목긴 항아리 들이 출토됐는데, 이 중에서 금동관의 모습을 본따서 나주대교 난간을 장식했다고 한다. 고분군은 나주 반남과 다시에, 그리고 영암 시종에 분포되어 있다. 무덤 주인은 2000여 년 전 마한의 마지막 왕족인 목지국이라는 설도 있다.

반남에 흩어져 있는 고분들은 대부분 원형이거나 앞이 네모지고 뒤가 둥근 전방후원분이다. 무덤은 대개 땅 위에 거대한 봉분을 쌓아 올린 후 그 꼭대기에서 2~3m 내려간 곳에 여러 개의 독널을 묻은 것들로, 가족과 같이 가까운 사람들을 차례로 묻은 공동묘다.

이 때 쓰인 독들은 일반적인 독이 아니고 독널용으로 따로 만들어진 것이다. 길이가 1m에서 1.7m 가량 되고 입지름이 0.8m 에서 1.1m 가량되는 큰 독 하나를 쓴 경우도 있지만, 주로 두개의 독을 이은 것들이다. 두 독 가운데 큰 독 쪽에 머리를 넣고 자리 쪽에 작은 독을 씌웠으며 두 독의 이음새는 진흙을 발랐다. 독안과 옆에는 장신구나 무기, 단지 등의 부장품을 묻었다.

나주 반남 고분군 2
나주 반남 고분군 2 ⓒ 고병하
영산강 일대의 무덤들은 고대 일본과 이 지역이 밀접한 연관을 맺었음을 말해주는 중요한 자료가 된다. 반남 고분군에서 볼 수 있는 전방후원분은 고대 일본에서 유행했던 무덤 형식으로, 우리나라에서는 이곳에서만 발견됐다. 반남 고분군 중 덕산리 3호분과 대안리 9호분 둘레에는 도랑이 파여 있는데, 이처럼 무덤 둘레에 도랑(주구)을 만드는 것 역시 일본의 고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형식이다.

반남 고분군은 일제 강점기 때 발굴됐고, 또 많이 도굴됐다. 주변 노인들에 따르면 그 당시에는 훨씬 더 많은 고분이 있었으며, 사람들이 '큰 독을 파냈다'고 한다.

근처에 삼국시대에 이 근처에 상당한 세력을 가진 집단이 살았음을 추측하게 하는 자미산성(둘레가 740m)이 있는데, 지금은 건물 터, 샘터, 문터가 남아 있다. 삼별초 군이 주둔했고, 고려 건국이전에 왕건과 후백제의 견훤이 싸움을 벌였던 곳이다. 우리 가족은 고분 봉분에서 바라보는 것으로 만족하고 다시에 있는 복암리 고분군으로 향했다.

나주 다시 복암리 고분군 1
나주 다시 복암리 고분군 1 ⓒ 고병하
반남에서 영산포로 나와서 홍어의 거리를 지나고 다시 장어의 거리인 구진포를 지났다. 영산강 줄기를 따라 20여 분을 가다보니 다시면 복암리에 있는 아파트형 고분군으로 알려진 곳에 도착했다. 너른 나주 평야 한 가운데에 넓게 자리를 잡은 복암리 고분군은 보기에도 시원스레 넓고 웅장했다.

복암리 고분군은 들판 한가운데 있는 조산으로, 고분인줄 몰랐던 한 가문의 선산으로 사용되었던 덕에 도굴을 면했다. 주구가 상당히 넓게 이루어져 있었다. 이 곳은 무덤 하나에 7가지의 다른 형태가 공존했다. 이 고분 조성 연대는 3세기에서 7세기까지 400여 년에 걸쳐서 완성됐다고 한다.

나주 다시 복암리 고분군 2
나주 다시 복암리 고분군 2 ⓒ 고병하
두 군데 고분군을 둘러보았는데, 대규모 고분을 만들 정도로 상당한 정치적 세력을 형성했고 이를 바탕으로 폭넓게 옹관 고분 문화를 생산을 할 수 있었던 것 같다.

복암리 고분군에서 영산강 줄기를 따라 구진포 쪽으로 차를 타고 나오다 보면 백호 임제의 영모정이 있다. 영산강을 내려다 볼 수 있는 곳에 위치한 영모정에서 시를 노래한 대시인의 흔적을 찾아보고자 했다.

백호 임제의 영모정
백호 임제의 영모정 ⓒ 고병하
39세로 요절한 백호 임제 선생은 다른 시인의 300세보다 더 풍요로운 시와 사랑, 정신과 사상을 남기고 갔다.

청초 우거진 곳에 자난다 누웠난다
홍안은 어디 두고 백골만 묻혔난다
잔 잡아 권할이 없으니 그를 설워하노라


서도 병마사로 부임해 가는 길에 개성 황진이 무덤에 잔을 붓고 읊었다는 시다. 그는 이 일로 임지에 도착하기도 전에 해임됐다 한다.

영모정 앞을 유유히 흐르는 영산강
영모정 앞을 유유히 흐르는 영산강 ⓒ 고병하
백호 선생이 남긴 유언을 들었던 기억이 난다. 그는 운명하기 전 아들들에게 "천하의 여러 나라가 제왕을 일컫지 않은 나라가 없었는데, 오직 우리나라만은 끝내 제왕을 일컫지 못하였으니, 이 같이 못난 나라에 태어나서 죽는 것이 무엇이 아깝겠느냐! 내가 죽거든 곡을 하지 말라"고 했다.

감성이 풍부했던 시인 백호 임제의 무덤을 둘러보고 싶었으나 시간상 다음 기회로 미루고 근처에 있는 나주 염색 박물관으로 향했다.

나주 천연 염색 문화관
나주 천연 염색 문화관 ⓒ 고병하
지난해 가을에 개관한 나주 천연 염색 문화관이다. 특히 다시에서 잘 자라는 쪽 염색 과정을 자세한 설명과 함께 사진 그리고 쪽물을 들인 천이 진열되어 있었다. 천연 염색 작품 감상, 구매에서 체험, 제작까지 가능한 곳이다. 전시관에 진열된 우리 것의 아름다움에 매혹될 수 있었다.

이제 서서히 배가 고파져서 우리 가족들은 빨리 나주 곰탕집으로 가기를 원했다. 차를 타고 나주시에 도착해서 곰탕 골목에 차를 주차하고 보니 바로 앞에 최근에 개관한 나주 목문화관이 있어서 아니 들어갈 수가 없었다. 아무리 배가 고파도 말이다.

나주 목사 부임하다
나주 목사 부임하다 ⓒ 고병하
목문화관 내부에는 주제인 나주 목(牧)의 역사를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 나주 지역의 삼국시대부터 정부수립까지 변천을 그래픽 패널을 통해 소개하고 있으며, 1000년 세월 동안 고려와 조선시대의 대표적 지방 행정단위인 목(牧)으로서의 나주 역할과 역대 목사들의 명단과 일화를 소개하고 있다.

그리고 '나주 목사 부임하다' '나주 읍성 둘러보기' '관아 둘러보기' 그리고 '다시 태어나는 나주'를 테마별로 자세히 안내하고 있다. 목문화관 바로 왼쪽에 나부 목사 내아가 있고, 오른쪽으로 조금만 가면 바로 금성관이 있다.

나주목사 내아
나주목사 내아 ⓒ 고병하
조선시대 때 목사가 정무를 보던 동헌 근처의 살림집. 건물의 구조는 살림채이기 때문에 주로 상류주택의 안채와 같은 평면을 이루고 있다.

금성관
금성관 ⓒ 고병하
나주목의 객사 건물이다. 객사란 임금과 궁궐을 상징하는 전패를 모셔두고 관리와 선비들이 모여 망궐례를 올리며 중앙에서 내려오는 관리들을 양쪽의 익사에서 유숙하게 했던 곳이다. 급히 목문화관, 나주 목사 내아 그리고 금성관을 둘러보았다. 다음 기회에 자세히 보기로 하고 나주에 가면 꼭 먹고 와야 할 나주 곰탕을 먹었다. 역시 맛있었다.

나주는 주로 주몽 촬영장을 보러 오는데, 근처에 있는 고분군과 나주 시내 문화재들도 더불어 둘러보길 권하고 싶다. 천년 목사골 나주에 오게 된걸 후회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덧붙이는 글 | 광주광역시교육연수원에서 발행한 <우리고장의 문화유적을 찾아서 - 나주편>을 참고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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