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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빠
오빠 ⓒ 박명순
집안의 맏이로 태어난 오빠는 다른 형제와 달리 외모가 왜소했다. 외모 콤플렉스는 정체성을 찾아가는 과정인 중학생이 되면서 자신을 더욱 수렁에 빠지게 했다.

그런 오빠를 대하는 아버지의 태도는 어린 내가 봐도 다소 위협적이었다. 대거리하며 대드는 오빠의 멱살을 잡을 때마다 집안은 우울했고, 다른 형제들은 가슴이 조마조마했다. 나는 얼른 부엌으로 달려가 날이 벼린 칼들을 감추었고, 몽둥이 될 만한 것들은 밖에 내놓았다.

오빠의 사춘기는 내 몫의 사춘기마저 앗아갔다. 걸핏하면 동네 패거리들과 몰려다니며 이웃 마을 불량배들과 이른바 '맞장'을 떴다. 아버지에 대한 반감은 상대 아이 얼굴에 멍 칠로 드러냈다. 그런 날이면 가방에 주섬주섬 옷을 싸서 어디론가 사라졌고, 곧이어 경찰이 들이닥쳤다.

어린 내 눈에 오빠는 오로지 아버지를 골탕먹이기 위해 태어난 사람 같았다. 그러나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오빠의 일기장을 훔쳐보다 영원히 가슴에 와 박힌 글 한 토막. '아버지는 한 번도 내 말을 들어주지 않았다.' 오빠가 정녕 원했던 것은 따뜻한 아버지의 말 한마디였던 것이다. 그날 이후, 모든 불화의 원인은 오빠가 아니라 아버지라고 생각했다.

@BRI@'사춘기'라는 습하고 어둑한 터널을 빠져나온 오빠는 배움을 접고, 일을 배우기 시작했다. 얼른 인쇄기술을 익혀 그 바닥에서 자리잡고 싶어했다. 그러나 마음을 다잡고 일에 마음 붙이려 해도, 오빠 주위엔 항상 버스정류장이나 골목 어귀에 진을 치고 기다리는 옛 불량배 친구들이 서성거렸다.

스물넷 젊은 나이로 이승을 마감할 때, 오빠는 너무나 가냘펐다. 고독의 깊이만큼 움푹 파인 눈두덩에선 눈물이 흘렀다. 오빠는 한 번 내 손을 쥐었다 놓았다. 저승의 문턱을 넘으려는 엄숙한 순간에, 나 홀로 아무런 준비 없이 잡은 손을 놔 주어야 하다니. 어린 나이가 감당하기엔 너무나 지독한 슬픔이어서, 지금도 그 순간을 떠올리면 내 가슴에선 마르지 않는 눈물이 흘러내린다.

오빠가 늘 깔고 누웠던 갈색 담요 밑에서 파란 일기장이 나왔다. 눈물로 얼룩진 글자 더미 속으로 눅진한 어둠이 드리워졌다. 부모와의 소통이 그리웠던 스무살 청년의 아이 같은 말투, 그것은 절규였다.

'아버지, 어머니. 죄송해요.'
'냉면을 실컷 먹을 날이 올까요.'


오빠의 육신이 떠나는 날, 그 일기장을 내가 품에 넣고 놓지 않자 아버지는 빼앗아서 타는 옷더미 속에 던져 넣었다. '오빠의 마음'과 영영 이별하는 순간이었다.

ⓒ 박명순
아이들을 지도하는 데 나는 매우 유화적인 편이다. 가능한 귀를 활짝 열어 아이들의 소리를 들으려 노력한다. '마음 소리'까지 다 읽어낼 순 없지만, 귀 기울이려고 애쓴다.

너그러움과 엄중함, 이 두 가지를 적당히 조율하기란 사실 말처럼 쉽지는 않다. 부모들은 종종, 자신이 이미 지나온 길이므로 마치 아이의 인생을 다 아는 듯이 말한다. 그래서 늘 한 발 아이 앞에 서려고 한다. 한 발 아이 뒤에 서서, 아이를 지켜보는 일. 조금 불안해도 이것만이 부모 자식 간의 '불통'을 '소통'으로 만드는 길임을 잊지 말자.

한순간 자식의 마음을 읽지 못한 대가로, 평생 자식을 가슴에 담고 살아오신 가련한 나의 아버지. 아버지에게 오늘 뜨끈한 보신탕이라도 한 그릇 사드려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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