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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립민속박물관은 2007 정해년 돼지띠해를 맞아 돼지의 상징과 의미를 살펴보는 ‘복을 부르는 돼지’ 특별전을 오는 2월 26일까지 개최한다. 사진은 밀양 표충사 대웅전 추녀마루에 있었던 장식용 기와.
ⓒ 국립민속박물관
정해년(丁亥年) 올해는 붉은 돼지해다. 오행에서 정(丁)은 불을 뜻하고, 붉은 돼지는 맏형이기 때문에 다른 해보다 복이 많다는 속설이 전해져 ‘황금돼지해’라는 믿음까지 생겨났다.

돼지꿈을 꾸면 열이면 열 사람이 복권을 산다. 옛 사람들도 꿈에 돼지가 나타나면 재물이나 음식을 얻는 길조로 여겼다. 장사꾼들은 정월 돼지날(上亥日)에 장사를 시작하면 운이 트인다고 믿었고 반대로 꿈에 돼지가 죽으면 흉조로 여겼다.

그것은 전통의 삶에서 돼지가 소와 더불어 가장 큰 살림 밑천이었고, ‘돈(豚)’자가 화폐인 ‘돈’과 발음이 같기 때문에 이를 통해 발복을 기원하는 공감주술에 뿌리를 둔다.

그러나 모두가 돼지를 좋아하지는 않는다. 이슬람교도들은 돼지의 ‘돼’자만 들어도 매우 불쾌해 한다. 이란 인들은 멧돼지를 불결한 동물로 생각해서 신심이 깊은 무슬림이 멧돼지에게 죽는 경우, 그가 다시 정화되려면 5백 년 동안 지옥불 속에 있어야 한다고 믿는다.

티베트 불교도들은 돼지가 전생에서 저지른 엄청난 악행 때문에 이승에서 지금의 모습으로 환생했다고 여긴다. 돼지를 기르지 않는 중동에서 발원한 기독교 또한 검은 돼지를 사탄의 상징으로 여겼다. 검은 돼지가 사탄이라니, 우리 조상님들이 들으면 무덤에서 펄쩍 뛰실 일이다.

▲ 개와 멧돼지가 대치하고 있는 모습의 통일신라시대 토우. 내세의 양식을 위해 무덤에 멧돼지 모양의 토우를 만들어 묻었다.(국립중앙박물관 소장)
ⓒ 국립민속박물관
돼지나 도야지는 원래 새끼 돼지를 이르는 말이었다. 원래는 ‘돝’이 어미 돼지를 지칭했으나 사어(死語)가 되면서 돼지가 표준어가 되고 도야지는 방언이 되었다.

누가 아기 돼지의 운명으로 태어나 고기로 변하는 돼지의 운명을 바꿀 수 있단 말인가? 돼지는 스스로가 먹는 것의 35퍼센트를 고기로 바꾼다. 소가 6.5퍼센트에 불과하니 비교할 대상이 없는 가공할 능력이다. 그로 인하여 돼지의 운명은 인간의 역사에서 가장 친숙하고도 비참한 존재였다.

지금도 그러하지만 동서고금을 통틀어 돼지는 신 앞에 바치는 대표적인 희생물(犧牲物)이다. 인간이 돼지고기를 좋아했고 신들마저 그 맛에 동조한 결과다. 무수한 돼지들이 죽어갔고 그런 제의(祭儀)의 현장에서는 수많은 돼지뼈가 발견됐다.

조선시대에 멧돼지는 납향(臘享)의 제물이었다. 동지가 지난 제3미일(未日)을 납일로 정하여 종묘와 사직에 큰 제사를 지낼 때 멧돼지와 토끼를 사용하였다. 현대에 와서도 어떤 일을 시작하기에 앞서 고사를 지낼 때 상 위에 돼지머리가 올라와 있는 것을 당연하게 여긴다. 대한민국 인간사 희로애락의 한 가운데 돼지고기, 삼겹살이 빠질 수 없다.

삼겹살에 대한 식탐은 신앙에 가까운 수준이니 어찌 삼겹살과 소주 없이 인생을 논하리요. 논에서 잡아온 개구리를 먹여가며 열심히 키웠던 돼지가 세상 하직하는 명절날, 나는 정든 돼지에게 이별을 고하며 슬퍼했지만 막상 달콤한 고기의 맛에 무릎을 꿇고 기쁨의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다. ‘아! 천상의 맛이여. 너무도 고마운 저팔계여!’

▲ 제주도의 흑돼지.
ⓒ 이철영
이슬람을 비롯한 종교의 영향으로 금기 되는 몇몇 지역을 제외하면 돼지고기는 단연 지구를 대표하는 단백질 공급원이다. 뉴헤브리디스 제도의 말레쿨라 섬에서는 “돼지가 생명이며 발전이며 힘이고, 돼지가 없는 인생은 껍데기”라고 말한다. 그곳에서는 아내를 얻거나 물건을 교환하는데 돼지가 사용되며 남성들의 부와 권력의 상징이 된다.

뉴기니의 파푸아족은 자신들의 돼지에 대해 진정한 자부심과 강한 애정을 느낀다. 여성들은 자신의 젖을 먹여 친자식처럼 돼지를 키우고, 도살되면 통곡한다. 또한 주인은 돼지를 죽일 수 없는데, 슬픔 때문에 돼지에게 화살을 쏘지 못할 만큼 팔에 힘이 빠지기 때문이라고 한다.

▲ 납석으로 만든 돼지 조각상(통일신라). 김유신장군 묘라고 전해지는 무덤 둘레에서 출토된 돼지 조각상으로, 어금니가 있는 돼지머리에 갑옷을 입고 오른손에는 칼을 들고 있다. (국립경주박물관 소장)
ⓒ 국립경주박물관
우리 역사에서는 돼지를 신통력 있는 영물로 보았는데, 신화 속 고구려와 고려의 수도는 돼지가 점지했다. 고구려 유리왕 21년, 하늘에 제물로 바칠 돼지인 교시(郊豕)가 달아났는데, 희생을 맡은 설지(薛支)가 국내성 위내암에서 생포하여 그 곳 주민의 집에 맡겨 기르게 하고 돌아왔다. 그리고 왕에게 “그곳은 산수가 깊고 험하며, 오곡을 심기에 알맞을 뿐만 아니라 미록과 어별이 많으므로, 국도를 그곳으로 옮기면 민리(民利)가 무궁할 것이며 병란(兵亂)도 면할 것입니다”고 하였다.

왕은 후에 그곳으로 국도를 옮겼다. 고려 태조의 부인인 작제건(作帝建)은 서해용왕을 도와주고 용왕의 딸과 함께 돼지를 얻었다. 고향으로 돌아와 돼지를 우리에 넣으려 하였으나, 들어가지 않고 송악의 남쪽 기슭에 가서 누웠다. 이 곳이 뒷날 고려의 도읍지가 되었다.

국민학생이던 어느 날 아버지의 지인(知人)을 길에서 함께 뵈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무고하신지요?”
“예, 별고 없으셨습니까? 얘야, 인사드려라… 저희 가돈(家豚)입니다”
내 이름 중에 가돈도 있나? 고개를 갸우뚱 하다가 나중에 여쭸더니
“자기 자식을 낮춰 불러 집돼지라고 한단다”

▲ 이발소나 상점 등에서 재복이 들어오길 바라면서 걸었던 그림으로, 어미 돼지 한 마리에 열 마리의 새끼가 그려져 있고, 문을 열면 모든 복이 들어온다〔開門萬福來〕는 글귀가 적혀 있다.
ⓒ 이철영
집 가(家)를 풀어 보면 집 밑에 돼지가 있는 형국이니 맞는 말씀이었고 나는 그날로 돼지가 되었다. 80년 5월 광주 금남로 거리에 있던 나는 여전히 돼지였다. 눈 앞에서 한 사나이가 진압군의 총탄에 쓰러지고 그의 목에서는 어린 시절 명절 날 마당에서 죽었던 돼지의 목에서처럼 한정 없이 피가 흘러나왔다. 정수리가 쪼개지는 듯한 공포감. 갑자기 현실로 다가온 죽음 앞에 군중들은 사냥꾼에 쫓긴 돼지 떼처럼 지하도로 휩쓸려 들어갔고 ‘나’라는 돼지 또한 함께 휩쓸려 들어 갔다.

그 이후로도 나는 수 많은 돼지들의 주검을 보아야만 했다.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에니메이션 ‘붉은 돼지’의 주인공인, 저주받은 낭만돼지 마르코는 “날지 않는 돼지는 단지 돼지일 뿐이야… 파시스트가 되느니 차라리 돼지가 되겠어’ 라고 말한다.

나는 여전히 돼지인가? 그렇다면 어떤 돼지일까?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s-oil 사보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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