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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숙이'의 벨벳코트를 빌려입고
'경숙이'의 벨벳코트를 빌려입고 ⓒ 박명순
국민학교 3학년 무렵, 엄마가 다니던 시멘트 포대 자루 공장 사장 딸인 '경숙이'에게 나는 자주 화가 났다. 그 아이는 걸핏하면 멀쩡한 내 이름 대신 '맹순이'라 부르며 놀렸다. 정말 맹했던 건지, 아니면 할아버지의 염원 때문이었는지 나는 화도 잘 내지 못했다.

그러던 어느 겨울날, 벨벳 소재의 긴 코트를 입고 다니던 그 아이와 골목에서 마주쳤다.

"너는 이런 거 입어본 적 없지?"

한 번도 새 옷을 입어보지 못한 나는 그 아이가 휙 까불리며 벨벳 코트자락이 내는 바람소리에 그만 가슴에 상처가 났다. 그 순간 머리채라도 낚아 올리고 싶었지만, 나는 내 이름값대로 살아야 할 착하고 바른 어린이여야 했으므로 눈으로 힘껏 째려보고 그냥 지나쳤다.

그해 겨울, 막 중학생이 된 오빠를 축하 겸 처음으로 가족사진이란 걸 찍게 되었다. 아, 그때의 좌절감이란. 엄마는 경숙이의 벨벳 코트를 빌려와 내게 입히는 게 아닌가. 경숙이의 비웃음이 얼핏 스쳐 지나갔다.

아니나 다를까, 경숙이는 그 사실을 동네 아이들한테 소문을 냈고, 나는 또래들 사이에서 졸지에 옷 빌려 입는 가난한 아이가 되어버렸다. 착한 어린이가 참아 내기엔 모멸감이 너무나 컸다.

햇살이 따사롭던 어느 봄날, 나는 그 아이 방에 몰래 들어가 가방 속에 들어 있는 새 교과서 두 권을 들고 나와 더러운 시궁창에 던졌다. 나는 더는 밝거나 순하고 싶지 않았다.

내가 중학생 무렵 한창 유행하던 팝송 책 펜팔 난에는, 하나같이 예쁘고 고운 이름들이 올라왔다. 세련된 생각을 한 부모들이었거나, 굳이 실명을 올릴 필요도 없는 곳이니 가명일 게 분명했다.

푼돈 챙기는 재미에 '기준'이란 가명으로 펜팔을 하는 오빠의 편지 배달을 도와주던 나는 어느 날 웃지 못할 이야기를 들었다.

편지를 주고받으며 이름으로만 알고 지내던 여학생 '강미희'를 드디어 광화문 빵집에서 만나기로 한 것이다. 이름만큼이나 예쁠 줄 알았던 여학생은 그저 밉상만 면한 외모였나 보다. 빵집에서 그만 우유를 쏟는 바람에, 친절한 그 여학생은 얼른 가방에서 손수건을 꺼내 건네주었다.

여학생이 건네 준 손수건으로 탁자 위를 닦다 무심코 보게 된 이름 석 자, '강 공 순'. 분홍색실로 학년 반과 함께 수놓아진 이름이 그렇게 낯설 수가 없더란다. 가명끼리의 만남이 허허로웠던지, 오빠는 그 일 이후로 펜팔을 그만두었다.

개명에 대한 허가 기준이 완화되면서, 부모들이 일방적으로 지어 준 이름으로 인해 심리적인 열등감에 시달렸던 사람들이 법원 앞에서 러시를 이룬다고 한다. 무성의하게 여겨지는 수많은 이름들, 발음이 어렵거나 가족의 성과 연결해 부를 때 엉뚱한 상상을 초래하는 이름들도 함께 줄을 섰다. 입신양명을 위해 제법 세련된 이름들도 줄을 섰다.

할아버지는 당신의 손녀가 세상을 '밝고 순하게' 살기를 염원하는 뜻에서 내 이름에 그렇게 주술을 걸어놓았는지도 모르겠다.

이름값을 하며 사는 일은 쉽지 않다. 이름을 세상에 알리는 일은 더더욱 쉽지 않다. 너무 거창한 이름에 눌려 스스로 지치지 않게, 소박한 이름이 가진 평범한 삶의 소중함을 통해 겸손해지는 지혜를 주신 할아버지에게 이제야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할아버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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