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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인
몇 날을 앓았음직한 작가 아내의 뒷모습이 연약해 보인다. 작가는 숨죽인 채 그런 아내 뒷모습을 아로 새기면서 미안하고 측은한 마음을 감추지 못한다.

부스스한 머리를 깐죽여 한 움큼으로 묶어내고 멀리 창밖을 바라보는 작가의 아내. 작가는 말한다.

"앓고 난 아내가 머리 묶고 일어나 앉았다. 조용하다. 무얼 보시는가? 묻지 못했다."<등뒤에서, 1996>

우리 시대 대표적 판화가 이철수. 간결하면서도 통찰력 있는 주제를 담은 판화로 대중과 친숙한 이다. 1980년대 민중 판화로 이름을 깊이 각인시켰고 1990년대에는 인간의 내면을 성찰하는 인본적인 주제를 선보이고 있다.

<등뒤에서>는 병상을 털고 일어난 아내의 뒷모습, 작가와 그의 아내에게 주어진 각각의 삶의 무게가 담겨 있는 작품이다. 소탈해 보이지만 담겨진 함의가 가볍지 않다.

이번 엽서산문집 <자고 깨어나면 늘 아침>은 일상에서 작가가 느낀 가벼움과 무거움을 모두 담아 독자들에게 엽서로 띄운 것. 때론 찰나적 느낌을, 더러는 지난한 고민과 사고의 불편함을 툴툴 털어냈다.

그러는 사이 작가의 발은 전국을 떠돌고 시간은 4개의 계절을 지난다. 독자들은 오방색으로 피어나는 꽃 같은 판화와 여백을 메우는 시골된장 같은 내용의 편지를 선물 받는다.

넓고 다양한 그의 판화 이야기

<벽>(1997)
<벽>(1997) ⓒ 이철수
여백을 채운 활자는 아이들의 종이접기부터 사회 현실, 분단, 냉전 등 스펙트럼이 넓고 색깔이 다양하다. 난생 처음 요정에 간 이야기, 농사이야기, 교도서 담장 이야기 등 된장 맛에서 시큼털털한 탱자 맛까지 가지가지다. 삶이 그런가보다.

"교도소 담장 안에, 정말 들어가 있어야 할 도둑놈들이 들어가 있는 걸까?"<벽>(1997)

아스라이 높고 고즈넉한 교도소 담장 바깥 쪽 풍경. 멀리 구름 한 조각 창공에 걸렸고 그 밑엔 그림자도 야박한 엉성한 나무 한 그루 서 있다. 여백은 시원스러운데 담장 안을 생각하면 답답해진다. 혹시 안과 밖이 바뀐 것은 아닐까. 작가의 자문이 들릴 듯하다.

이철수의 판화는 공간을 채우기 보다는 비우기가 우세하다. 작가는 이를 두고 "텅 비어 있으면, 남에게 아름답고 내게 고요합니다"라고 표현한다. 판화라는 작업은 공간을 파고 깎아서 여백을 만들어 그 속에 주제를 담는 것.

다른 이들보다 그의 판화는 여백이 참 많은 말을 들려준다. 이번에 그것도 모자라 여백에 나뭇잎 편지까지 써내려갔으니 보이지 않는 말과 글을 합치면 책 몇 권이 나올까. 하찮은 상상도 재미있다.

다 기억 못하고 흘러가는 감정의 무늬들을 엽서산문으로 옮긴 것이 세 번째다. <밥 한 그릇의 행복 물 한 그릇의 기쁨>(2002), <가만가만 사랑해야지 이 작은 것들>(2003)에 이어 세권의 나뭇잎 편지 묶음을 독자에게 보냈다. 3년간의 기다림 속에 더욱 숙성한 글과 그림이 독자 앞에 펼쳐진 셈이다.

시(詩)·서(書)·화(畵)가 공존하는 그의 판화

<북>(1988)
<북>(1988) ⓒ 이철수
3권의 편지 묶음을 관통하고 있는 주제 하나를 꼽으라면 '소박'을 세우겠다. 질그릇 같은 투박함에서 어린 민들레 여린 새순까지. 아내와 이웃과의 진솔한 삶, 농사꾼 흉내 내기 등 작가의 인간미가 칼과 펜 끝을 통해 목판에 고스란히 담겼다.

"당신 앞에라도 정직해 지고 싶어요. 부끄럼 없이 다 벗은 마음으로 그 앞에 서고 앉을 수 있으면 가벼워 질 듯해서. 늘 가볍고 홀가분한 마음으로 세상을 살다가, 그래도 어쩔 수 없이 자리차지 하는 무거움이 생기면 다시 당신 앞에 와서 이야기 다 쏟아내고 싶어요, 때로 말없이도, 그럴 수 있기를……"<당신 앞에라도…>

이철수 판화의 특징은 시(詩)·서(書)·화(畵)가 한 장의 공간 안에 공존하는 것이다. 또 전통과 현대, 선(禪)과 유물론을 자유롭게 넘나들면서 '판화로 시를 쓴다'는 예술적 작위를 얻은 그다.

충북 제천 외곽 박달재고개 언저리 어디 메쯤에서 부인과 농사를 지으면서 때론 칼을 잡아 세상을 파고 더러는 책을 읽으면서 조용한 삶을 살고 있다.

그러나 그의 펜과 칼끝에서 전해지는 나뭇잎 편지는 결코 조용하지만 않다. 사람과 사람 사이를 잇는 소통의 언어들이 나지막하게 가슴 밑면을 울린다. <새벽이 온다 북을 쳐라>(1988)처럼, 둥 둥 둥….

덧붙이는 글 | <자고 깨어나면 늘 아침> 

지은이 : 이철수 
펴낸곳 : 삼인 
펴낸날 : 2006. 12. 12 
쪽수 : 259쪽 
책값 : 1만2000원


자고 깨어나면 늘 아침 - 개정판

이철수 지음, 삼인(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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