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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03년 11월 24일자 한 일간지 1면. LG카드 사태로 1400만명이 이른바 돌려막기에 나서며 신용대란이 우려된다는 내용을 전하고 있다. 그러나 그로부터 불과 3년여가 지났을 뿐인데도 카드업계는 당시 카드대란의 원인이 됐던 '묻지마 카드 발급'에 사활을 걸고 있어 제 2의 카드 대란이 우려되고 있다.
지난 2003년 11월 24일자 한 일간지 1면. LG카드 사태로 1400만명이 이른바 돌려막기에 나서며 신용대란이 우려된다는 내용을 전하고 있다. 그러나 그로부터 불과 3년여가 지났을 뿐인데도 카드업계는 당시 카드대란의 원인이 됐던 '묻지마 카드 발급'에 사활을 걸고 있어 제 2의 카드 대란이 우려되고 있다. ⓒ 윤태
# 1. "일정한 수입 없어도 발급해 드려요."

서울 이문동 한국외국어대 앞 국민은행 지점을 찾은 대학생 H(21)씨는 은행 창구 직원의 카드 발급 권유에 당황스러웠다. '수입이 일정하지 않은 대학생인데 발급이 가능하냐'는 질문에 창구 직원은 H씨에게 "현재 수입이 있느냐'고 되물었다. H씨가 과외 수입으로 월 30만원 정도를 받고 있다고 대답하자 직원은 "카드발급이 가능하다"며 가입 신청서를 내밀었다. 그로부터 며칠 후 H씨는 한도 150만원의 신용카드를 발급 받았다.

# 2. "현금인출 한도 상향하시겠나요?"

경기 과천에 살고 있는 회사원 P(32)씨는 최근 우리은행으로부터 한 통의 문자메시지를 받았다. 'P씨님! 우리카드 현금 한도 250만원 상향 가능, 통화를 누르십시오' P씨가 무심결에 통화 버튼을 눌렀더니 '이용 한도 즉시 상향 서비스'로 연결됐다. 이용 대금 결제능력, 소득 및 재산 확인 없이 손쉽게 이용 한도를 늘린 셈이다.

# 3. "카드 발급받으면 1만원 드릴게요."

회사원 L(29)씨는 최근 사무실에서 카드 발급 권유를 받고 깜짝 놀랐다. 자신을 LG카드 신입사원이라고 밝힌 한 카드 모집인이 카드를 만들면 1만원을 주겠다고 한 것. L씨는 연회비도 없고 가입만 하면 돈을 준다는 말에 잠깐 마음이 흔들렸지만, 왠지 꺼림직 한 마음에 카드를 발급받지 않았다. 이 같은 현금 마케팅은 과거 '카드대란' 이전에 카드사들의 무분별한 카드 발급 때 사용된 것으로 엄연히 법적으로 위반이다.

이는 지난 2003년 카드사들의 과도한 외형 경쟁으로 '카드대란'이 일어났을 당시의 모습이 아니다. 지난해부터 겨우 '카드대란' 때 발생한 누적적자를 해소하고 막 '대란의 멍에'에서 벗어나기 시작한 카드 업계에 다시금 카드 발급경쟁이 도졌다.

"이대로 가다간 모두 공멸하고 만다"

@BRI@최근 한 전업계 카드사 임원은 사석에서 "이대로 가다간 모두 공멸하고 만다"고 푸념하듯 말했다. 사실 요즘 국내 카드업계는 겉으로만 보면 전혀 문제가 없는 듯 하다. 지난해 11월 말 신용카드 판매액은 역대 최대치를 기록했다. 또 작년 한 해 카드사 당기 순이익만 사상 최대인 2조원을 넘을 것으로 추산된다. 이쯤이면 2003년 '카드대란' 이후 줄곧 따라다닌 '경제 파탄의 주범'이란 꼬리표도 훌훌 털어버릴 만 하다.

그런데도 시중 카드사 임원이 "모두 공멸하고 말지 모른다"고 푸념하니 이는 무슨 뜻일까. 지난해 하반기부터 두둑한 '실탄'을 무기로 카드사들의 마케팅 경쟁이 과열되면서 그 속을 들여다보면 사정이 녹록치 않다는 것이다. 특히 자금력이 넉넉한 은행계 카드사들이 과열경쟁에 앞장서면서 전업계 카드사들도 시장 수성을 위해 마케팅 대전에 뛰어들고 있다. 벌써부터 일각에서는 "이대로 가다가는 제 2의 카드대란 위기를 부를 수 있다"는 우려마저 나오고 있다.

최근 카드 시장의 마케팅 과열 양상은 과거 '카드대란' 직전의 상황을 떠올리게 한다. 당시 이른바 닷컴경제의 거품이 꺼지기 시작하면서 다급해진 정부가 급하게 꺼내든 카드가 내수부양책이었다. 이 바람을 타고 국내 카드사들은 건국 이래 최대의 호황을 누렸다. 그 후 2년도 채 지나지 않아 상황은 급반전됐지만, 당시 호황을 곧 이어 들이닥칠 '대란의 전주곡'으로 이해한 이는 거의 없었다.

당시 지하철역 주변은 카드사들의 거리판매대로 북적였고, 수입이 일정하지 않은 대학생들도 막 카드사에 취직한 선배의 '도움'으로 신용카드 하나쯤은 소지했다. 넘쳐나는 카드 모집인들이 '수시로' 일터를 찾아와, 여기저기서 크고 작은 실랑이가 벌어지기도 했다.

길거리 모집 등 또 도진 카드발급 경쟁

ⓒ 오마이뉴스 한은희
그로부터 불과 4년 후 다시금 카드 업계가 전에 없는 활황을 누리는 시기, 불행히도 당시 상황이 곳곳에서 재연되고 있다. 한동안 보이지 않았던 길거리 모집 풍경이 극장이나 백화점 주변에서 쉽게 눈에 띈다. 은행 창구에서는 소득이 일정하지 않은 이들에게도 카드를 발급해 준다. 카드 모집인 수도 3년 전 당시 수준에 육박하면서 일터에서 카드 모집인을 만나는 일도 더 이상 '옛날 일'이 아니다.

홍종학 경원대 교수(경제학)는 "1997년 외환위기와 2002년 신용카드 거품 확대 등은 대선과 맞물린 시기에 일어난 대표적 사례다"며 "대선을 앞둔 올해 역시 선거과정에서 카드 거품이 확대될 가능성이 있다"고 지적했다.

지표상으로 나타나는 '경고 사인'도 예사롭지 않다. 여신금융협회에 따르면 지난해 7월 말 현재 복수카드 소지자는 740만명으로 3개월 전인 4월말 730만명보다 10만명 가까이 늘었다. 2003년 3월 1056만명으로 '고점'을 찍은 복수카드 소지자가 카드대란을 거치면서 감소세를 보이다 최근 들어 가파른 증가세로 돌아섰다. 복수카드는 A카드사에서 현금서비스를 받은 뒤 B카드사의 대출을 갚는 이른바 '돌려막기'에 자주 쓰여 개인파산과 카드사 부실의 주원인으로 꼽혀 왔다.

카드 모집인 수도 지난해 6월 말 기준 1만2000명으로 '카드대란'을 겪은 2003년 말 1만4900명의 80% 수준에 육박했다. 카드 발급수는 이미 '카드대란' 당시를 훌쩍 넘어 4600만장에 달한다.

지난 국정감사 때 카드업계 과당 경쟁의 위험성을 지적한 바 있는 진수희 한나라당 의원(정무위)은 "카드사간 신규 카드 발급 전쟁은 이미 지난해 LG카드가 신한금융지주에 매각된 이후 은행계를 중심으로 시작됐다"며 "자칫 이로 인해 카드사들의 건전성이 다시 악화돼 또 한번 신용불량자를 양산하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고 말했다.

황영기 회장 "카드 잘돼야 주가도 뜬다" 과열 부추겨

카드사들이 올해 이후 큰 위기를 겪을 수 있다는 우려와 관련, 가장 설득력 있는 근거는 최근 들어 은행계를 중심으로 진행되는 과당경쟁이다. 이 가운데서도 카드사업 확장에 가장 열을 올리고 있는 곳은 우리은행. 황영기 우리금융지주 회장은 지난 9월 이후 기회가 있을 때마다 "카드 사업이 잘 돼야 주가도 뜬다"며 직원들을 독려했다.

실제 우리은행은 황 회장의 뜻에 따라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우리은행은 이미 고객이 자동입출금기를 이용할 때마다 '맞춤카드' 가입을 권하고, 고객관계관리(CRM) 시스템을 활용해, 문자메시지나 전화 등으로 회원 모집에 적극 나서고 있다.

또 우리비씨카드의 현금서비스 최저수수료율을 기존 11.5%에서 9.2%로 파격적으로 내렸으며 할부수수료 최저요율도 11.0%에서 10.9%로 인하했다. 이에 힘입어 우리은행의 카드 시장 점유율은 꾸준히 증가추세를 보이고 있다.

국민은행의 움직임도 예사롭지 않다. 국민은행은 광고 모델로 유명가수 보아와 비를 앞세워 대대적인 광고 마케팅을 펼치고 있다. 업계에서는 "시장점유율 2위인 국민은행이 움직일 경우 판도 자체가 흔들릴 것"이라며 두려워하고 있다. 하지만 서두에서 언급한 사례에서도 알 수 있듯이 국민은행의 무분별한 발급 확대도 우려를 낳고 있다.

한 전업계 카드사 관계자는 "과거 카드대란의 주범 중 하나가 무자격자에 대한 '묻지마'식 카드 발급과 과도한 한도부여에 있다는 점에서 은행들의 무리한 고객 확장 정책은 결코 간과할 수 없는 문제다"고 지적했다.

"새로운 수익원 찾자" 은행들 카드로 눈돌려

지난해부터 겨우 '카드대란' 때 발생한 누적적자를 해소하고 막 '대란의 멍에'에서 벗어나기 시작한 카드 업계에 다시금 카드 발급경쟁이 도졌다. 사진은 지난 2002년 카드대란 당시 여신금융협회 주최 신용카드 윤리강령 선포 및 자정결의대회.
지난해부터 겨우 '카드대란' 때 발생한 누적적자를 해소하고 막 '대란의 멍에'에서 벗어나기 시작한 카드 업계에 다시금 카드 발급경쟁이 도졌다. 사진은 지난 2002년 카드대란 당시 여신금융협회 주최 신용카드 윤리강령 선포 및 자정결의대회. ⓒ 오마이뉴스 권우성
은행들이 이처럼 카드사업 확장에 적극적인 것은 신한금융지주의 LG카드 인수로 위기감이 커진 데다 카드부문 수익률이 좋기 때문이다. 그 동안 카드 부문은 은행에서 '한 직'이나 다름없었다. 은행들은 2000년 초 카드 사업이 최고 호황을 누릴 때 저마다 카드 사업을 분사시켰다가 이후 '카드대란'으로 막대한 손실을 떠안자 다시 은행으로 흡수한 뒤 그 이후 '서자' 취급을 했다.

그러나 '카드대란' 이후 거품이 빠지고 업계가 정상화를 되찾으면서 상황은 달라졌다. 전업계 카드사들이 은행에 비해 10배 이상 높은 총자산순이익(ROA)을 기록하자 은행들도 카드 사업을 달리 보게 됐다. 여기에 시중 은행들이 지난해 3분기 이후 순익이 대폭 감소한 것도 은행권이 카드 시장으로 눈을 돌리게 된 원인이다.

한 금융권 관계자는 "경기 둔화에 따른 대출수요 감소로 더 이상 은행들의 실적잔치는 없을 것"이라며 "은행권 입장에서는 새로운 수익원을 발굴해 내야 하는데 그 중 가장 매력적인 것이 바로 카드 시장"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최근 카드사의 순익이 높아진 것은 영업 수익 증가 보다는 대손 비용 감소에서 생긴 반사이익이라는 분석이 많다. 금융감독원 관계자는 "지난해 2분기부터 이어진 업계의 흑자 행진이 얼마나 더 갈지는 장담할 수 없는 상태"라고 말했다. 즉 정해진 영업 수익 안에서 카드사마다 더 큰 수익을 노리기 위해서는 '타사 회원 뺏어오기'에 '올인'하는 수밖에 없다.

김병연 금융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국내 은행은 과거 외환위기 이후 대출 시장이 크게 경색되면서 신용카드 비중을 늘리는 등 새로운 수익 창출에 나섰지만 신용카드 부실로 호된 시련을 겪었다"며 "최근 들어 은행권 중심으로 벌어지는 무분별하게 경쟁으로 자칫 과거의 실수를 되풀이 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금감원 "무분별한 발급경쟁 대응조치"

금융감독당국도 이 같은 위기의식을 공유하고 긴장의 끈을 놓지 않고 있다. 금융감독원은 최근 들어 카드사의 현금대출 취급동향에 대해 감시를 강화하고, 앞으로 카드사 간의 무분별한 발급 경쟁에 대해서도 적절한 대응조치를 취한다는 방침이다.

김중회 금융감독원 부위원장은 "여신전문금융업법을 개정해 카드사들의 불건전한 영업행위 금지 규정을 만들어 카드 즉시 발급을 하지 못하도록 하는 한편 이동식 모집행위도 규제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참여정부 출범 초기 커다란 사회문제가 됐던 '카드대란'은 결국 400만명에 달하는 신용불량자를 낳으며 외환위기 후 최대 금융시스템 위기라는 불명예를 남겼다. 차기 정부 출범을 1년 남짓 남긴 이 시점, 현재와 같은 카드사 간의 과열 경쟁이 지속된다면 '제 2의 카드대란'이 닥쳐올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그리고 지금 '대재앙의 전주곡'은 여기저기서 들려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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