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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발하는 날 비가 내렸다. 눈이라도 내렸으면 분위기가 훨씬 좋았을 걸.
출발하는 날 비가 내렸다. 눈이라도 내렸으면 분위기가 훨씬 좋았을 걸. ⓒ 유신준
일정 내내 잘 참아주더니 마지막 날 기어코 비가 온다. 눈이라도 내렸으면 좋았을걸. 사토시가 살고 있는 큐슈의 구마모토는 겨울이 따뜻한 곳이다. 위도상 제주도보다 한참 아래쪽에 있기 때문이다. 한겨울이면 눈이라고 몇 송이 흩날리기는 하지만 쌓인 눈까지 볼 수 없는 곳이다. 눈이 왔다면 그들에게 진기한 구경거리가 되었을 텐데.

예정대로라면 오늘 남대문시장을 돌아보기로 했는데 비 때문에 일정을 변경하기로 했다. 남대문시장 대신 서울역에서 가까운 경복궁을 둘러보기로 했다. 찜질방 주차장에 차를 맡겨 두고 서울역에서 지하철 1호선을 탔다. 러시아워가 지난 시간이라 그런지 한가하다.

광화문 외벽둘레에는 설치된 작업대가 비를 맞고 있다. 생각해보니 깔끔하게 단장된 광화문 건물을 제대로 본 기억이 별로 없다. 불운하게도 올 때마다 광화문은 공사중이다.

비오는 날의 경복궁도 사람이 제법 많다. 빗속에 노랗게 지는 은행나무가 한껏 선명하게 다가온다. 맑은 날과는 다른 분위기가 있다. 비가 오는 바람에 소문난 수문장 교대의식을 보지 못했다. 흥례문 앞에 옛날복장을 재현한 위병이 있어 그나마 분위기가 났다.

유명한 청계천 복원공사장에도 들렀다. 도심 가운데 맑은 물이 흐르는 곳이라서 이채롭다. 에너지를 써서 물을 흐르게 했다는 비판이 있음에도 도심 가운데 자연을 들여 놓으려한 노력은 높이 살만하다. 답답한 서울에 인공 숨통이 하나 만들어졌다고 할까.

일정 모두 마치고 공항으로

마네킹처럼 꼼짝도 하지 않는 위병옆에 사토시가 주춤주춤 다가가서 기념사진을 찍었다. (사토시의 표정은 재미있는 사진을 만들기 위해 그가 일부러 만든 것이다)
마네킹처럼 꼼짝도 하지 않는 위병옆에 사토시가 주춤주춤 다가가서 기념사진을 찍었다. (사토시의 표정은 재미있는 사진을 만들기 위해 그가 일부러 만든 것이다) ⓒ 유신준
공항으로 가는 길. 내리는 빗방울이 제법 굵어져서 윈도우 브러쉬가 분주해졌다. 그동안 꼿꼿하게 앉아있던 사토시가 옆에서 졸고 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으려니 슬그머니 웃음이 나온다. 첫 한국 여행이라서 긴장 했을 것이다. 이제 일정을 마치니 긴장이 풀린 것이다.

성실한 그는 내가 가르쳐준 요령대로 일년 동안 새벽에 1시간씩 한국어 공부를 할 것이다. 그리하여 크고 새로운 세계를 여는 마법을 배워 나갈 것이다. 다음에 올 때는 내가 단편적으로 보여준 몇 개의 모자이크보다 더 크고 정교한 그림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가 좋아하는 김치의 나라 진면목을.

걱정했던 김치상자는 다행스럽게도 문제를 일으키지 않았다. 다만 상당액의 수하물 요금을 부담해야 했다. 기내반입 수하물을 욕심껏 들게 했는데도 위탁 수하물을 줄이는데 한계가 있었다. 무료위탁 수하물 한계치가 일인당 30kg이었는데 100kg을 넘어섰으니….

김치 때문이다. 비행기라서 수하물 요금도 비싸다. 부산까지 마중나가는 것이 너무 힘들어 서울로 오라고 했는데 슬그머니 미안한 생각이 든다. 다음번에는 꼭 배편을 이용하라고 해야겠다. 이제 한국어를 배워 스스로 찾아올 수 있을테니 교통편은 걱정할 필요가 없다.

유명한 청계천에 갔다. 답답한 서울에 인공 숨통이 하나 만들어졌다.
유명한 청계천에 갔다. 답답한 서울에 인공 숨통이 하나 만들어졌다. ⓒ 유신준
떠날 시간이 다가온다. 세시 십분발 구마모토 직항편이다. 사토시가 섭섭한 얼굴이다. 돌아가는 사토시의 마음속에는 무엇이 남았을까. 노리코씨가 B에게 고맙다며 가족과 함께 놀러오라는 말을 몇차례나 했다. 이렇게 서로 알게 되고 그 앎이 또 다른 인연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5일 동안의 여행 일정이 모두 끝났다. 그들은 우리가 준비한 여정 '한국의 일상'에 몇 번이고 감사하며 돌아갔다. 사실 우리가 특별히 해준 것도 없다. 처음에는 가이드 비슷하게 시작한 여행이었으나 점차 우리도 함께 여행의 주인공이 되어버렸다. 좋은 시간이었다.

그들과 함께 다니며 좋은 공부가 되었다. 다른 시각을 통하여 우리 것을 볼 수 있는 기회가 되었으니까. 우리 것을 우리가 보아서는 제대로 보이지 않는 법이다. 다른 눈을 통해서만 드러나게 돼있다. 외국에 나가서야 비로소 자기나라를 객관적으로 볼수있는 안목이 트이듯이.

교류를 통해 더 나은 삶의 방식을 모색할 수 있는 것은 서로에게 좋은 일이다. 이제까지 인류의 보편적인 삶이 그러했듯이 서로 다른 문화는 교류를 통해 부딪히고 섞이며 결국 인간에게 더 유용한 형태로 진화해 나갈 것이다.

늘 서먹한 한일관계를 위해

여행선물을 고르기 위해 쇼핑몰에 갔다. 일본에서 인기있는 물건이 신라면이란다.
여행선물을 고르기 위해 쇼핑몰에 갔다. 일본에서 인기있는 물건이 신라면이란다. ⓒ 유신준
멀고도 가까운 나라. 일본이라는 명사에 항상 따라붙는 수식어다. 수식어처럼 한일관계는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거리를 오가며 늘 평행선을 그어왔다. 해방이후 육십년 동안 수없이 공식적인 자리에서 만났는데도 거리는 좀체로 줄어들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악수하고 사진찍고 밥먹고 헤어지는 일을 수도 없이 반복해왔음에도 한일관계는 늘 제자리 걸음이다.

정치인들은 망언을 하고 망언의 후유증은 애먼 민간교류를 중단하는 것으로 매듭짓는다. 오랫동안 같은 일을 반복해왔으면 이젠 이력이 날 때도 됐을 텐데. 서로 좀더 두터운 이해의 폭이 만들어졌을 법도 한데 현실은 불행히도 그렇지 못하다. 한일관계는 늘 서먹하다.

무슨 일이 터질 때마다 표면적인 상황에 여론만 들끓을 뿐 속 깊은 사려는 보이지 않는다. 상대방의 이야기는 들으려 하지 않고 자신의 주장만을 녹음기처럼 되풀이한다. 보고 있으면 답답해진다. 머리를 굴려서는 해결되지 않는다. 서로 가슴을 열지 않으면 '멀고도 가까운' 거리는 한 치도 가까워지지 않는다.

문제가 뭔가. 한일관계는 정치적으로 해결이 어렵다는 것이다. 정치는 근본적으로 가슴이 없는 영역이다. 국가이익의 계산이 첨예하게 대립하는 머리만 존재하는 곳이다. 그런 메마른 곳에서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지혜를 기대할 수 없다. 한일관계를 풀려면 가슴을 여는 민간교류가 든든하게 받쳐줘야 한다. 정치적인 제자리걸음을 벗어나게 하는 길은 민간교류 활성화밖에 없다.

일본과 몇 가닥 인연을 이어오는 동안 깨달은 것이 있다. 먼저 극복해야할 것은 생각의 차이라는 것이다. 생각이 서로 다른 것이다. 언어가 다르고 문화가 서로 다르다는 것이다. 서로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고 시작해야한다. 서로를 아는 것은 그래서 필요하다. 알지 못하기 때문에 오해가 생기고 오해는 또 다른 오해를 부르기 마련이다.

서로 가까워지지 않는 것은 서로 모르기 때문이다. 서로 알기 위해서 많이 건너가고 건너와야 한다. 그런 기회를 통해 서로가 어떻게 다른지 알아야 한다. 그래야 비로소 이해할 수 있다. 그 이해를 바탕으로 서로 신뢰가 싹트고 그것이 올바른 교류로 이어질 것이다.

좋은 이웃을 만드는 방법

5일 동안의 여행 일정이 모두 끝났다. 돌아가는 사토시의 마음속에는 무엇이 남아 있을까.
5일 동안의 여행 일정이 모두 끝났다. 돌아가는 사토시의 마음속에는 무엇이 남아 있을까. ⓒ 유신준
말 한마디 통하지 않는 험한 땅에 단 한사람 믿고 건너와준 그들의 마음을 생각하면 고맙기도 하다. 그들의 마음을 움직인 것은 믿음이었을 것이다. 바다건너 땅 어딘가에 나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생각하고 가슴이 훈훈해졌을 것이다. 좋은 이웃은 거저 만들어지지 않는다. 좋은 이웃을 얻는 가장 좋은 방법은 먼저 좋은 이웃이 돼주는 것이다.

물론 세상이 쉽지 않다는 것도 안다. '좋은 이웃'은 냉혹한 현실 앞에서 한낱 감상에 불과할 수도 있다. 한일관계의 현안기사에 달린 날선 댓글들을 읽노라면 더욱 그렇다. 반일감정도 계속될 것이고 그네들이 우리를 싫어하는 혐한감정도 쉽게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대로 있을 수는 없다. 뒤틀리고 서먹한 한일관계의 답답한 유산을 언제까지 물려줄 수는 없는 일이다. 그 악연을 물려주지 않기 위해서 노력을 해야 할 의무가 우리에게 있다. 역사의 악연을 지고 이시대를 살아가는 불행한 사람들이 바로 우리들 자신이므로.

말 한마디 통하지 않는 험한 땅에 단 한사람 믿고 건너와 준 그들의 마음이 고맙다
말 한마디 통하지 않는 험한 땅에 단 한사람 믿고 건너와 준 그들의 마음이 고맙다 ⓒ 유신준

덧붙이는 글 | 지난 11월 22일부터 27일까지 충남지역을 방문한 일본 구마모토현의 노리코씨와 아들 사토시군의 한국 여행일정을 기록한 내용입니다. 이 기사는 또한 지난 10월 4일부터 한달 동안 연재한 '부부가 함께 떠난 규슈 여행기(1∼15)'의 후속기사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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