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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사기꾼> 겉그림.
<시대의 사기꾼> 겉그림. ⓒ 이카루스 미디어
19세기 중반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골드러시가 한창이던 때의 일이다. 당시 미국 서부는 존 웨인이 등장하는 서부영화처럼 거친 자연을 무대로 하고 있었다. 이런 캘리포니아에서 역마차 마부의 삶은 광부의 삶보다도 더 위험하고 힘들었다. 마부들은 황금 채취지역에서 화물을 옮기면서 총을 든 노상강도들에게 언제나 표적이 되었다.

마부들은 화물의 안전을 위해서 그리고 무엇보다도 자신의 목숨을 위해서 빠르고 안전하게 역마차를 몰 수 있는 기술을 가져야만 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찰리 파크허스트'라는 사람은 하나의 전설이었다.

그는 이 지역에서 20년 넘게 역마차를 몰면서 어떤 강도에게도 짐을 강탈당하지 않은 마부였다. 그는 대담하고 빠르게 그러면서도 안전하게 역마차를 몰았고, 자신에게 위험이 다가왔을 때는 주저 없이 총을 꺼내서 강도를 사살하기도 했다.

파크허스트는 역마차를 몰지 않을 때면 동료들과 주사위 놀이와 카드를 하고 술을 마시고 담배를 즐겼다고 한다. 그러던 그가 은퇴하고 사망했을 때 놀라운 사실이 밝혀졌다. 찰리 파크허스트가 사실은 여자였던 것이다. 물론 이때까지 파크허스트를 만났던 사람들은 절대로 그가 여자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파크허스트는 철저하게 남자 행세를 하면서 수십 년동안 역마차를 몰아왔던 것이다.

주어진 한계에 맞서 싸우는 '사칭자들'

얼마 전 우리나라에서도 이와 비슷한 일이 있었다. 자신이 여자라는 사실을 숨긴 채 수년 동안 사귀던 여성과 동거하며 남자행세를 해왔던 사람의 이야기가 바로 그것이다. 황당한 이야기 같지만 역사 속에서 이런 사람들을 종종 발견할 수 있다.

사라 버튼의 <시대의 사기꾼>은 이런 사람들의 이야기다. 제목이 <시대의 사기꾼>이지만 이 책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사기꾼이라기보다는 '사칭자'라고 하는 것이 좋을지 모른다.

이 책은 재산과 금전을 노리고 타인을 등 쳐먹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아니다. 그보다는 사회의 불평등 구조 때문에 자신의 능력을 발휘할 기회를 박탈당한 사람들의 이야기다. 사칭자들은 자신들에게 주어진 삶의 한계를 알고 있다. 때문에 그 한계에 맞서 싸우며 세계를 변화시키기 보다는, 사칭을 통해서 자신에게 기회를 주고자 한다.

저자는 사칭자들을 크게 두 가지 부류로 나눈다. 첫 번째 부류의 사람들은 어떤 지위나 재산을 얻기 위해서 타인의 신분을 사칭한다. 반면에 두 번째 부류의 사람들은 업적이나 지위를 성취하기 위해 사칭을 이용한다. 두 번째 부류에는, 현실 속에서는 자신의 능력을 이용할 기회를 결코 가질 수 없었을, 비범한 재능을 가진 사람들이 포함된다. 저자는 전자를 '기회주의자' 후자를 '실용주의자'로 나눈다.

이 책에서 주로 다루는 사람들은 '실용주의자'에 해당한다. 이 실용주의자들은 실제로 사칭을 통해서 많은 업적을 남기고 세상을 좀더 좋은 곳으로 만드는데 기여를 했다. 하지만 세상의 규칙에 맞추어서 인생을 살았다면 결코 그들의 재능을 발휘하지 못했을 것이다.

어떻게 자신의 성별을 숨길 수 있었을까?

@BRI@자신이 여자라는 사실을 숨긴 채 제왕절개 수술을 최초로 성공시킨 뛰어난 외과의사 제임스 배리, 대학교수와 외과의사 그리고 감옥 경비원의 신분을 차례로 사칭한 '위대한 사칭자' 발도 데마라, 수십 년 동안 남자 행세를 해왔지만 죽은 후에 여자라는 것이 밝혀진 탁월한 기술의 벽돌공 해리 스토크 등이 그런 예에 해당한다.

흥미로운 것은 제임스 배리나 해리 스토크 처럼 평생 남성을 사칭한 여성들의 이야기다. 이들은 평범한 여성의 삶을 살았다면 결코 가질 수 없었을 기회를 얻어서 능동적인 삶을 살수 있었다. 하지만 어떻게 그렇게 오랫동안 자신의 성별을 숨길 수 있었을까?

여기에는 일반적인 사람들의 선입견이 주된 역할을 한다. 우리는 타인의 신분을 파악할 때 대체적으로 그 사람의 복장이나 말투, 장신구 등의 원시적 상징에 의존하는 경향이 있다. 더군다나 당시는 19세기였다. 당시 여성이 외과의사나 벽돌공 일을 하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고 한다. 그런 상상은 현재 동네의 치과의사가 화성에서 온 외계인이라고 생각하는 것만큼이나 비약적인 일이었다.

이들의 사칭은 비교적 성공적이었지만, 이런 사칭을 통해서 얼마나 행복하고 만족했는지는 의문이다. 개중에는 지속적인 사칭이 심한 스트레스로 나타나는 경우도 있었다. 흑인의 피를 가지고 태어났지만 완벽한 원주민 인디언으로 사칭한 '버팔로 추장' 롱 랜스가 대표적인 경우다.

롱 랜스는 사칭을 통해서 명성을 얻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자신이 흑인이라는 사실이 점점 드러나기 시작했다. 롱 랜스는 정체성의 위기가 다가오자 자살로 삶을 마감했다. 평생 수많은 신분을 사칭했던 발도 데마라는 사칭에 따른 정신적 상처를 자각하고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진실을 말하죠. 나는 이러한 사칭을 더 이상 원하지 않습니다. 내가 새로운 신분으로 사칭할 때마다 진짜 내가 누구이든 그 진짜 나는 어느 정도 죽어갑니다."

역사는 사칭자들의 삶을 기억하지 않아

사람은 누구나 살면서 한 번쯤은 변신을 꿈꾼다. 신문기자 클라크가 수퍼맨으로 변신하고, 부르스 웨인이 배트맨으로 돌변하는 것처럼. 이렇게 황당한 변신은 아니더라도 한 번쯤은 '지금의 자신과는 다른 자아'를 생각할지 모른다. 가장 무도회에 참가하는 사람들이 열심히 자신의 모습을 변장시키는 것도 이와 비슷한 이유 아닐까.

사칭자들이 자신의 영역에서 아주 뛰어난 업적을 남겼더라도, 그리고 이들이 만족스러운 삶을 살았더라도, 이들의 이름은 역사에 남지 않는다. 단지 '사칭자'라는 이유만으로 이들의 업적은 공식적인 기록에서 삭제되고 사람들은 그들의 이름을 잊는다. 오늘에 와서 사칭자들은 단지 하나의 가십거리일 뿐이다.

어떤 이유에서건 '사칭'이란 것은 위험한 전술이다. 동시에 매력적이기도 하다. 거기에는 한 사회가 금기시하는 것들에 저항하는 설렘이 있기 때문이다. 거짓말을 하려면 크게 해야 한다고 하던가? 후세들이 어떻게 평가를 하건 적어도 사칭자들은 자신의 삶을 자각하고 그 방향을 바꾸기 위해서 적극적으로 노력한 사람들이다.

'정직해야 한다'라는 생각에서 잠시 벗어나 본다면,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사람들의 삶은 그 자체로 흥미진진하다. 그리고 그다지 비현실적으로 느껴지지도 않는다. 그것은 저자의 표현처럼 이런 사칭자들이 현재에도 우리 주변에 있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지금 이 글을 읽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덧붙이는 글 | 사라 버튼 지음 / 채계병 옮김. 이카루스 미디어 펴냄.


시대의 사기꾼 - 속고 속이는 자의 심리학

사라 버튼 지음, 채계병 옮김, 이카루스미디어(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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