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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세숫대야 머리(foil pem.)를 하고 식탁에 앉은 아들
세숫대야 머리(foil pem.)를 하고 식탁에 앉은 아들 ⓒ 제정길
아들은 정시 어느 곳에도 원서를 넣지 않았다. 그렇다고 바로 수험생활에 들어간 것도 아니었다. 수능이 끝나고 달포, 수능 발표가 끝난 지 보름이 되어가는 데도 여전히 허랑방탕한 생활이 계속되었다. 낮12시나 되어서 일어나고, 게임 하고, TV 보고 밖으로 쏘다녔다.

'기다려 줘야지'하고 생각은 하면서도 '저렇게 놀아서는 내년이라도 제대로 될까'하고 은근히 조바심까지 난 나는 어느 날 아내에게 내심을 드러내고 말았다.

"저 녀석은 언제까지 저렇게 논대?"
"그러기에 말이요. 걱정은 하는 것 같은데.당신이 한번 얘기를 해보우."
"내가 하면 또 다투고 야단치게 될텐데. 괜히 그러면 감정만 상하고. 당신이 슬쩍 한번 떠 보구려."

세상에 자식만한 상전이 없다더니 우리 꼴이 그리 되었다.

1950년대 말 가출, 야단 한 번 없었던 아버지

1990년 2월 8일 아들의 첫돌에 손주를 안고 기뻐하시는 아버지 어머니
1990년 2월 8일 아들의 첫돌에 손주를 안고 기뻐하시는 아버지 어머니 ⓒ 제정길
아버지는 말이 없으셨다. 석달여 무단가출에서 돌아왔을 때 아버지는 한마디의 야단도, 아니면 '너 왜 그랬노?'하는 물음도 없으셨다. 묵묵히 나를 쳐다보시다 지게를 지고는 들로 일하러 나가셨다. 6.25의 화약 냄새가 아직 가시기 전 1950년대 말 경남 통영에서 서울까지 거리는 만만한 게 아니었다. 그 거리를, 그 시대에 무단가출이라는 우행을 감행했다. 그것도 학교에 안낸 월사금과 자취용 쌀을 팔아서. 그때 나는 중3이었다.

두어살 때의 아들, 한글도 알고 똑똑해 보였는데...
두어살 때의 아들, 한글도 알고 똑똑해 보였는데... ⓒ 제정길
처음 돌아와서도, 농사일을 거들며 지내는 1년 6개월 동안에도, 아버지는 한번도 야단치지 않으셨다. 학교를 다시 복학하란 말도 무얼 어떻게 하란 말도 일절 없으셨다. 그저 묵묵히 기다리셨다.

아버지가 한 잔 걸치시면 '초등학교만 졸업했어도 면장은 내 꺼였는데'라고 하시는 이야기를 어릴 때부터 들어왔다. 초등학교 5학년 때 월사금이 없어 학교에서 쫓겨난 이야기를 귀가 닳도록 들어온 나로서는 아버지가 바라는 게 무엇인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한번도 재촉하시지 않으셨다. 다만 묵묵히 기다리셨다.

아버지는 어떻게 그렇게 기다릴 수 있으셨을까? 자식을 키우면 부모 마음을 안다더니 나에게는 '아니올시다'였다. 나 같은 멍청한 놈은 자식이 속을 썩여봐야 그때서야 겨우 부모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아! 아버지, 당신은 어떻게 이 아들의 못난 짓을 그렇게 참을 수 있었습니까?

아들은 오늘도 낮12시가 넘어서 일어났다. 나는 또 얼마나 기다릴 수 있을 것인지.

덧붙이는 글 | 지난 번의 제 글 '수능을 망치고 방황하는 아들 이야기'에 어느 분(아지메)이 댓글을 달아오셨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참을 수 있느냐고." 물론 저는 잘 참지 못하고 성질도 급합니다. 그래도 그나마 참을수가 있었다면 제 아버지 때문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의 끝없는 철 없는 행동에 대하여 한번도 야단치시지 않고 속으로 삭이시며 참으시던 아버지.

아들을 보고 아버지를 생각하면서, 아버지께 지은 불효를 엎드려 빌면서, 아들의 재수 일년을 옆에서 지켜보며, 글을 올리겠습니다. 월 1~2회, 아들이 대학 입학 하는 날까지를 시리즈로 올려 보겠습니다. 많은 조언 부탁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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