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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은 정시 어느 곳에도 원서를 넣지 않았다. 그렇다고 바로 수험생활에 들어간 것도 아니었다. 수능이 끝나고 달포, 수능 발표가 끝난 지 보름이 되어가는 데도 여전히 허랑방탕한 생활이 계속되었다. 낮12시나 되어서 일어나고, 게임 하고, TV 보고 밖으로 쏘다녔다.
'기다려 줘야지'하고 생각은 하면서도 '저렇게 놀아서는 내년이라도 제대로 될까'하고 은근히 조바심까지 난 나는 어느 날 아내에게 내심을 드러내고 말았다.
"저 녀석은 언제까지 저렇게 논대?"
"그러기에 말이요. 걱정은 하는 것 같은데.당신이 한번 얘기를 해보우."
"내가 하면 또 다투고 야단치게 될텐데. 괜히 그러면 감정만 상하고. 당신이 슬쩍 한번 떠 보구려."
세상에 자식만한 상전이 없다더니 우리 꼴이 그리 되었다.
1950년대 말 가출, 야단 한 번 없었던 아버지
아버지는 말이 없으셨다. 석달여 무단가출에서 돌아왔을 때 아버지는 한마디의 야단도, 아니면 '너 왜 그랬노?'하는 물음도 없으셨다. 묵묵히 나를 쳐다보시다 지게를 지고는 들로 일하러 나가셨다. 6.25의 화약 냄새가 아직 가시기 전 1950년대 말 경남 통영에서 서울까지 거리는 만만한 게 아니었다. 그 거리를, 그 시대에 무단가출이라는 우행을 감행했다. 그것도 학교에 안낸 월사금과 자취용 쌀을 팔아서. 그때 나는 중3이었다.
처음 돌아와서도, 농사일을 거들며 지내는 1년 6개월 동안에도, 아버지는 한번도 야단치지 않으셨다. 학교를 다시 복학하란 말도 무얼 어떻게 하란 말도 일절 없으셨다. 그저 묵묵히 기다리셨다.
아버지가 한 잔 걸치시면 '초등학교만 졸업했어도 면장은 내 꺼였는데'라고 하시는 이야기를 어릴 때부터 들어왔다. 초등학교 5학년 때 월사금이 없어 학교에서 쫓겨난 이야기를 귀가 닳도록 들어온 나로서는 아버지가 바라는 게 무엇인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한번도 재촉하시지 않으셨다. 다만 묵묵히 기다리셨다.
아버지는 어떻게 그렇게 기다릴 수 있으셨을까? 자식을 키우면 부모 마음을 안다더니 나에게는 '아니올시다'였다. 나 같은 멍청한 놈은 자식이 속을 썩여봐야 그때서야 겨우 부모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아! 아버지, 당신은 어떻게 이 아들의 못난 짓을 그렇게 참을 수 있었습니까?
아들은 오늘도 낮12시가 넘어서 일어났다. 나는 또 얼마나 기다릴 수 있을 것인지.
덧붙이는 글 | 지난 번의 제 글 '수능을 망치고 방황하는 아들 이야기'에 어느 분(아지메)이 댓글을 달아오셨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참을 수 있느냐고." 물론 저는 잘 참지 못하고 성질도 급합니다. 그래도 그나마 참을수가 있었다면 제 아버지 때문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의 끝없는 철 없는 행동에 대하여 한번도 야단치시지 않고 속으로 삭이시며 참으시던 아버지.
아들을 보고 아버지를 생각하면서, 아버지께 지은 불효를 엎드려 빌면서, 아들의 재수 일년을 옆에서 지켜보며, 글을 올리겠습니다. 월 1~2회, 아들이 대학 입학 하는 날까지를 시리즈로 올려 보겠습니다. 많은 조언 부탁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