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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으로 덮힌 숲길로 들어갑니다.
눈으로 덮힌 숲길로 들어갑니다. ⓒ 김선호
눈을 좋아하는 건 아이들과 강아지 뿐만이 아닐 것이다. 동심의 일말을 간직한 어른이라면 그들도 역시 눈을 좋아한다. 쌓인 눈을 바라보며 어린시절의 기억 한자락을 건져 올릴 수 있는 마음을 간직한 어른들라면 누구나 이에 해당될 터.

눈 소식이 있던 지난 주말, 누구보다 눈 소식에 목을 메던 아이들의 바람이 무참하게 토요일 밤까지도 눈이 내리지 않았다. 올핸 눈 구경이 이토록이나 어렵구나 싶었다. 눈은 눈을 기다리던 아이들도 잠들고 밤이 깊은 시각에서야 내리기 시작했다. 펑펑, 하늘을 가를 듯한 함박눈이었다. 눈은 곧 쌓이고 쌓여 세상을 하얗게 덮여가고 있었다.

눈을 만나러 산으로

내 발자국, 강아지 발자국
내 발자국, 강아지 발자국 ⓒ 김선호
눈사람도 만들고,
눈사람도 만들고, ⓒ 김선호
일요일인 다음날 아침, 눈이 내려 하얗게 변한 세상을 발견한 아이들의 휘둥그레진 눈이라니. 눈을 보러 가자. 이 아이들의 동심이 눈 속에서 맘껏 뛰놀게 하자. 다른 약속을 취소하고 산으로 향했다. 등산화 끈 질끈 동여매고 진짜 눈을 만나러 숲으로 들어선다.

언제부턴가 거리에 내린 눈은 통행에 불편을 주는 귀찮은 존재로 전락해 버렸다. 눈이 쌓임과 동시에 치워져야 했고, 염화칼슘에 의해 강제로 녹아들어야 하는 거리의 눈이었다.

숲에 내린 눈은 처음 내린 순수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숲길에 쌓인 눈 위에 첫 발자국을 찍고 싶은 '일말의 동심'이 물큰 솟아올랐지만 곧 포기해야 했다. 벌써 눈 위에 발자국이 어지럽게 찍혀 있었다. 눈 내린 숲 속으로 동심을 찾으러 나선 이들이 이리도 많더란 말인지. 동심을 찾아 나선 건 사람뿐만이 아닌가 보다.

사람발자국 뿐만 아니라 강아지 발자국에 산악자전거가 지나간 흔적까지 고스란히 간직한 숲길에 우리도 또 하나의 발자국을 보태며 눈 쌓인 숲길을 걸어 나갔다.

@BRI@최대한의 안전을 고려하여 임도를 따라가는 코스를 택한다. 다른 숲길보다 상대적으로 넓은 임도는 그만큼의 안전을 보장해 주기도 하려니와 눈의 세상을 만끽하기 더 없이 좋은 장소이기도 하다. 산중턱을 휘돌아 구불구불 이어진 이 길을 가는데 까지 가보기로 한다.

오늘의 목표는 길의 끝에서는 것이 아니라, 눈에 목을 메곤 하던 아이들에게 원껏 눈을 보여주는 일이다. 눈 덮힌 산길에 들어서자마자 환호성부터 내지르던 아이들에게 오늘은 눈 쌓인 이곳이 천국이고 천연의 놀이동산이다.

마침 적당히 수분을 간직한 눈은 잘도 뭉쳐진다. 너는 몸통, 나는 머리통… 눈덩이를 금세 굴려 눈사람이 뚝딱, 만들어낸다. 눈앞에 놓고도 믿기지 않은 듯, 커다란 눈사람을 들여다 보며 신기해하는 아이들의 표정이 재밌다. 눈이 잘도 굴려 졌다. 그대로 두었다간 산길의 눈이 모두 눈사람으로 만들어질 판이다.

"눈 먹어도 돼요?"

눈 위에 하트를 그렸지요.
눈 위에 하트를 그렸지요. ⓒ 김선호
눈 내린 숲에서 만난 커다란 개 두마리
눈 내린 숲에서 만난 커다란 개 두마리 ⓒ 김선호
다행스럽게도 아이들이란 한가지에 집착하는 법이 거의 없다. 곧이어 눈덩이를 굴려서 눈싸움을 한다. 숲속에 쌓인 눈은 참 착한 눈이기도 하지. 잘도 뭉쳐지는 눈이건만 던지면 푸석, 하고 퍼지내리니 맞아도 하나도 아프지 않다.

하얀 이 눈을 '순수'로 밖에 다른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깨끗하여 아이들이 한 웅큼 베어먹어도 본다. 어찌된 일인지 잘 알 수 없지만 아이들은 눈만 보면 먹으려 들었다. 그런 아이들을 '산성눈'이니, '오염된 눈'이니 하며 말릴 때마다 어른인 나는 죄지은 기분이 들곤 했었다.

'먹어도 돼죠?' 당연하다는 듯 한움큼의 눈을 입 속에 넣는 아이들이 행복해 보인다. 오로지 시각을 통해 눈을 분석해 보는 방법 밖에는 없지만 이 숲에 쌓인 희고 깨끗한 이 눈을 먹지 못하면 이 세상 물이란 물은 모두 먹지 못하는 사태가 벌어질 것이다.

"물론, 먹어도 괜찮지."

맛나게 눈 뭉치를 입으로 가져가는 아이들을 보니 나도 눈이 먹고 싶어진다. 다가가 눈을 보니 고운 쌀가루, 아니 하얀분가루 같은 눈이 햇살에 반짝인다. 한 웅큼 집어 먹어 본 눈, 어릴 때 그 맛이다.

입으로 눈을 먹었는데 눈이 아리다. 어린 시절 눈 내린 아침이 잠깐 슬라이드 필름처럼 펼쳐지다 사라진다. 그때 생각이 나서 눈밭 위에 꽃 발자국을 찍어 본다.

'나처럼 해 봐라, 이렇게' 오른발 뒤꿈치를 고정시키고 앞쪽을 연속동작으로 돌면서 찍으면 꽃발자국이 만들어진다. 꽃발자국 찍는 아주 간단한 동작도 처음 해 보는 아이들에겐 쉽지 않은 일인가 보다. 엄마가 찍어 놓은 꽃발자국 옆에 손가락으로 크게 하트를 그리고는 저 만큼 달려가 버린다.

눈은 더 이상 오지 않는데 더 깊이 숲 속으로 들어가는 산 모퉁이를 돌 때 눈이 흩뿌리듯 날린다. 바람이 부는 것이다. 눈이 오는 일을 상기하라는 듯 나뭇가지에 쌓인 눈을 흩뿌리며 바람이 분다. 눈이 쌓인 나뭇가지는 저마다 생긴 모습대로의 눈꽃을 만들어 냈다.

떡갈나무에 내려앉은 눈꽃은 떡갈나무 가지를 닮았고, 잣나무 가지에 내린 눈은 전나무를 닮았다.

온통 크리스마스 트리로 가득한 숲

크리스마스츄리가 따로 없습니다.
크리스마스츄리가 따로 없습니다. ⓒ 김선호
나무가지마다 저마다 다른 눈꽃이 만들어 집니다
나무가지마다 저마다 다른 눈꽃이 만들어 집니다 ⓒ 김선호
자세히 보면, 눈 위에 바람이 새긴 무늬가 보일 것입니다
자세히 보면, 눈 위에 바람이 새긴 무늬가 보일 것입니다 ⓒ 김선호
아이들 표현에 의하면 숲은 온통 크리스마스나무로 가득 하다. 특히, 겨울에도 잎이 푸르른 소나무와 잣나무에 내린 눈은 초록색을 바탕으로 하얗게 쌓인 모습이 영락없는 크리스마스나무다.

임도를 따라 얼마를 걸었을까. 산길 초입에 발자국을 남긴 이들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낸다. 앞서 길을 따라간 사람을 발자국으로 상상하고 또 실제로 그들과 만났다는 사실이 재밌었다. 설사 간단한 인사를 나누며 스쳐갈지라도.

눈 위에 발자국을 새겼고, 다시 그 발자국을 따라 되돌아오는 첫 번째 주인공은 개와 그 주인이었다. 뜻밖에도 개는 무척이나 덩치가 큰데다가 한 마리도 아니고 쌍둥이처럼 생긴 두 마리의 개여서 놀랍기도 했다.

그리고 친구처럼 보이는 중년의 남자 두사람이 온 길을 되짚어 내려오는 중이었다. 눈길 위에 가지런한 두개의 발자국이 나란히 찍혔던 주인공이다.

아마도 가장 멀리까지 다녀온 듯 보이는 산악자전거를 탄 사람을 가장 늦게 만났다. 걷는 속도보다 자전거가 빨라서 훨씬 멀리까지 갔었을 수도 있었지만 자전거도 눈 쌓인 숲길에서 제 속도를 못 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누가 가장 멀리, 가장 먼저 다녀왔는지는 보다, 어떻게 보면 산행을 하기에 가장 나쁜 조건일수도 있는 눈 내린 아침에 산길을 걸어 보았다는 사실이 더 중요한 일처럼 보였다.

산 모퉁이를 돌면 바람이 불면서 눈을 흩뿌렸지요
산 모퉁이를 돌면 바람이 불면서 눈을 흩뿌렸지요 ⓒ 김선호
눈 내린 숲을 나란히 걷는 친구가 있다면 인생은 한결 깊어 지지 않을지요
눈 내린 숲을 나란히 걷는 친구가 있다면 인생은 한결 깊어 지지 않을지요 ⓒ 김선호
나는 그들이 '일말의 동심'에 대해 생각해 본 이들이라 믿고 싶다. 눈 쌓인 산길을 따라 한껏 멀리까지 걸어가본 사람들이라면.

눈이 내려 하얗게 변한 세상엔 경계마저 하얗게 흐려져 있다. 그리고 길은 끝없이 이어진다. 그 끝없이 이어진 길에 눈이 하얗게 덮여 있다. 그 끝이 궁금했지만, 오늘은 그저 눈이 쌓인 숲을 보러 왔으니 이쯤에서 돌아서도 아쉬움이 없다.

"엄마, 우리가 만든 눈사람이 사람들이 안보면 살아 움직일지도 몰라. 영화 <스노맨>처럼."

눈이 내리는 날엔 동심도 눈을 따라 내리는 걸까? 어쩌면 아이들은 꿈 속에서 영화처럼 살아 움직이는 눈사람을 만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며 눈 쌓인 숲을 돌아나온다.

눈 내린 날, 동심도 눈을 따라 내렸을 것입니다.
눈 내린 날, 동심도 눈을 따라 내렸을 것입니다. ⓒ 김선호

덧붙이는 글 | 서울, 경기 지방에 내려진 폭설주의보가 있던 지난 16일 밤 함박눈이 펑펑 쏟아졌습니다. 간만에 눈을 실컷 볼수 있었던 주말이었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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