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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걷이 끝난 들녘이 좀 쓸쓸해 보이는 풍경으로 이어진다
가을걷이 끝난 들녘이 좀 쓸쓸해 보이는 풍경으로 이어진다 ⓒ 유신준
목록에 있는 식당들은 대개 구석지고 허름하다. 웬일인지 번듯한 집들은 목록에서 빠졌다. 번쩍거리는 집에 뭔가 알레르기라도 있는 건 아닐 텐데 목록에 올라 있는 건 대부분 오래된 집들뿐이다. 끼리끼리 모이는 법인지 나를 찾는 사람들은 대개 내 음식취향과 비슷하여 목록이 변함없이 유지되고 있다.

사토시가 지난밤에는 음식을 아까워하더니 좀 과식을 했던 모양이다. 아침 생각이 없단다. 집에서도 아침은 그다지 달가워하지 않는 편이라고 해서 우리도 아침을 생략하기로 했다. 대신 점심을 좀 일찍 '아점'으로 당겨먹기로 했다. 오늘 일정도 사토시의 입김이 강하다. 바다가 보고 싶단다. 가는 길에 점심을 먹고 대천해수욕장 쪽으로 이동하기로 했다.

이번 여행의 무대는 주로 청양의 이웃지역들이다. 내가 살고 있는 청양이 충남의 한 가운데에 위치하는 연유로 어제 다녀온 부여를 비롯해 대천, 홍성, 예산, 공주를 거느린 중심에 자리잡고 있다. 인근 지역들과는 대개 자동차로 30분 정도 거리니 나들이에 적당하다.

일본 사람들의 한국여행은 대개 서울 부산이 주류를 이룬다. 거기에 한국음식이 덧붙여지고 경주 같은 관광지가 끼어 만들어진 세트메뉴가 대부분을 차지한다. 노리코씨네에게 청양여행은 식상한 한국여행패턴에서 벗어나 진짜 한국을 맛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것이다.

내가 진짜 여행이라고 인정하는 것은 대체로 두 가지 경우다. 첫째는 가이드 없이 떠날 것. 무작정 떠나라는 뜻이 아니고 사전에 충분히 공부하여 준비하고 떠나되 가급적 혼자서 떠나라는 것이다. 가이드의 정해진 코스를 벗어나야 비로소 진짜 여행이 시작된다고 믿는다.

둘째는 알려지지 않은 곳으로 갈 것. 여행의 참맛은 대도시나 유명한 관광지에 있지 않다. 거기는 여행의 휘황한 껍데기만 즐비할 뿐 제대로 된 알맹이가 없는 곳이다. 사람을 만나고 그들의 삶과 생활을 피부로 접할 수 있어야 여행의 참맛을 제대로 느낄 수 있다고 믿는다. 여행은 결국 사람을 만나는 일이다.

대천의 밴댕이 집에 얽힌 사연

11시가 지나는 것을 보고 집을 나섰다. 햇살은 여전히 쨍한 날씨다. 차창 밖으로 가을걷이 끝난 들녘이 좀 쓸쓸해 보이는 풍경으로 이어진다. 내 눈에는 그저 흔하디 흔한 시골풍경인데 사토시에게는 궁금한 게 많다. 곧잘 질문이 이어진다. 사토시의 눈을 통해 나도 우리 것들을 다시 볼 수 있는 기회가 되니 이번 여행에서 얻는 것이 많다.

밴댕이 조림은 한국음식을 좋아하는 그들을 위해 준비한 특별메뉴다
밴댕이 조림은 한국음식을 좋아하는 그들을 위해 준비한 특별메뉴다 ⓒ 유신준
오늘 점심은 밴댕이 조림이다. 국수 잘 먹는 입 수제비 못 먹으랴. 한국음식을 좋아하는 그들을 위해 준비한 특별메뉴다. 열한시 반쯤 되어 정해놓은 식당을 찾았다. 아직 이른 시간이라서 우리가 첫손님인 모양이다. 이곳은 대천에서 유명한 밴댕이조림 전문식당이다. 가게는 크지 않아 사인용 좌탁 여섯 개가 전부다. 그런 형편이니 점심시간에 늦으면 자리가 없다.

이 식당은 사연이 있는 집이다. 작년이던가. 점심을 먹으러 오는 길에 우연히 야구중계방송을 듣게 됐다. 그날은 국제전이고 빅게임이라서 TV중계도 병행했던 날이다. 경기가 엎치락뒤치락하는 상황이었는지라 경기 결과가 궁금해 식당에 도착하자마자 TV를 찾았다.

구석에 조그만 것이 한 대 놓여 있긴 한데 켜 있지 않았다. TV 좀 보자고 했더니 주인인 듯한 중년여자가 안된단다. 다른 사람들에게 폐가 되지 않게 소리를 완전히 죽이고 볼테니 좀 보게 해달라고 사정을 했다. 그녀는 들은 체도 하지 않고 자기 일만 본다. 화가 났다.

이미 주문을 한 상태에서 나갈 수도 없는 일이고. 오냐. 밥상에서 조금이라도 트집거리가 나와 봐라. 당신네들 망신을 주고 나갈 테니. 벼르고 있는 사이 상이 차려졌다. 오래된 낡은 양은냄비에 대파를 듬뿍 썰어 넣고 고춧가루로 빨갛게 양념한 밴댕이조림이다. 반찬으로 나온 것은 김치와 밑반찬 두어 가지로 단출하다. 나머지는 밴댕이 조림 부속메뉴인 상추쌈과 마늘절임이다.

가만히 살펴보니 밴댕이가 제법 실하다. 반찬이 정갈하여 맘에 드는데다 맛도 담백하여 주메뉴인 밴댕이 조림을 보필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젓가락으로 밴댕이 살을 발라가며 조용히 밥을 먹고 있는데 아까 그 주인여자가 슬그머니 다가왔다. 아무 말 없이 앉더니 능숙한 솜씨로 밴댕이 가시를 발라내기 시작한다.

가시를 잡고 양쪽으로 뒤집어 주면 살만 얌전히 분리된다
가시를 잡고 양쪽으로 뒤집어 주면 살만 얌전히 분리된다 ⓒ 유신준
방식이 새롭다. 가시에서 살을 발라내는 것이 아니라 가시를 잡고 양쪽으로 뒤집어주니 살만 얌전히 분리되는 신기술이다. 신기하게 바라보고 있는데 주인여자가 입을 연다.

"아까는 화나셨었지요? 저희 집은 가게가 작아서요. 가급적이면 점심시간에 오셨다 그냥 가시는 분이 없도록 하기 위해 TV를 켜지 못합니다. TV를 켜면 아무래도 식사 시간이 길어지게 되어… 죄송합니다."

음식이면 음식, 서비스면 서비스까지 도대체 흠잡을 데가 없다. 트집을 잡아 화풀이를 하고 나간다는 본래 계획은 간데없고 졸지에 그 집 밴댕이조림 '팬'이 돼버렸다. 몇 번 들르는 사이 아는 얼굴이 됐고 지금은 가까운 사람이 찾아오면 반드시 함께 들르는 코스가 됐다.

고추에 마늘까지... 매운 음식 킬러들

내 목록에 들어 있는 식당이니 노리코씨네에게도 빼놓을 수 없는 코스다. 엊저녁 쌈밥집과 달리 반찬가짓수는 많지 않은 곳이라 내심 다행이다. 햇살 좋은 창가에 앉아 주문한 음식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손님들이 하나둘 늘어나기 시작하더니 금세 자리가 모두 찬다.

아침을 거른탓인지 밴댕이 조림 한냄비를 말끔히 비웠다
아침을 거른탓인지 밴댕이 조림 한냄비를 말끔히 비웠다 ⓒ 유신준
이윽고 우리 앞에 상이 차려졌다. 계절 음식들이 반찬으로 나왔는데 풋고추장아찌가 한 접시 끼어 있다. 노리코씨가 풋고추를 집어 든다. 한입 베어 물고는 고개를 끄덕이며 먹을 만 하다고 하자 사토시도 나선다. 맛있단다. 하긴 매운 음식 킬러들이니…. 고추에 마늘에 오늘 점심도 궁합이 잘 맞을게다.

이곳에 오면 우선 먹는 방법부터 강의를 해야 한다. 상추쌈을 펴놓고 거기에 흰밥을 얹고 나서 가시를 바른 밴댕이 살을 양념국물 듬뿍 묻혀 얹은 다음 마늘절임을 적당히 넣어 싸먹는 거라고. 쌈에 넣는 반찬 가짓수가 많으니 한 가지라도 욕심을 내게 되면 어지간한 입 크기로 감당이 어려운 상황이 발생할 수도 있다는 주의사항까지.

이곳은 음식 맛이 한결같다는 것이 큰 장점이다. 맛을 기억하고 다시 찾은 사람에게 지난번의 맛을 정확하게 재현해준다. 맛이 들쑥날쑥하지 않고 고르다는 것은 음식 잘하는 집의 조건이다. 아침을 거른 탓인지 모두 맛있게 밴댕이 조림 한 냄비를 모두 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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