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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0년대 초반 군복무 시절 김일동씨. 168cm, 58kg의 단단한 몸매를 자랑하던 김씨는 제대 3개월을 남겨놓고 허리를 다쳐 평생을 잃어버렸다고 말하고 있다.
ⓒ 김일영씨 제공
"그들은 인간이 아니라 악마였단 말입니까?"

강원도 원주시에 사는 김일동(37)씨는 아직 13년 전 악몽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혈기왕성한 23살, 군 제대 3개월을 남긴 김씨는 헬기 강하훈련 도중 강풍에 밀려 척추가 꺾이는 큰 부상을 당했다.

하지만 병원에 갈 수가 없었다. 후송도 되지 않았다. 운전병에 업혀 겨우 내무반으로 옮겨진 김씨는 3개월간 꼼짝없이 엎드려 있어야만 했다. 대령인 부대장도, 대위인 팀장도 진통제 한 알 건네지 않았다. 김씨에게 지워지지 않을 끔찍한 상처를 남긴 곳은 국군 정보사령부 산하 915정보부대. 유명한 HID(북파공작원) 양성소였다.

해병대 대신 택한 특수부대, 북파공작부대일 줄이야...

김씨가 북파공작원으로 첫 발을 딛게 된 것은 우연이었다. 1990년 군 입대를 앞둔 20살, 해병대에 자원하기 위해 서울병무청을 찾은 김씨는 '특수부대 요원모집' 벽보를 보고 호기심에 발길을 돌렸다.

사복을 입은 요원모집 담당자는 "월급이 많으며 무술을 많이 가르쳐 주고, 머리도 기를 수 있다"거나 "휴가 때는 쌍권총을 차고 나가고 제대 후에는 안기부나 경찰에 특채로 입사시켜 준다"는 감언이설을 늘어놨다. 즉석에서 서류를 접수한 김씨는 신원조회와 체력장을 거친 뒤 합격한 39명의 동기생들과 함께 강원도 속초 깊은 산골로 입대했다. 7월이었다.

"체력장이 끝나자 곧바로 합격자 발표가 났습니다. 합격자들을 버스에 태우더니 한밤중에 낯선 연병장에 내려놓더군요. 적막한 연병장 너머에 반딧불 같은 불빛 여섯 개만 보였습니다. 잠시 뒤 현관에 불이 켜졌고, 무섭게 생긴 건장한 사내 셋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여섯 개의 불빛이 세 사람의 안광이었음을 알았을 땐, 정말로 소름이 돋더군요."


뒤늦게 북파공작부대임을 알아차린 김씨와 동료들. 여섯 개의 '안광'과 함께 시작된 30개월의 군 생활은 지옥 같은 고통이었다. 휴가도, 외출·외박도 없는 외딴 부대에서 훈련과 체력단련, 기합과 구타가 이어졌다. 김씨는 그 곳을 "야수들이 살아가는 산속의 부대"라고 회고했다.

이를 악물고 27개월을 버틴 김씨에게 시련이 찾아온 것은 전역을 세 달 남겨둔 1992년 10월 26일. 강원도 속초의 부대를 떠나 경기도 의정부 인근 깊은 산골 파견대에서 복무하던 때였다.

"심한 바람으로 강하 하기에는 부적합한 날씨였는데도 신임 부대장(대령)은 부대원들의 생명이나 부상은 아랑곳없이 강하를 명령했습니다. 헬기조종사조차 강하훈련에 반대했는데도 말이죠. 결국 이날 부상자가 속출했고, 저도 척추가 꺾이는 사고를 당했습니다."


부대장도, 팀장도 외면... "진통제 한 알 안줬다"

김씨는 운전병에게 업혀 겨우 내무반으로 돌아올 수 있었지만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는 전신마비에 빠졌다. 등에는 척추가 꺾여 생긴 주먹만한 혹덩이가 부어올랐다.

하지만 김씨는 병원이나 후송은커녕 진통제도 맞지 못했다. 고통을 호소하는 김씨에게 부대장과 팀장은 "제대가 세 달도 안 남았는데 무조건 참으라"고만 했다. 화장실도 업혀 다니고, 밥도 떠먹여줘야 먹을 수 있는 중환자를 내무반에 그대로 방치한 것이다.

"어디다가 하소연할 수도 없는 비참한 나날이었죠. 제대 세 달도 안 남기고 다친 것도 억울한데 병원에는 보내주지도 않고…. 결국 이렇게 앉은뱅이나 식물인간이 돼서 나가겠구나 싶고…."


다행히 한 달 정도 지나자 김씨의 몸은 말을 듣기 시작했다. 조금씩 기어서 움직이다가 걸을 수 있을 정도가 되자 김씨는 제대했다. 1993년 1월이었다.

"걸을 수 있게 되자 팀장이 '내 말이 맞지 않느냐'고 하더군요. 특수부대에 와서 만기전역해야지, 의병전역이 무슨 말이냐고…."


그러나 김씨의 고통은 멈추지 않았다. 제대 직후인 93년 3월 찾아간 서울대병원에서 김씨는 두 차례나 척추수술을 받고 철심을 끼워 넣었다. 그의 척추는 벌써 30도나 꺾여 있었다. 의사는 다친 직후 바로 척추를 교정했더라면 수술도 필요 없었을 것이라며 혀를 찼다. 지난 2002년 상태가 악화된 김씨는 세 번째 척추수술도 했다.

김씨의 아버지는 김씨를 보훈대상자로 지정하기 위해 백방으로 뛰어다녔지만 보훈처는 "군에서 다친 기록이나 치료받은 기록이 없다"고 냉정하게 거절했다. 몇 달이 지나서야 겨우 정보사령부로부터 급조된 복무기록을 받아 보훈대상자로 지정됐다.

"한 인간의 삶 파괴시킨 국가 책임 묻고 싶다"

그 사이 김씨의 인생은 망가졌다. 168cm의 키에 몸무게가 65kg이 되던 단단한 체구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13년이 지난 지금, 김씨는 척추부상의 후유증으로 살이 찌고, 궂은 날이면 온몸에 통증을 느끼게 되는 하루하루를 살고 있다. 심각한 대인기피증과 자신감 상실도 김씨의 삶을 괴롭히는 중이다.

"교도소에 복역하는 죄수들도 척추를 다쳐 전신마비가 되면 병원에 보내주는데, 어떻게 군에서 훈련 중 낙하산사고로 전신마비가 된 환자에게 X레이 한 번 찍어보지 않고, 진통제 한 알 주지 않을 수 있습니까?"


김씨가 원하는 것은 단 한 가지뿐이다. 지금이라도 당시의 책임자들이 나서서 사과하는 것이다. 아무리 북파공작 임무를 띤 특수부대라고 해도, 인권유린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얘기다.

"그 당시 관련자들에 대한 징계와 고의로 한 인간의 삶을 파괴시킨 국가의 책임을 묻고 싶습니다. 내 가슴에 응어리진 한을 풀어주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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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오마이뉴스 입사 후 사회부, 정치부, 경제부, 편집부를 거쳐 정치팀장, 사회 2팀장으로 일했다. 지난 2006년 군 의료체계 문제점을 고발한 고 노충국 병장 사망 사건 연속 보도로 언론인권재단이 주는 언론인권상 본상, 인터넷기자협회 올해의 보도 대상 등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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