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내 이름은 애날리아 임 타운젠드.
내 이름은 애날리아 임 타운젠드. ⓒ 한나영
"묻고 싶은 게 많아요(I have a lot of questions)."

부모님을 왜 찾고 싶으냐는 어리석은 내 질문에 애날리아는 이렇게 대답했다.

'묻고 싶은 게 많아서….' 하긴 그럴 것이다. 자신을 낳아준 생모를 만나면 묻고 싶은 게 한두 가지가 아닐 것이다.

왜 자기를 낳았는지, 왜 자기를 버렸는지, 왜 돌도 안 된 자신이 먼 이국 땅으로 가야 했는지, 어머니는 아직도 자기를 기억하고 있는지…. 애날리아 입 속에는 수많은 '왜'가 꿈틀거리고 있을 것이다.

"원망? 이젠 없어요"

"내 이름은 정림" 입양을 앞두고 찍은 사진인듯 이름이 영어로 표기되어 있다.
"내 이름은 정림" 입양을 앞두고 찍은 사진인듯 이름이 영어로 표기되어 있다. ⓒ 한나영
위탁모와 함께 찍은 사진. 애날리아는 이 위탁모도 함께 찾고 싶어 한다. 아기 이름은 신정림(Shin Jeong Rim).
위탁모와 함께 찍은 사진. 애날리아는 이 위탁모도 함께 찾고 싶어 한다. 아기 이름은 신정림(Shin Jeong Rim). ⓒ 한나영
"어머니에 대한 원망이나 분노가 없어요?"
"……."


지나온 서러운 세월이 생각나서였을까. 애날리아는 말을 아꼈다. 그러다 한참만에 입을 열었다.

"지금은 없어요."

지금은 없다면 과거에는 있었다는 얘기인데 왜 원망이 없겠는가. 왜 분노가 없겠는가. 자기를 버린 어머니와 조국에 대해서 말이다.

"저는 제 부모님을 이해해요. 아마 말못할 무슨 사정이 있었겠지요. 저를 키우기에 너무 어렸거나, 아니면 경제적으로 어려웠거나…. 분명히 사정이 있었을 거예요. 지금 생각해보면 저를 낳은 어머니는 참 용감하신 분 같아요. 저를 입양시킬 생각을 했으니까요. 제게 좋은 양육의 기회를 주고 싶어서 그랬을 거라고 생각해요."

좋은 양육의 기회를 주려고 미국으로 입양 보낼 생각을 했을 거라고? '꿈보다 해몽'이라더니 애날리아는 듣기 민망한 말을 내 앞에서 하고 있었다.

"저는 지금 좋은 가정에서 잘 지내고 있어요. 부모님께 사랑도 많이 받았고 안정된 가정에서 행복하게 지내고 있어요. 저를 잘 길러주신 부모님께 감사하며 살고 있어요."

애날리아는 누구인가
이름 : 신정림 (Shin, Jeong Rim)
성별 : 여
생년월일 : 1987년 5월 4일
태어난 곳 : 울산
입양되기 전 주소 : 한국의 어느 위탁모 가정 (동방아동 복지회를 통한)
입양된 날 : 1988년 5월 2일


정림이 미국행 비행기를 탄 건 서울올림픽이 열렸던 1988년이었다. 우리나라 건국 이래 최대의 스포츠 행사라던 올림픽이 불과 넉 달 보름 정도밖에 안 남았던 5월 2일이었다.

거리에는 오륜기가 펄럭였고 마스코트 호돌이의 앙증맞은 모습은 어디서나 눈에 띄었다. 경제력과 국제 사회 신뢰가 뒷받침 되어야 치를 수 있다는 세계 최대 스포츠 제전인 올림픽을 코앞에 둔 대한민국은 그렇게 들썩이고 있었다. 물론 정림의 조국인 대한민국 국민들의 자부심도 하늘을 치솟고 있었다.

더구나 두 번의 반쪽 올림픽에 이어 비로소 온전한 올림픽을 치르게 된 대한민국은 그룹 '코리아나'가 부르는 올림픽 주제가 <손에 손잡고>를 매일 틀어대며 국민들을 흥분시키고 있었다.

'손에 손잡고' 외칠 때, 손 놓은 조국

정림을 미국까지 데리고 온 해군병사 타일러와 양부모 품에 안겨 울고 있는 정림.
정림을 미국까지 데리고 온 해군병사 타일러와 양부모 품에 안겨 울고 있는 정림. ⓒ 한나영
한국에서 가져온 정림의 관련 서류를 꺼내고 있는 타일러 병사. 왼쪽 갈색백은 동방아동복지회에서 딸려 보낸 자루로 보인다.
한국에서 가져온 정림의 관련 서류를 꺼내고 있는 타일러 병사. 왼쪽 갈색백은 동방아동복지회에서 딸려 보낸 자루로 보인다. ⓒ 한나영
라디오와 TV에서도 이 노래가 계속 흘러나왔고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거리에서도 마치 점령군의 군가라도 되는 양 쉴새 없이 흘러나왔던 노래가 바로 <손에 손잡고>였다.

손에 손 잡고 벽을 넘어서
우리 사는 세상 더욱 살기 좋도록
손에 손 잡고 벽을 넘어서
서로 서로 사랑하는 한마음 되자 손잡고
고요한 아침 밝혀주는 평화 누리자


그러나 '대한의 딸' 정림은 화려한 이 노랫말과는 달리 눈물의 작별을 고한 채 쓸쓸히 조국을 떠나야 했다. 정림의 손을 잡아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정림을 가로막고 있던 벽을 허물어주는 사람도 없었다.

서로 사랑하는 한마음 되자고, 고요한 아침 밝혀주는 평화를 누리자고 애써 노래했지만 정림에게는 한마음 같이 나눌, 마음의 평화를 가져다 줄 사람이 이 땅에는 아무도 없었다. 참으로 메마른 땅이었다. 정림의 조국은.

그렇게 척박한 조국을 떠나 결국 비행기에 몸을 실어야 했던 정림이었다. 1988년 5월 2일이었다. 바로 첫 생일인 돌을 코 앞에 둔 시점이었다.

여느 가정이라면 미리 계획한 돌잔치와 초대 손님을 확인하면서 온 가족이 기쁨에 들떠 있을 행복한 날이었을 텐데…. 그렇게 서둘러 떠나 보내야 했을까. 돌이 바로 낼모레였는데.

정림이 조국을 떠난 날이 바로 돌 이틀 전이라는 사실은 나를 슬프게 했다. 부끄럽게 했다. 우리는 도대체 저 어린 것에게 무슨 짓을 했던 것인가. 대한민국 국민 모두가 공범일 거라는 생각에 나는 얼굴이 화끈거려 들 수가 없었다.

'애날리아, 미안해요. 정말 미안해요.'

정림을 태우고 갈 비행기는 도쿄를 경유하여 워싱턴으로 가는 노스웨스트 항공이었다. 그를 미국까지 데리고 갈 사람은 한국에 주둔했던 해군 병사인 타일러였다.

"이 분이 타일러예요. 저를 미국까지 데리고 온 사람이죠. 이 군인은 나 말고도 두 명의 한국 아이를 더 데리고 왔다고 해요. 공항에 마중 나온 우리 부모님이 타일러 병사와 기념사진을 찍었어요."

핏덩이의 앙칼진 울음소리

같은 날 미국으로 입양된 한국 아이는 모두 셋이었다. 맨 끝이 정림과 양부모.
같은 날 미국으로 입양된 한국 아이는 모두 셋이었다. 맨 끝이 정림과 양부모. ⓒ 한나영
목이 빠져라 정림을 기다리던 양부모는 기쁜 마음에 타일러 병사와 사진도 찍었을 것이다. 하지만 카메라 앞에 뻘쭘하게 선 타일러 병사는 별 표정이 없어 보인다.

아마 모르긴 해도 타일러 병사는 공짜 비행기표를 얻기 위해 '에스코트'를 자원한 아이 운반병(?)이 아니었을까. 그는 진정 정림의 눈물과 아픔을 알기나 할까.

타일러 병사가 쓴 파란 모자에는 'SEOUL KOREA 88 OLYMPICS'가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당시 우리나라에 불고 있던 올림픽 열기를 흑인 병사의 모자에서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런 화려한 꽃잔치 속에 숨겨진 우리의 부끄러운 자화상이 워싱턴 공항에 공존하고 있었다. 바로 돌도 안 된 핏덩이 아기, 정림의 앙칼진 울음이었다.

"이 사진이요? 제가 많이 울었대요. 얼마나 심하게 울었던지 거기 있던 사람들이 모두 저를 달래려고 애를 썼다고 하더군요."

정림은 미국에서의 첫 신고식을 이렇게 목청껏 우는 것으로 대신했다.

미국에 도착하여 양부모를 만났을 때 심하게 울었던 정림.
미국에 도착하여 양부모를 만났을 때 심하게 울었던 정림. ⓒ 한나영

덧붙이는 글 | 애날리아 이야기는 3편에서 계속됩니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