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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행 일시 : 2006.7.18(화)

공항버스 차창 너머로 손 흔들고 사라졌던 엄마와 조카가 어느새 차창 아래로 다시 다가와 손을 흔들고 있다. 엄마와 조카... 최근 내 삶에서 가장 많은 영역을 차지하는 두 사람... 지겹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따라가고 싶어 죽겠다는 조카의 얼굴과 여전히 혼자 보내는 게 불안한 엄마의 얼굴을 보자니, 문득 마음 깊은 곳에서 애틋함이 인다. 이래서 여행이 필요한건지도 모르겠다. 소 닭 보듯 하던 일상에 감정이 인다.

드디어 공항버스가 출발하고 이제 나만의 여행이 시작된다. 20대에 인도여행이 꿈인 적도 있었다. 그곳에 가면 삶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것도 같았다. 하지만 40대에 바라보는 인도는 그저 과히 쾌적치 않은 여행지일 뿐이다. 덥고 더럽고 지저분하고, 좀도둑과 사기꾼이 ‘드글드글’ 한다는 나라. 도착한 지 며칠 만에 비행기표를 바꿔 탈출하는 여행자가 적지 않다는 나라.

그런데 그런 나라를 왜?? 가냐면 공짜 비행기표가 생겼기 때문이다. 어쩌다보니 쌓인 항공사 마일리지로 아시아 국가를 왕복할 수 있다는데(대한민국 아줌마 정신에 따라). 어차피 공짜인데 기왕이면 먼 나라를 가봐야 할 것 같았다. 그래서 인도로 정했다. 물가도 싸다고 하고, 타지마할도 한번 보고 싶었고.

몇 가지 경로를 정리해보기는 했지만, 그 모든 곳을 꼭 가보진 않을 것이다. 너무 덥고 더러우면 방콕으로 빠져서(일주일도 안돼서 귀국하긴 창피하니까), 캄보디아로 건너가 앙코르와트를 보고, 기운이 솟으면 육로로 베트남까지 가보리라. 마일리지를 개념 없이 쌓아서 갈 때는 아시아나, 올 때는 KAL을 타야 한다. KAL은 델리 취항을 안 하므로 귀국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뭄바이나 방콕, 호치민 등으로 나와야 한다.

어디 가냐고 묻는 사람에게는... 인도... 언제 오냐고 묻는 사람에게는... 돈 떨어지면...이라 대답했지만 이 여행이 어디서 끝날지는 사실 나도 모른다.

여행비용으로 내가 준비한 돈은 100만원. 거기에 생각지도 않았던 가족일동의 협찬금 80만원이 붙었다. 인터넷 정보에 의하면 월 40만원이면 인도배낭여행이 충분하다고 하니, 아껴 쓰면 다섯 달도 가능한 금액. 하지만 돈은 써봐야 안다.

'젊어 고생은 사서도 한다'고 하지만 난 이미 젊지 않다. 사실 젊어서도 고생은 'No Thanks'였다.

100만원 가지고 인도에서 오래 버텼다고 누가 상 주는 것도 아닌데, 호화롭고 안락한 여행은 못해도, 너무 험한 상황에서 버틸 생각은 없다. 아무튼 델리로 가는 비행기를 탄다.

인천공항에 내려 맨 처음 할 일은 델리에서 공항픽업을 해줄 한국식당에 전해줄 물건을 받아, 수하물 처리하는 것. 외국에 있는 소규모 한국식당들이 고추장 된장 라면 소주 등 현지에서 구하기 힘든 식재료를 짐이 가벼운 배낭여행자들의 수하물을 통해 조달받고 무료로 공항픽업 및 숙소제공을 하는 경우가 있다.(물품구입비는 영수증 확인 후, 현지화폐로 계산해서 지급) 인터넷을 통해 검색해보니, 델리에도 이런 곳이 몇 군데 있었다.

여행자 입장에서는 경비절약뿐 아니라 낯선 나라에서 혼자 도심으로 들어가 첫날밤 숙소를 잡아야 하는 부담에서 벗어날 수 있을 뿐 아니라 이런저런 여행정보 및 도움을 받을 수 있다. 업소 또한 영업에 긴요한 물품들을 국내가격에 조달받을 수 있으니 서로 상부상조하는 시스템이다. 게다가 이번에는 비행기 도착시간이 자정을 넘는지라 공항픽업이 꼭 필요하다.

내가 선택한 서비스는 직접 물건을 사가는 게 아니라, 한국에 있는 그쪽 사람이 공항까지 가져온 물건을 내 명의로 수하물처리해서 가져가기만 하면 된다. 물품을 구입해서 공항까지 들고나가는 부담이 없어 더 편했다.

짐이야 비행기가 싣고 가는 건데, 그 대가로 심야에 공항까지 데리러 나와 주고, 이틀 동안 묵을 숙소와 그 식당에서 식사까지 공짜로 준다니 고마울 밖에. 약속시간에 맞춰 그쪽에서 가지고 나온 물건은 새로 산 노트북이 든 가방과 건어물이 든 라면상자 크기의 박스 하나. 수하물 처리도 자기네가 알아서 다 해줘서, 힘들 게 하나도 없었다.

그 다음 할 일은 여행자보험 들기. 그동안 해외여행을 하면서 여행자보험을 들어야겠다는 생각은 한번도 안했다. 이번에는 여행기간이 길고 여행지가 과히 위생적인 상황도 아니니, 왠지 보험을 들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차일피일 미루다 결국 출발 직전 공항에서 들게 됐다. 공항에는 카드로 즉시 가입이 가능한 4개의 보험사 부스가 있다.

기간이 길어질수록 (당연히) 보험료가 높아지는데, 과연 내가 얼마나 돌아다니다(버티다??) 올지 모르겠다. 거참. 애초 계획이 인도 2개월이었는데, 여유자금이 좀 생겼으니 그냥 넉넉하게 3개월짜리를 들기로 한다.(이러다 한 달 만에 들어오면 무지 억울하겠지?)

3개월에 2개의 보험사는 10만원, 나머지 2개의 보험사는 5만원의 가격을 제시한다. 뭐가 다른데 가격이 2배나 차이가 나냐고 물어보니, 질병이나 재해보상은 유사한데, 사망 시 보상금에 많은 차이가 난다고 한다. 사망 시 보상금이라?? 내가 그런 걸 남길 대상이 있나?

엄마나 동생들이나 그 돈 없어도 먹고 사는데 별 지장 없을 테고 5만원이면 인도에서 사흘은 먹고 잘 수 있는 돈이다. 그냥 싼 보험을 들었다. 보상금을 남길 대상이 없는 건 좋은 건가? 나쁜 건가?

이제 볼 일 다 봤으니 출국장으로 나간다. 온 나라가 비에 젖어 TV에서는 계속 숨 가쁘게 수해속보가 나오는데(그래서 일없이 외국에 놀러가는 게, 무지 양심에 걸리는데) 여기는 또 다른 세계, 방학을 맞아 어학연수 나가는 '초딩'과 인솔교사들로 법석이다. 저렇게 며칠 내보낸다고 영어 잘하는 거 아닌데.

차라리 부모가 아이와 같이 매일 1시간씩 교육방송 영어프로그램을 보고, 말 연습 해주면 애나 어른이나 서로 많이 늘 텐데.

출국장을 통과하니, 언제나 그렇듯 다채로운 조명과 색깔의 면세점이 유혹한다. 괜히 들떠 이것저것 쓸 데 없는 물건 살까봐(비상용으로 지갑바닥에 깔려 있는 카드가 들썩거린다) 두눈 질끈 감고 담배코너로 돌진하여 담배 두 보루만 사가지고 나온다. 담배 2보루에 31 달러. 과연 싸군. 싸니까 많이 펴줘야 돼???

흡연실을 찾아, 장시간의 금연에 대비해 니코틴 보충을 해주고, 휴대폰회사에서 제공하는 라운지에 가서 공짜 음료와 과자를 즐기고, 눈치껏 배낭에 몇 개 챙겨 넣기까지 한 후 드디어 비행기에 탄다.

LA발(發), 서울 경유, 델리착(着)의 아시아나 기내에는 한국인보다 인도인 탑승객이 더 많고, 그들 대부분이 다양한 형태와 색채의 인도전통의상을 입고 있다. 우리나라 비행기를 탔음에도 이미 인도여행이 시작된 듯한 느낌이다. 옆자리 탑승객이 끝내 타지 않아, 창가 쪽과 복도 쪽 두 자리를 혼자 차지하는 예상 밖 행운까지 누리며. 비행기가 날아오른다.

7시간 반. 국제선임을 감안하면, 그리 긴 탑승시간은 아니다. 외국 땅에서 맞는 첫날밤의 숙면을 위해 일부러 잠을 자지 않는다. TV화면에서는 계속 KBS 9시뉴스의 수해보도와 폐허로 변한 레바논 전경을 보여주는 CNN 뉴스가 흘러나온다. 세상은 여전히 고통 받는 사람들로 가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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