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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제에 참석한 화가 이윤기씨와 사회자 장성진씨.
예술제에 참석한 화가 이윤기씨와 사회자 장성진씨. ⓒ 김현수
29일 저녁 7시 문화공동행동 '들사람들'이 주최하는 '1000인의 문예인이 함께하는 30일간의 거리예술제' 17일째 공연이 서울 종로 보신각 앞에서 열렸다.

"올해도, 내년에도 농사짓고 싶어 합니다"

대추리·도두리 농민들은 농사를 짓고 싶다고 한다. 공연을 보는 내내 생각했다. 자연의 섭리에 부합하는 삶을 살고 싶다는 이 사람들의 바람이 그렇게도 큰 욕심인가? 짠내 나는 흙을 몇 십 년간 갈아엎으며 정성스레 내 땅으로 일군 그들한테 집과 논과 학교를 빼앗을 권리는 누가 부여했을까?

대추리, 도두리 주민들은 풀 한 포기, 흙 한 줌, 작은 풀벌레 소리 하나하나에 자신들의 숨결이 깃든 삶의 터전을 잃게 된 운명에 한 번 울었고, 자신들의 그런 모습이 정부의 보상비를 기대하는 이기주의로 비쳐졌을 때 다시 한 번 울었다.

이 사람들은 처음엔 외로웠다. 대추리 아이들이 뛰놀던 초등학교가 무너졌고, 너른 들판이 노랗게 익어가는 모습도 사라졌다. 대추리의 농사꾼들과 푸른 군복을 입은 이 땅의 자식들은 서로 비난하며 싸우기도 했다. 그러나 희망의 새싹을 돋우려는 의지는 꺾이지 않았다. 꺼지지 않는 희망의 불꽃은 사람들의 마음을 타고 커다란 공명으로 우리 곁에 다가왔다.

이날 공연은 전통무용가 하귀영씨의 입춤으로 시작됐다. 전통 기본무의 일종인 입춤은 팔만 벌리거나 몸의 관절만 움직여 자유롭게 움직이는 동작이 일품이었는데, 자칫 처질수도 있는 예술제의 분위기를 띄워는 데 안성맞춤이었다.

하씨는 "이번 공연이 대추리 주민들과 함께하는 계기가 됐으면 한다"고 밝히고 "대추리 주민들처럼 힘없는 사람들이 벌이는 이번 일에 사람들이 무관심한 것 같다"고 말했다. 이어 "대추리 주민들이 단지 그곳에 산다는 이유만으로 이런 일들을 겪는 것 같다"고 말하고 "그분들과 함께 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해서, 힘내라는 말 한마디도 하기 미안하다"고 털어놓았다.

대추리의 목소리가 들리다

무용가 하귀영씨의 입춤 공연.
무용가 하귀영씨의 입춤 공연. ⓒ 김현수
"이크 에크, 이크 에크."

전통무가 끝나자 장경태 시연단의 택견 시범이 이어졌다. 시범단이 전통 택견복을 입고 조용히 자세를 잡자, 객석은 잠시 조용해졌다. 시범단은 부드럽지만 빠르고 강한 동작으로 상대방을 제압했다. 몇 가지 연속동작이 이어지자 객석에서는 탄성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시범단은 중간에 '깡패가 선량한 시민을 괴롭히려다 오히려 택견에 제압당한다'는 상황극을 연출해 관객들의 폭소를 자아내기도 했다. 마지막으로 그들은 안치환의 노래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에 맞춰 택견 동작을 보여주었다. 자리의 관객들은 조용한 몸짓 뒤 울려퍼지던 기합소리를 통해 굳건하게 맞서는 대추리 주민들의 함성을 들을 수 있었다.

다음으로 장성진씨의 퍼포먼스 무대가 이어졌다. 마당놀이 형식으로 장씨 혼자 묻고 답하며 대추리 주민들이 겪고 있는 생활을 묘사했다. 장씨는 대추리를 지나는 객인 역으로 마을의 할머니와 어린 학생들을 만나는 장면을 연출했다.

퍼포먼스에서 할머니는 "나는 아무것도 몰라, 그저 이 땅에서 계속 농사짓는 게 바람이여"라고 말했다. 초등학생과 나누는 문답이 이어졌다. 장씨가 "꼬마야, 여기저기 군인들이 많은데 무섭지 않느냐"고 묻자 어린 학생은 "별로 무섭지는 않은데 학교를 가끔 못갈 때가 있어서 아쉬워요"라고 답했다.

대추리 주민들의 모습이 눈에 그려지는 듯했다. 마을 사람이 아니면 들어가지 못하는 고립된 곳, 자신들의 마을이 마치 남의 동네가 된 듯한 곳이 바로 대추리였다.

택견 시범단이 안치환의 노래에 맞춰 시범을 보이고 있다.
택견 시범단이 안치환의 노래에 맞춰 시범을 보이고 있다. ⓒ 김현수

"예술가로서 사회적 책임 느꼈다"
예술제에 참여한 화가 이윤기씨

▲ 그림 속 나원영 할아버지

거리예술제 공연에서는 매일 대추리 주민들 중 한 분을 정해 화폭에 담고 있습니다. 이날은 민족미술협회 소속 화가인 이윤기씨가 대추리의 나원영 할아버지를 그렸습니다. 사진 속에서 밝게 웃는 나원영 할아버지는 그간의 시름을 잊은 듯한 표정이었습니다. 공연이 끝난 뒤 이윤기 화가와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 이번 행사에 어떻게 참여하게 됐나요.
"평소에 대추리 사태를 지켜보면서 함께하고픈 마음이 늘 있었어요. 그러다 올 봄에 대추리로 들어가 학생, 주민, 아이들과 함께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면서 그곳과 인연을 맺게 됐죠.

하지만 그곳 상황이 점점 안 좋아지면서 많이 걱정하던 차에, 이번 공연 준비단한테 그림을 그려달라는 제의를 받았습니다. 그림 속 주민은 나원영 할아버지인데 대추리 인물 작업을 하는 노순택 사진작가님이 찍었던 사진을 보고 그렸어요."

- 오늘 이곳 분위기는 어떤가요.
"오늘(29일) 오후 2시 반에 와서 4시부터 그림을 그렸어요. 그림을 그리는데 지나가던 한 꼬마가 '엄마. 이 할아버지는 누구야'하고 물어봤죠. 지나가던 분들도 그렇게 점점 관심을 기울이시는 것 같아요.

대추리는 사실상 고립상태에요. 이번 공연이 대추리가 아닌 서울 한복판에서 열려 더 울림이 큰 것 같네요."

- 공연에 참여하면서 느끼신 점은.
"이번 대추리 공연은 정말 중요한 행사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무심코 지나가겠지만, 이런 행사가 대추리 사태가 잘 해결되는 데 중요한 밑거름이 될 거예요. 사람들이 휘둘리고 있는데 누군가는 나서야 하잖아요.

저는 평소에 그림을 그리는 사람으로서 사회 문제에 관심을 두고 제 역할을 고민했어요. 많은 사람의 관심이 커다란 변화를 이끌 수 있을 거라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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