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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녘
님 웨일즈의 <아리랑>은 1984년 동녘출판사에서 번역, 출간되었다. 그러나, 22년이 된 오늘날까지도 많은 학생들과 시민들 사이에서 읽힌다. 요즘은 수능시험을 준비하는 고등학생들도 많이 읽는다고 한다.

하지만, 1989년만 해도 그렇지 않았다. 공식적으로는 해금되었지만 경찰에게 '불검'(불심검문)이라도 당하면 파출소로 임의동행하게끔 만드는 책이었다. <아리랑>은 금서 아닌 금서였다.

내가 <아리랑>을 처음 알게 된 것은 1989년도 대학 1학년 때인 것 같다. '김산'이라는 전설적인 혁명가와 그에 대한 글을 쓴 여기자 님 웨일즈는 내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아리랑>에는 무언가 아주 특별한 이야기가 숨어 있을 것만 같았다. 인간들 사이의 보편적인 우정과 사랑의 이야기가 역사의 스펙터클을 배경으로 실명으로 전개될 것 같았다. 그런데, 꼭 그렇지만도 않았다.

1989년은 복잡다단한 해였다. 그 해 가을쯤 동구공산권의 붕괴가 시작되었지만, 학교 캠퍼스에서는 여름 내내 통일축전 분위기가 무르익었다. 운동장 곳곳에 축전을 위한 댄스를 연습하는 사람들이 있었고, 학원자율화가 진행된 강의실에서는 민주강좌라고 부를만한 강의들이 개설되었다. 아마 그 강의 중 하나를 수강하면서 <아리랑>을 읽었던 것 같다.

그러나 내 생각과 달리 <아리랑>은 별로 재미가 없었다. 그래서 난 두말없이 내던져버렸다. 책 마디마디에 스며있는 항일구국의 열정과 국경을 초월한 우정의 밀도는 그때 내 관심권 밖이었다.

그때는 김산도, 항일구국투쟁도, 성을 넘어선 우정도 고등학교 내내 받아온 제도권 교육의 한계 내에서만 흡수된 듯했다(물론 그 이상이며 책은 의식적으로 이해하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준다). 신비로운 혁명가의 일대기치고는 박진감도, 낭만성도, 극적 긴장도 없었다. 그냥 다큐멘터리를 찍어 나가듯 차분하게 진술되어 있었다.

그래서, 다 읽지도 않은 책을 누군가에게 줘 버린 것 같다. 그리고는 뭔가 찜찜함과 아까움이 남았다.

군대에 다녀온 후 한 친구에게서 뜻밖에 <아리랑>을 얻었다. 그 친구는 적당한 이유를 댔지만 난 그 이유가 궁금했다. <아리랑>을 내게 왜 주었는지 그 심층적인 이유가 궁금했다.그래서 그 이후로도 그런 기억들을 자주 하게 되었다.

이 친구는 졸업하고 모 영화사의 잘 나가는 프로듀서가 되었다. 서정성 짙은 연애영화와 한국적 멜로영화를 제작하는데, 학교 다닐 때의 정신을 아직도 보존하고 있는 것 같아서 좋아 보인다.

친구에게서 받은 <아리랑> 사이에는 편지가 한 장 끼워져 있었다. 내게 쓴 것은 아니고 잘못 전달된 편지였다. 그 친구에게 어떤 의미의 편지인지는 모르겠지만 내게는 하필 내게 다시 돌아온 <아리랑>이 더 중요했다. 그래서 우연히 끼워져 있던 편지는 돌려주고 <아리랑>은 돌려주지 않았다.

그 후에 재미없는 이 책을 다시 읽은 것은 아니지만 <아리랑>은 내 책장 제일 깊숙한 곳에 꽂혀있다. 친구와의 소중한 우정을 기억하면서. 그리고 <아리랑>이 내게 다시 찾아온 또 다른 의미를 한 번씩 되새기며.

김산은 중국공산당에 소속되었던 항일혁명가지만 그의 최후는 조금 황망하다. 김산은 일제스파이로 몰려 처형당하였고, 1983년이 되어서야 복권과 명예회복이 되었다고 한다. <아리랑>과 김산을 생각할 때마다 나는 1990년대는 물론 우리나라의 굴곡진 역사를 생각한다. 역사의 수레바퀴에서 처참하게 짓이겨진 사람들, 불꽃같이 타올랐다가 재가 된 사람들을.

"불화살처럼 살다갔다"는 말이 있다. 이 표현은 <아리랑>의 광고 문구에 나오는 표현이다. 이 표현을 보면서 왜 불꽃이 아니라 불화살이라고 했을까 생각했다. 아마 단어의 뉘앙스 때문에 불꽃 대신 불화살을 선택했을 거라고 생각했다.

책을 다 읽지도 못했지만 <아리랑>은 내게 많은 영향을 준 것 같다. 하지만 그렇다고 <아리랑>이 내 삶에서 인도서나 지침서 같은 역할을 한 것은 아니다(책 한 권이 인생에 그렇게 큰 영향을 주지는 않는다). 단지 어떤 막연한 동경이 날 사로잡았다. 확 태워버리는 불의 이미지가 많이 남은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아마 내게 책을 준 친구는 <아리랑>을 건네주면서 좀 더 용감하게 살기를 권했는지 모른다. 하지만, 그때 나는 조금 다른 생각을 했다. 인생에는 암시와 메타포가 풍부한 순간들과 물건들이 있고, <아리랑>을 얻은 여름 저녁과 <아리랑>사이에 낀 편지 한 장이 그때 그 장소의 그 물건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다.

하여튼 님 웨일즈와 김산의, 작가와 대상을 넘어선 교류는 내게 지금껏 여러 가지를 환기시켜줬다.

삶의 어느 모퉁이에서 만난 친구들과 한 권의 책, 한 장의 편지를 둘러싸고 내가 느꼈던 일들은 내 인생을 지금껏 고양시키고 있고, <아리랑>은 내 90년대에서 빼놓을 수 없는 사건이다.

지금도 내 책장 귀퉁이에는 먼지를 뽀얗게 뒤집어쓴 <아리랑>이 있다. 책장 정리한지가 오래된 만큼 먼지 두께도 상당하다. 세월이 그 한 권에 무척 많이 쌓였다. 내 기억의 90년대는 아주 빛났고, <아리랑>의 이야기는 앞으로도 어느 젊은이의 앞날을 비추는 등불이 될 것이다.

덧붙이는 글 | <당신의 책, 그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응모글


아리랑 (리커버 특별판) - 조선인 혁명가 김산의 불꽃 같은 삶

님 웨일즈.김산 지음, 송영인 옮김, 동녘(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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