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 여성신문
[홍미진 객원기자] 국립공원 오대산 기슭, 해발 400m 청정지역에서 방목한 닭과 오리에게 직접 개발한 발효사료를 먹이는 농원이 있다. 육질이 다르다고 소문이 자자해 1년에 키우는 1만 여 마리의 닭과 오리는 다 크기가 무섭게 팔린다. 게다가 축사에서 나오는 오물은 고스란히 채소밭의 퇴비로 활용되는데 이 순환 농장에서 재배한 무, 고추, 파프리카 등의 채소는 아삭아삭한 맛으로 입소문이 자자하다.

시골에 남아있던 농민들도 모두 도시로 떠나던 13년 전 귀농해 인터넷은커녕 TV도 잘 안 나오던 오대산에서 PC통신을 두드렸던 오지의 아줌마가 지금은 유기농산물 생산과 인터넷 배송의 선도자가 되었고 농민들에게 인터넷을 가르치며 농업 정보화에 앞장서고 있다. 13년이라는 시간을 땅과 씨름하다 결국 땅의 여자가 된 사람, 강원도 강릉 오대산 자락의 청지원(옛 송천농원) 송인숙 대표가 그 주인공이다.

공무원들 사이에서 '무서운 아줌마'로

13년 전 갓 귀농한 도시 출신 이방인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텃세와 편견은 대단했다. '오죽 못나서 시골로 농사나 지으러 낙향했겠느냐'는 시선이었다. 귀농 초기부터 농부가 아닌 이방인이라는 이유로 농민 대상 농기구 반값 공급에서 제외되었고 쓰러져가던 집을 고치고 사료 건조장·창고를 새로 지으려면 국립공원 안에 건물을 짓는 것은 불법 용도변경이라며 면 직원들이 시비 걸기 일쑤였다.

농업인 후계자 신청, 유기농산물 증명 서류 하나 받기가 어려웠고 그럴 때마다 관련 조항을 뒤지고 감사원·국민고충처리위원회에 민원을 제기하는 방식으로 농민들을 길들이려는 공무원들과 싸워나갔다.

싸움닭으로 변신하자 점점 공무원들 사이에서도 '무서운 아줌마'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이웃 주민들과도 점점 서로를 인정하고 소통하게 되었다. 가부장적인 농촌 분위기에서 자신을 억누르고 살아가는 다른 여성들의 삶도 엿보았다. 산 아래 할머니가 청지원의 밭 수확하는 날엔 자기 밭일 제쳐두고 올라오시기 시작했다. 주민들도 청지원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저 집은 매일 택배 차만 왔다 갔다 하는데 잘 먹고는 사나?"

순환적 친환경 육계기술로 차별화

송인숙 대표는 귀농한 뒤 도시에서의 삶보다 더 부지런하고 창의적으로 변했다며 웃었다. 운전도 귀농한 뒤 배웠다. 조리사 자격증을 땄고 방송통신대학을 다녔고 컴맹에서도 탈출했다. 96년부터 통신을 시작해 통신 대화방에서 컴퓨터를 배웠단다. 하이텔 안의 농민·낙농 동호회에 가입한 뒤에는 농사짓는 사람들을 만나 농법도 배웠다. 컴퓨터와 전화로 홈뱅킹을 갖추고 인터넷 직거래를 시작했고 드디어 2001년부터는 토종닭을 전자상거래 하는 독자 사이트(www.scfarm.pe.kr)도 만들었다.

인터넷은 성공의 계기였지만 성공의 이유는 아니었다. 질 좋은 상품이 있었기에 인터넷 판매가 쉬웠던 것뿐이다. 청지원의 닭들과 유기농산물은 특별한 영농기술이 아니라 농장 주인의 정성과 고집으로 자란다.

송인숙 대표는 식당에서 남은 음식물 찌꺼기를 가져다가 건조시켜 사료를 직접 만들었다. 음식물 쓰레기의 수분 함량을 줄인 뒤 막걸리 찌꺼기를 넣어 발효를 시키고 이 사료를 닭에게 공급한다. 버려지는 음식물 쓰레기를 이렇게 활용하면 아주 훌륭한 사료가 되어 이 사료를 먹인 닭들은 배설물조차 냄새가 없다. 닭 축사 옆엔 가까이 갈 수도 없는 다른 양계장과 다르다. 청지원의 축사는 야외 식탁 바로 옆에 있지만 냄새가 전혀 없다.

이렇게 건강하게 키운 닭은 근육이 살아있어 양계장 닭과는 육질부터 다르다. 잘 모르는 사람은 닭이 질기고 맛없다고 환불을 요구하는 경우도 있지만 사육 방법을 알고 육질의 이유와 맛을 알고 나면 태도가 180도 달라져 금방 단골로 변모한다.

눈물과 의지로 키워낸 아이들

오지에서의 농사와 일상에 가족은 훌륭하게 적응하고 있었지만 아이들이 커가자 교육에 대한 문제는 온 가족의 숙제가 되었다. 의무교육을 이행하는 것조차 어려움이 컸다. 큰 아들 태양이가 중학교 2학년이던 어느 겨울 오대산 일대에 70㎝의 폭설이 내렸다. 마을의 아이 하나와 태양이가 학교에서 돌아오지 않아 동네가 발칵 뒤집힌 일이 있었다. 전화를 걸어 수소문하니 시내버스 기사가 눈 때문에 갈 수가 없다며 아이들을 산자락에 내려놓고 돌아가 버렸다는 것이다.

정류장부터 집까지는 5㎞. 태양이는 함께 내린 아이에게 자기 코트까지 벗어 주고 집을 향해 걸었단다. 태양이는 결국 걷다 지쳐 산자락에 보이는 한 집으로 들어가 엄마에게 구조 전화를 보내고 쓰러졌다. 인숙씨는 얼어 죽지 않은 게 다행이라고 태양이를 끌어안고 울었다. 태양이가 고등학교에 진학할 즈음에는 아침에 시내로 가는 버스 노선이 폐지되었고, 아침 첫차를 타고 통학하는 시간이 하루에 5~6시간씩 걸리는 상황이었다.

"에디슨은 학교를 안 다니고 엄마한테 배웠으니 나도 엄마한테 배우겠다"는 태양이의 제안에 인숙씨는 "에디슨 엄마는 똑똑했지만 이 엄마는 가르칠 능력이 없다"고 답했지만 태양이의 의지가 고마워 웃었다. 그 어려운 환경에서도 공부를 잘한 태양이는 홍성의 풀무고등학교를 자원해 결국 유학길을 떠났다.

한 발 앞선 걸음, 미래 앞당겨

한 발 앞서 농가 정보화에 앞장선 덕에 농가의 새로운 모델로 주목받았지만 정작 본인은 "남들보다 겨우 한 걸음 앞선 것이 큰 차이로 보이는 것뿐"이라고 손을 내젓는다. 오히려 더 배워서 다른 농민들에게 컴퓨터나 유기농 기술을 가르쳐야겠다고 결심한다.

청지원의 성공은 경제적인 성공과는 거리가 멀다. 실제로 송인숙 대표 가족은 아직도 대출 받아 들어온 농지에 대한 이자를 갚기에 바쁘다. 하지만 송인숙 대표의 성공은 척박한 땅을 일궈 삶의 터전으로 삼은 뒤 농사의 가능성을 발견해 낸 한 인간의 성공이다. 그녀의 삶 자체가 귀농을 꿈꾸는 도시인들에게 보여준 하나의 기록이다.

"13년이 한 달 같았어요. 남은 한두 달도 열심히 살다 보면 그때는 땅이 주는 수확으로 살게 될까요?"

송인숙 대표 프로필

93년 귀농.
97년 한국농림수산정보센터 정보사냥대회 특별상/98년 2회 정보사냥대회 특별상, 컴퓨터정보화 영농수기 공모전 최우수상/강릉시장상 / 99년 음식물 사료와 유기농으로 환경보호 공로상 강원도지사상 / 99년 정보사냥대회 농림부장관 우수상
첨단농업기술연수센터 농업정보화반 강사
아피스 농업 주부모임 초대대표
2002년 한국여성농민회 강릉지회 대표
2004년 행정자치부 신지식인상 수상

후배 여성농업인에게
"네트워크로 소통 끈 든든한 버팀목 돼요"

통신이 시작되던 96년 농민동호회와 낙농동호회에 가입했다. 거제도에서 30년간 닭을 키워온 농부를 스승으로 모시고 메일로 닭의 상태를 보고하며 항상 조언을 들었고, 눈으로 하우스가 주저앉았을 때는 대관령의 농부에게 조언을 들었다.

오대산 오지의 삶이지만 주위엔 항상 농사꾼 친구들이 가득했다. 고립되어 있다는 고독과 무력하다는 자책은 농사꾼들에겐 치명적인 것이다. 네트워크를 구성하고 소통하면서 송인숙 대표는 비로소 자신이 농사꾼이라는 것에 더 큰 자부심을 느끼게 되었다.

송인숙 대표의 귀농 성공 4계명

1. 과정을 중시하라.

돈 벌기 위해 농사를 시작하거나 신속한 결과를 기대하는 귀농인은 농사를 지속할 수 없다. 과정에서 의미를 발견하고 결과를 기대할 수 없을 때조차 최선을 다할 것.

2. 재투자는 하되 생활은 검소하라.

도시적 문화를 동경해 분수에 안 맞는 문화를 즐기려는 태도를 경계할 것. 농사를 위한 투자는 과감하되 일상은 검소해야 한다.

3. 항상 새로운 것을 배우라.

인터넷 환경과 영농기술은 하루가 다르게 변하고 있다. 신기술을 통해 농업의 가능성을 남보다 먼저 발견하라.

4. 땅이 내게 정직하듯 정직하게 소비자에게 보여주라.

기후 변화로 인한 농사의 상태를 소비자에게 보고하고 품질이 떨어졌을 경우 이유도 상세히 알리라.


댓글

(주)여성신문은 1988년 국민주 모아 창간 한국 최초의 여성언론지.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