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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 박동진 판소리 전수관 앞에 세워진 충청출신 명창 비석 가운데 서있는 '고수관 비'.
공주 박동진 판소리 전수관 앞에 세워진 충청출신 명창 비석 가운데 서있는 '고수관 비'. ⓒ 안서순
가인(歌人)의 흔적은 고향에는 없고, 그렇다고 밖에 있지도 않았다. 조각조각 전설로 남아있던 가인에 대한 이야기도 이젠 세월의 흐름 속에 삭아 바람에 날려 허공 중에 흩어지고 있다.

명창 고수관(高壽寬·생몰미상)은 순조에서 철종 연간에 걸쳐 활동한 소리꾼으로 충남 서산시 고북면 초록리가 고향이다. 고수관은 그곳에서 꽃패집으로 불리던 초가삼간 옴팡집에 살면서 뒷산 골짜기에 있는 꽃샘에서 목을 축이며 소리연마를 해 마침내 득음을 했다고 전해진다.

고수관은 보통 소리꾼이 아니었다. 당시 동편제, 서편제와 함께 견주던 중고제(충청 경기지방에 근거를 둔 판소리 계파)의 명인으로 당대 8대 명창으로 꼽힐 만큼 뛰어난 재능을 가진 소리꾼이었다.

그런 고수관이었지만 나고 자란 고향에서 자신의 존재는 없다. 터럭만한 흔적도 남아있는 게 없다. 득음을 한 후 홀연히 고향을 떠난 고수관은 살아생전 다시는 고향땅을 밟지 않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당시 소리꾼은 광대로 불리며 권문세가나 부잣집에 불려가 재주를 팔아 살아가는 존재였기 때문에 당대 명창으로 불린 고수관도 여기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못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고수관은 언제 나서 죽었는지, 혼인은 했었는지, 자손이 있는지, 어디서 어떻게 살았는지 등의 생애에 대해 알려진 것이 하나도 없다. 그래서 고수관의 높은 예술혼을 기리려는 후세의 고향마을 사람들은 안타까워한다.

뜻있는 고향 사람들이 고수관의 높은 예술혼을 기리기 위해 지난해 '명창 고수관 선생 기념사업회'(위원장 김광조)를 결성한 데 이어 '고수관'을 찾기 위해 전국 각지를 돌아다니고 있다. 그들은 올해 들어 몇 차례나 고수관이 말년을 보냈다는 공주와 소리의 고장인 남원 등을 다녀왔으나 고수관의 행방은 여전히 묘연하다.

공주에 있는 고수관의 비는?

고향에도 없는 고수관의 비(碑)가 공주 박동진 판소리 전수관 앞에 세워져 있어 박동진과 어떤 관계가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의견도 있었다. 하지만 박 명창이 충청지역 출신 명창 4명과 자신에게 춘향가를 전수해 준 정정열(丁貞烈, 1876∼1938) 명창 등 5명을 기리는 뜻으로 세운 비중의 하나일 뿐이라는 게 관련자들의 설명이다.

박동진 판소리 전수관 관계자는 28일 "선생님은 고수관의 영향을 전혀 받지 않았고 그 비는 지역 선배 소리꾼을 기린다는 의미로 세워진 것일 뿐"이라고 밝혔다.

일설에는 고수관이 말년에 공주 어딘가에 살면서 후학들에게 소리를 전수했다고 하나 그곳이 어디인지 알 수도 없다.

지난 26일 기념사업회 회원 한명이 "서편제의 명인인 신재효의 고향에 있는 '고창 판소리 박물관'에 고수관의 흔적이 남아있는 것을 보았다"고 말한 것을 듣고, 그 곳을 찾았지만 고수관의 흔적은 없었다.

그들이 본 것은 박물관 측이 소리의 계파를 정리하면서 충청·경기지방에 유행하던 중고제의 명인으로 고수관을 분류해 기록해 놓은 것일 뿐 신재효나 고창지역과 어떤 인연이 닿아있는 것은 아니었다.

고수관은 어디에 있을까?

일세를 풍미한 '타고난 소리꾼이었다'는 고수관은 그 어디에 '흔적'을 남겼을까. 풍문으로 들리는 것을 찾아가면 실체 없는 바람만이 있을 뿐이다.

바람처럼 8도를 떠돌다가 죽어 돌아와 고향집 언저리에 마련됐던 무덤마저 풍우에 무너져 내리고, 아무도 돌보지 않아 억새와 소나무, 참나무가 자리를 잡아 어디쯤인지도 가늠하기 조차 힘들다.

춘추전국시대 오(吳)왕 부차의 애첩으로 중국 4대 미인의 꼽히는 서시가 이빨이 아파 얼굴을 찡그리자 그 모습도 아름답다며 장안의 여자들이 서시를 흉내 내고 다녔다고 한다.

그것처럼 고수관이 화류병에 걸려 코가 먹어 콧소리로 <춘향가> 중 '사랑가'를 부르자, 후세소리꾼들도 그 비음을 흉내 내어 불렀다는 일화가 전해질만큼 유명했던 그 중고제 명인의 흔적은 어디에서도 찾을 길이 없다.

명창 고수관 선생 기념사업회의 김광조 회장은 "고수관의 흔적을 찾기가 쉽지 않은 것만은 사실이지만 기필코 역사의 낙장에서 고수관을 찾아내 예술혼을 기리는 사업을 해 나가겠다"고 굳은 의지를 표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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