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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는잎구절초-구절초, 산구절초라고도 함.
가는잎구절초-구절초, 산구절초라고도 함. ⓒ 안준철
산길을 가다
문득 발을 멈추다

저걸 무어라 해야 하나
어둑한 산그늘 바위너설에
선연히 피어 있는

꽃이라기보다는
소박하고 깨끗하게 살라는
하나의 전언 같은

내 안에는 없는
저 순결무구한 흰 빛깔을
어찌 노래해야 하나

언제나
조금씩은 얼룩이 묻어 있는
빨아도 지워지지 않는
나는, 내 어둠으로는...

그리하여
산길을 가다 문득
발을 멈추다

숨을 멈추고
생명을 멈추다

-자작시, '산구절초 핀 길에서 눈을 감다'


가을 산에 다녀왔습니다. 산중턱에만 올라도 백두대간 지리산 주능선이 환히 바라다 보이는 함양 백운산, 그곳은 가을꽃들의 천국이었습니다. 구절초, 쑥부쟁이, 기름나물, 고마리, 가시역귀, 노랑물봉선, 참취, 마타리 등등. 그 중에서도 눈처럼 흰 산구절초가 압권이었지요. 어둑한 산그늘 바위너설에 피었어도 잎잎이 어찌나 희고 깨끗하던지 마치 손으로 만지면 하얀 물감이 묻어날 것만 같았지요.

가는잎구절초
가는잎구절초 ⓒ 안준철
그 희고 순결한 존재 앞에서 저는 마냥 행복하지만은 않았습니다. 오히려 잠시 고통을 느껴야 했지요. 아주 잠깐이긴 하지만 생명이 끓기는 고통이었지요. 그렇게 죽었다가 다시 깨어난들 별 소용이 없는 줄 알지만 하루분의 죄라도 덜어내고 싶었을까요? 학교에서 만나는 아이들에게 알게 모르게 저지른 죄를 씻어내고 싶었을까요?

인간이 인간을 감화시킨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지만 교사는 그런 꿈을 버리지 말아야 합니다. 나의, 나에 의한, 나를 위한 자기중심의 굴레에서 벗어나야 가능한 일이지요. 가끔은 생명의 아픔을 느끼면서 말입니다. 한적한 산길에 피어 있는 작은 꽃나무들만큼만 예쁘고 소박하게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제가 먼저, 그리고 아이들도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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ㄹ교사이자 시인으로 제자들의 생일때마다 써준 시들을 모아 첫 시집 '너의 이름을 부르는 것 만으로'를 출간하면서 작품활동 시작. 이후 '다시 졸고 있는 아이들에게' '세상 조촐한 것들이' '별에 쏘이다'를 펴냈고 교육에세이 '넌 아름다워, 누가 뭐라 말하든', '오늘 교단을 밟을 당신에게' '아들과 함께 하는 인생' 등을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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