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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은 독서의 계절이라지만 책만 붙들고 앉아 있기엔 뭔지 모르게 감질나는 계절이다. 살랑거리는 바람과 따사로운 가을 햇살이 계절의 진국이다. 그런 이유로 가을의 유혹에 넘어가 책장을 덮는다 하여 누가 감히 의식의 나약함이라 탓할 수 있을까. 지난 토요일. 이른 점심을 먹고 서둘러 집을 나서 문수산으로 향했다.

경기도 김포시 월곶면 포내리에 위치한 문수산은 집을 나서 차로 20여분이면 족히 도착할 수 있다. 집 가까이에 이렇듯 가까이 산을 두고 사는 것도 복이라면 복일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주 오르지 못한다.

이 핑계 저 핑계 다 갖다대어 봤자 결국은 게으름이 가장 큰 핑계거리인 것 같다. 지난 봄. 문수산에 오르면서 적어도 한 달에 한 번은 오자고 남편과 약속하였건만 한 계절을 훌쩍 넘기고 나서야 다시 찾았으니 인생이 이리 게을러서 뭣에 쓰나 싶다.

해발 376m의 문수산. 높지도 그렇다고 아주 낮은 야산도 아니다. 하여 느긋함을 느끼게 한다. 부지런히 발걸음을 옮길 필요가 없다. 느릿느릿한 걸음으로 나무 한 그루 한 그루와 다 눈맞춤을 하며 산을 올라도 한나절이면 족한 거리이다.

운동화 끈을 다시 잘 동여매고 문수산 정상을 향해 발을 내딛었다. 첫발을 내딛자마자 산림욕장이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곧게 뻗어 올라간 거대한 나무들이 숲을 만든 곳. 그것들이 뿜어내는 냄새가 구수하다. 숲은 그 구수함을 또 다시 되새김질하고 있다.

숲이 나무들의 구수한 냄새를 되새김질해 다시 뿜어내고 있는 향기는 피톤치드(테르펜, 정유물질)라고 하는데 이를 들여 마시거나 피부에 닿게 하는 것이 바로 자연건강법인 산림욕이다. 문수산 산림욕의 효과는 몸과 마음이 맑아져 안정감을 갖게 되며 거담, 강장 및 통변에 효과가 크고 심폐기능도 강화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 숲에서 발산되는 정유물질은 심장들의 순환기 계통에 작용해 혈압을 강화시키기도 하며 중추신경을 자극해 진정작용을 하기도 한다.

정서순화와 심신단련, 피로회복 등 산림욕의 효과는 대단하다. 그러나 굳이 이렇게 의학적으로 풀어 놓지 않더라도 산에 오르는데 나쁠 게 또 뭐가 있겠는가.

나무 냄새, 풀 냄새, 간지러운 바람, 나무 사이로 쏟아져 내리는 햇살, 그와 더불어 오장육부가 다 뚫리는 듯한 상쾌한 공기 등등. 구구절절 늘어놓을 것 없이 모든 것이 다 보약이다. 가을이라 하여 말만 살찌는 게 아니라 이렇듯 자연 속에 묻혀들면 사람도 순식간에 뚱보가 될 것 같다.

느린 걸음으로 여유로이 산을 오르는데도 이마며 등에 땀이 맺힌다. 그러나 굳이 땀을 닦을 필요가 없다. 잠시 숨을 돌리며 서 있는 사이. 큰 나무 사이를 지나는 가을바람이 땀을 다 말려 버린다. 땀 마르는 소리가 사그락 사그락 가을바람 속으로 섞여 든다. 상쾌하다는 표현이 이런 건가 싶다. 어느새 서늘해지는 느낌에 다시 발걸음을 옮긴다.

정상이 가까워져서일까. 경사가 제법 가파르다. 종아리도 제법 묵지근해지고 목구멍까지 숨이 차오른다. 이만큼의 높이에도 숨을 헉헉거리며 올라가는 내가 남편은 우스운가 보다. 앞에서 손을 잡아끌어 주기도 하고 뒤에서 밀어 주기도 하던 남편이 무슨 생각에서인지 빠른 걸음으로 재빠르게 앞서간다. 잠깐 사이 남편이 보이지 않는다.

"아이스께끼! 아이스께끼!"

분명 남편의 목소리다. 그런데 이 산 속에 아이스께끼가 있을 리 만무하건만 남편은 무엇이 그리 좋은지 목청껏 아이스께끼를 외치고 있다. 저만큼 팔각정의 한 귀퉁이가 보이고 그곳에 걸터앉은 남편도 보인다. 힘겹게 오르는 나를 남편은 짓궂게 내려다보며 싱글거리고 있다.

▲ 문수산 팔각정에서 내려다 본 산 아래 세상. 한폭의 수채화이다.
ⓒ 김정혜
▲ 팔각정 아래로 그림같은 풍경이 펼쳐져 있다.
ⓒ 김정혜
드디어 팔각정에 올랐다. 순간. 한눈에 드러나는 산 아래의 세상.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꽁꽁 닫혀 있던 가슴이 순간적으로 활짝 열리는 듯한 느낌이다. 바야흐로 가을이다. 바둑판같은 들녘은 황금빛으로 변해가고 있고, 그 황금빛이 바람에 날리고 있다. 강화와 김포를 가로지르는 염하강은 가을빛에 취한 듯 무심하고, 그 무심함 위로 길게 이어진 강화대교 위로 장난감 같은 차들이 질주하고 있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한 폭의 아름다운 수채화이다.

▲ 문수산 팔각정의 무인판매대. 놀랍기도 하고 재미있기도 하고.
ⓒ 김정혜
▲ 등산객이 천원을 내고 아이스께끼를 고르고 있다.
ⓒ 김정혜
"여보. 여기 좀 와봐. 여기 아이스께끼가 있어."
"어머나. 세상에!"


남편의 손끝이 가리키는 그곳. 놀랍기도 하고 재미있기도 한 그 광경이라니... 그곳엔 누런 테이프로 칠갑을 한 작은 박스가 놓여 있었다. 그 박스 앞엔 누렇고 두꺼운 종이 하나가 놓여져 있고 그곳엔 재미있는 글귀가 적혀 있었다.

'무인판매. 아이스케키. \1000. 봉지는 두고 가세요. 산에 버리시면 자연이 아파요.'

말 그대로 아이스께끼 무인판매대였다. 놀라운 마음에 박스를 열어 보았다. 한쪽엔 1000원자리 지폐가 몇 장 놓여 있었고 한쪽엔 꽁꽁 얼린 아이스께끼가 들어 있었다. 또 그 옆으로 파란비닐봉지가 놓여 있었는데 봉지 안에는 아이스께끼 봉지뿐만 아니라 이런저런 쓰레기도 함께 들어 있었다.

누군지 몰라도 참 재미있는 발상의 소유자란 생각과 함께 어쩌면 이 무인판매대의 주인은 아기처럼 순수한 사람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무인판매라니, 그것도 요즘 같은 시대에...

돈이라면 부모자식간에도 서로 속고 속이는 건 다반사이며, 일확천금에 눈이 어두워 온 세상이 바다 속으로 침몰해버렸고, 나라 돈이건 회사 돈이건 그저 내 돈인 양 꿀꺽 꿀꺽 삼켜버리는 양심부재의 이 시대에 이런 산속에서 만난 무인판매대는 참으로 많은 걸 생각하게 했다.

▲ 문수산 등성이로 길게 뻗어 있는 문수산성 성곽
ⓒ 김정혜
절대적인 믿음. 그것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그런 사람이기에 자연의 아픔까지도 생각했을 것이다. 아이스께끼 통을 힘들게 짊어지고 올라왔을 그를 생각해 본다. 절대적인 믿음으로 한 장 두 장 지폐를 세며 이 세상의 정직을 확신할 그를 생각해본다. 그는 매일매일 이 세상의 정직을 확신하고 있을까 잠깐 의문이 인다.

천원을 내고 아이스께끼를 하나 입에 물어본다. 시원하고 달콤하다. 무인판매대의 주인이 누군가는 알 수 없지만 그가 매일매일 확신할 정직에 나도 한몫 하는 것 같아 괜히 뿌듯해진다.

▲ 아저씨들이 무인판매대의 아이스께끼를 시원하게 드시고 계신다.
ⓒ 김정혜
▲ 문수산 정상을 가까이 남겨두고 다시 무인판매대를 만났다.
ⓒ 김정혜
정상을 향한 발걸음이 이상하리만치 가볍다. 정상을 조금 못 미처 또 다시 무인판매대를 만났다. 그곳에 있는 건 제법 큰 박스였다. 돈 통을 들여다 보았더니 제법 많은 돈이 들어 있었다. 산을 내려오던 아저씨 두 분이 능숙하게 돈을 내고 아이스께끼를 드신다.

또 다른 사람은 만 원짜리를 내고 잔돈을 세더니 옆 사람에게 확인까지 해 달라 한다. 돈을 내미는 사람이나 확인해주는 사람이나 뭐가 그리 재미있는지 서로들 바라보며 웃느라 정신이 없다. 그들의 환한 웃음이 따사로운 가을볕을 닮은 듯하다.

▲ 강 건너로 북녘땅이 보인다. 북녘에도 누런 황금빛으로 가을이 익어가고 있다.
ⓒ 김정혜
▲ 강화도와 김포를 가로 지르고 있는 염하강. 그 위에 띄워진 배가 마치 그림 같다.
ⓒ 김정혜
해발 376m. 드디어 문수산 정상에 올랐다. 정상에서 내려다본 산 아래 세상은 지금껏 내가 경험해 보지 못했던 세상이었다. 밝고 환하고 또한 행복해 보이는 세상. 바라건대 문수산 무인판매대의 아이스께기가 이 세상 모든 불신을 달콤하고 시원하게 녹여 주었으면 싶다. 그리하여 앞으로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도 달콤하고 시원했으면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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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기자회원이 되고 싶은가? ..내 나이 마흔하고도 둘. 이젠 세상밖으로 나가고 싶어진다. 하루종일 뱅뱅거리는 나의 집밖의 세상엔 어떤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지. 곱게 접어 감추어 두었던 나의 날개를 꺼집어 내어 나의 겨드랑이에 다시금 달아야겠다. 그리고 세상을 향해 훨훨 날아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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