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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성란의 네 번째 단편집 <웨하스>
하성란의 네 번째 단편집 <웨하스> ⓒ 문학동네
작가는 67년생이다. 그렇다면 유년기에서 청소년기를 70년대부터 80년대 초중반까지 보낸 셈이다. (작가의 이런 이력이 소설과 직접적인 상관이야 없겠지만 하성란의 소설은 어떤 '기억'을 다루고 있으므로 작가가 보거나 겪으며 자란 것도 알게 모르게 소설 속에서 작용하고 있으리라)

적어도 70년대까지만 해도 (어떤 측면에서는 여전히 계속되는 문제로 볼 수도 있겠지만) 우리 일반의 사는 모습은 이 소설집 <웨하스>의 표제작 '웨하스로 만든 집'의 서두처럼 "언덕 위에 간신히 얹혀 (세상 위에 겨우겨우)" 사는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부실'은 그때부터 진행되어 어김없이 곪고 곪아서는 종당은 '성수대교'의 붕괴를 가져왔고 삼풍백화점의 참사를 가져왔다. 정치와 사회, 경제적으로 부실한 상황에서 우리의 몸도 마음도 부실하였다.

하성란의 단편 '웨하스로 만든 집'을 읽으면서 '웨하스'에 '베니어합판'의 이미지가 중첩되었다. 둘 다 겉보기야 그럴싸하지만 실제로 약간의 외부적인 힘에도 쉽게 부서지는 사물들이라는 점에서 공통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웨하스로 만든 집'은 언제고 힘없이 무너져내릴 수 있는 그런 위태위태한 집은 아닐까?

여자는 10년 만의 귀향이다. 그리고 그 여자는 이혼녀이다. 그간의 결혼생활에 대해서 여자는 이러니저러니 말하지는 않는다. "H와 여자 사이에는 그런 것이 없었다"(책 64쪽), "십년간 머물렀던 그곳이 휴가차 다녀오는 관광지처럼 느껴졌다"(64∼65쪽) 이런 식으로 끝내 버린다.

말하자면 여자에게 H는 이렇다할 기억의 존재가 되지는 못하는 듯싶다. 실제로 10년간의 결혼생활을 두 장의 편지지에 적어 그녀의 어머니에게 항공 우편으로 띄웠음에도 여자는 자신이 쓴 그 내용들을 기억해내지 못한다.

"순간 H의 얼굴이 떠올랐지만 곧 사라졌다"(84쪽)고 오히려 잘라 말한다. 정확히 말하자면 굳이 떠올리고 싶지 않은 것이리라.

소설 속에서 세 개의 집착 유형을 만날 수 있다. 이는 어찌 보면 세파에 시달리다 병적 대응이 되어버린 왜곡된 출구이자 한계가 있는 도피처일 것이다. 어머니는 이것저것 사다리며, 신발하며, 시계하며, 고물을 주워 들인다.

한편 여자의 기억 속에 할아버지는 그렇게 또 '우산'을 들여놓았다. 그리고 여자는 H의 말을 빌려 자신이 사랑에 집착하였음을 암시한다.

"아버지의 죽음 이후 집은 급속도로 낡아 갔다"(70쪽)고 말한다. 아버지의 죽음은 부재를 보여준다. 결국 집이 쓰러져간다는 것은 사람이 쓰러져간다는 것과 다르지 않다. 사람의 부재는 사랑의 부재이며, 사랑의 부재는 생기의 부재이다.

'부실'은 '불안'을 가져온다. 이 집 자매들도 아버지의 마루 사건(널빤지가 주저앉아 그 사이로 아버지의 다리가 이층마루를 뚫고 나온 사건) 이후로는 "첨족증(尖足症)에 걸린 사람처럼 발뒤꿈치를 들고" 걷게 되고, 그것은 자신도 모르게 만성화된다.

여자가 H와 이혼한 것도 어쩌면 이런 원인(불안)에 따른 것인지도 모른다. H는 여자를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감싸주지도 못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완전히 다른 삶의 배경을 이루기 때문이다. H의 집은 '웨하스로 만든 집'이 아니라 "튼튼한 목조가옥으로 지은 집과 가게"(81쪽)이기 때문이다.

"H는 발뒤꿈치를 들고 걷는 여자의 걸음걸이라면 질색을 했다. 인기척 없이 몰래 다가와 사람 등 뒤에 유령처럼 서서 사람을 놀래킨다고 했다. 혼자 있을 때도 혹시 뒤에 와 있는 것이 아닐까 몇 번이나 뒤돌아본다고 했다. (중략) 그런데도 발뒤꿈치를 들고 걷는 습관은 고쳐지지 않았다. 그렇게 살얼음 밟듯 조심해서 걸었는데도 결혼생활은 고작 십 년밖에 이어지지 않았다." (81∼82쪽)

여자에게 S라는 새로운 사랑이 찾아오기는 하지만, S는 S의 전처와 여전히 사물과 기억을 공유하고 있는 부분이 있다. (S의 전처는 S와 여전히 사물과 기억을 통하여 소통하는 부분이 있지만 여자와 H는 그런 소통 공간이 아예 부재한다. 즉 여자에게는 기억도 없고 사람도 없고 사랑도 없다.) 이를 감지한 여자는 다 쓰러져가는 집으로 돌아와 결국 무너지는 집채에 깔려 "무너진 잔해더미에서 보았던 금발머리 인형"처럼 명멸해간다.

이층 마루 또한 일층 마루처럼 무늿결이 다른 베니어합판 조각을 배열해 멋을 냈다. (중략) 마저 다른 발을 떼어 마루 중앙으로 들어서려는데 어머니의 발밑에서 마룻장이 뒤틀렸다. 바싹 마른 마룻장이 바삭, 잘 구운 과자 소리를 냈다. 어머니가 살얼음판을 딛듯 조심스럽게 발을 뗐다. (중략) 둘째가 자신만만하게 소리쳤다. "과자로 만든 집이야. 마루는 음, 웨하스로 만들었어. 이건 웨하스 씹을 때 나는 소리야." 자매들이 발끝을 들면서 이구동성으로 외쳤다. 그러니 조심해! (87쪽)

'부실'은 어디에서 시작된 것일까? 가정 내에서 비롯한 것이 아니라 가정 밖에서 가정 내로 파고든 것이다. 그것은 조금씩 조금씩 파고들어 기어이는 집을 무너뜨렸다. 아버지의 발이 천장 아래로 빠지고 여자의 몸이 집채에 깔려버렸다.

그렇다면 애초 문제의 발단은 이런 집을 부실하게 만든 사람이요, 이런 부실을 감추고 속인 사람들일 것이다. 그런 사회와 사회 구조일 것이다.

똑같은 구조의 집 모양도 동네의 미관이 주는 통일감과 주민들의 결집력 도모를 위해서라기보다는 건축 설계비와 제비용을 절약하기 위해서였다는 것이 드러났다. 그 사내는 모래에 섞을 시멘트 양을 줄이고 시멘트를 빼돌렸다. 건축 허가를 받을 때는 시공 구청에 뇌물을 상납했다는 소문도 떠돌았다. 사내는 동네 남자들을 잘도 피해다녔다. (중략) 하지만 동네 남자들은 그들이 상대해야 하는 사람이 사내 하나뿐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71∼72쪽)

소설이 말하는 '부재'는 '부실'이 앗아간 '사람'과 '사랑'일 것이다. 꼭 있어야 할 '삶'일 것이다. 여자가 '사랑'에 집착하는 원인도 다름 아닌 여기에 있을 것이다. 어머니가 '고물'에 집착하는 것은 아버지의 부재에서 비롯한 가난과 생활고에 그 원인이 있을 것이고, 할아버지 역시 사람의 부재에 기인하는 것이리라.

덧붙이는 글 | * 지은이: 하성란 / 펴낸날: 2006년 8월 31일 / 펴낸곳: 문학동네 / 책값: 9500원


웨하스

하성란 지음, 문학동네(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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