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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1 테러 현장인 '그라운드 제로'를 찾은 사람들. 사진은 지난 6월 뉴욕.
9·11 테러 현장인 '그라운드 제로'를 찾은 사람들. 사진은 지난 6월 뉴욕. ⓒ 한나영
남편의 사진이 든 액자를 들고 눈물 짓는 부인. (NBC-TV <투데이> 화면 촬영)
남편의 사진이 든 액자를 들고 눈물 짓는 부인. (NBC-TV <투데이> 화면 촬영) ⓒ 한나영

"마이클 E. 매튜, 존 캐빈 맥카시, 대니엘 R. 로엘, 제임스 매튜 패트릭, 죠셉 P. 맥도날드…."

끝없이 이어지는 이름, 이름들. 남편의 얼굴이 박힌 티셔츠를 입은 한 부인이 흐느끼며 절규한다.

"사랑하는 당신, 당신을 영원히 못 잊을 거예요. 아직도 당신은 내 마음속에 그대로 있어요."

오늘은 '9·11 테러'가 발생한 지 5주년이 되는 날이다. 미국의 신문과 방송은 5년 전 그 날의 끔찍했던 사건을 일제히 특집으로 다루며, 당시의 화면과 목격자 증언 등을 계속 내보냈다.

14살 소년의 어두운 얼굴

미국 NBC <투데이> 쇼를 진행하는 앵커들. 짙은 색 정장을 입었다. NBC-TV <투데이> 화면 촬영.
미국 NBC <투데이> 쇼를 진행하는 앵커들. 짙은 색 정장을 입었다. NBC-TV <투데이> 화면 촬영. ⓒ 한나영
방송을 진행하는 앵커들도 이날 짙은색 정장을 입고 9·11 테러 현장인 '그라운드 제로'에서 5주년을 추모했다.

이들은 희생자 가족들을 인터뷰하며 이들의 삶이 어떠했는지를 조명했는데, 특히 눈길을 끈 사람이 있었다. 바로 9·11 테러 당시 9살이었던 마이클이라는 소년.

마이클은 이제 14살이다. 그는 5년 전, 사건이 발생했을 당시 엄마와 함께 WTC(월드 트레이드센터)를 찾았다가 끔찍한 일을 당했다.

69층에 있다가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졌지만, 그 후 불면증에 시달리기도 하고 식사도 잘 못하고 몸과 마음이 정상이 아닌 상태로 사건 후유증을 크게 겪었다고 한다.

9·11 테러 이후 5년 만에 처음으로 현장을 찾았다는 마이클의 얼굴은 14살 소년의 발랄함 대신 산전수전을 다 겪은 듯한 어두운 얼굴이었다. 하긴 어린 소년이 수백명, 아니 수천명의 죽음을 가까이에서 보고, 그들의 신음과 고통을 직접 목격하는 끔찍한 일을 당했는데 어찌 정상일 수 있겠는가.

그를 인터뷰하는 NBC <투데이> 쇼의 여성 앵커인 앤의 얼굴에도 어린 나이에 험한 일을 당한 마이클에 대한 연민의 빛이 역력했다. 마이클은 앤과 인터뷰에서 자신이 겪었던 어려운 시간을 담담하게 털어놓았다.

그가 겪은 끔찍한 이야기를 듣다 보니 11년 전에 우리가 겪었던 삼풍백화점 붕괴 사건의 희생자들 얼굴이 떠올랐다. 그들 역시 목숨은 건졌지만 남모르는 어려움이 많았다고 하지 않던가.

"당신이 그리워요, 당신을 사랑해요"

9·11 희생자들과 사랑하는 남편의 이름을 부르는 부인들.
9·11 희생자들과 사랑하는 남편의 이름을 부르는 부인들. ⓒ CNN 캡쳐
'추모의 연못'에 꽃을 던지며 희생자들을 추억하다.(NBC-TV <투데이> 화면 촬영)
'추모의 연못'에 꽃을 던지며 희생자들을 추억하다.(NBC-TV <투데이> 화면 촬영) ⓒ 한나영
이날 '9·11' 테러 5주년 기념식이 거행되는 동안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희생자들의 이름을 하나씩 부르는 눈물겨운 의식이었다.

대표로 참석한 200여 명의 희생자 가족들은 단 앞으로 걸어나와 다른 희생자들의 이름을 또박또박 불러주었다. 그들을 결코 잊지 않았다는 뜻이었을 것이다. 그런 다음 자신과 인연이 있었던 소중한 사람(남편·자식·연인·친구 등)의 이름을 마지막으로 불러주었다.

애절하고 비통한 사연이 있는 희생자 가족 중 특히 남편을 잃은 부인들이 많았다. 이들은 사랑하는 남편을 추모하며 '남편'이라는 보통명사 앞에 다양한 수식어를 붙였다.

이 수식어는 미국에서는 아주 흔하게 쓰는 표현이지만 눈물의 추모 현장에서 이 말을 들으니 새삼 가슴이 찡해왔다.

'사랑하는(dear, loving, beloved) 남편 OOO', '잊을 수 없는(unforgettable) 남편 OOO', '소중한(precious), 최고의(best), 놀랍고 믿을 수 없을 만큼 훌륭한(amazing, incredible) 남편 OOO'.

그리고 이어지는 사랑 고백. "우리는 당신이 필요해요. 당신이 그리워요. 당신을 사랑해요. 당신이 자랑스러워요."

이날 추모식에서 마이클 블룸버그 뉴욕시장이 한 말이 바로 이들 희생자 가족들의 애끓는 마음을 잘 대변해 주었으리라.

"누가 알겠습니까. 당신들 마음속에 무엇이 있는지…."

아무도 알 수 없는 그들만의 눈물과 한숨, 그리고 그리움. 이런 피끓는 고통을 혼자서 외롭게 삭혀온 희생자 가족들을 보며 나는 그만 눈시울이 뜨거워지고 말았다.

나 역시 그들처럼 가족을 떠나보낸 동병상련의 아픔이 있어서였을 것이다. 아! 눈물과 한숨, 고통이 없는 그런 세상에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라운드 제로'를 찾은 관광객들이 현장을 내다 보고 있다. 2010년엔 이렇게 바뀌어요.
'그라운드 제로'를 찾은 관광객들이 현장을 내다 보고 있다. 2010년엔 이렇게 바뀌어요. ⓒ 한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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