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 우먼타임스
[주 진 기자] ‘탁구의 여왕’ 현정화, ‘아시아의 인어’ 최윤희, ‘아시아의 마녀’ 백옥자, ‘달려라 하니’ 임춘애, ‘아시아 최고의 센터’ 박찬숙….

이름만 들어도 우리의 가슴이 뜨거워진다. 1988년 서울올림픽 탁구 여자복식 결승전. 환상의 복식조로 불리던 양영자-현정화 선수가 중국의 자오즈민-천진 조를 꺾고 금메달을 땄다. 오뚝한 콧날, 앳된 얼굴로 ‘피노키오’란 별명으로 불리던 현정화 선수는 오래도록 국민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라면만 먹고 살았어요. 우유가 먹고 싶어요."

1986년 아시안게임 당시 빼빼 마른 체격의 앳된 여고생 육상 선수, 임춘애의 눈물은 우리의 마음을 짠하게 했다. 그때의 가슴 벅찬 감격을 우리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그날의 주역, 그날의 여성 선수들은 지금은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탁구계의 대모' 이에리사는 태릉선수촌 수장이 되었고, 현정화는 도하 아시안게임 여자탁구 대표팀 감독, 박찬숙은 국가대표 여자농구 감독으로 지도자의 길을 가고 있다. 경기장 밖에서 후배들의 든든한 언니로, 우리나라 체육계를 이끄는 기둥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하지만 이들처럼 지도자의 길로 들어서기란 쉽지 않다. 대다수 은퇴하는 여성 선수들에겐 지도자의 길은 머나먼 꿈이기 때문이다. 전체 선수 가운데 여성 선수가 40%에 이르지만, 지도자는 5.5%밖에 되지 않는다는 통계가 보여주는 것처럼 우리나라 체육계에 여성 지도자 가뭄 현상은 여전하다. 여성 관련 종목에서조차 대부분 남성들이 행정임원은 물론 감독, 코치와 같은 지도자 역할을 맡고 있다.

이 같은 현상은 많은 여성들이 임신, 육아 문제 때문에 일을 포기하거나, 경력 단절을 경험하고 있듯이, 여성 선수들 역시 결혼과 함께 운동을 포기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임춘애 선수는 은퇴 후 육상과는 관련 없는 일을 하며 평범한 주부로 살아가고 있다. 우리나라 여자농구 최고의 가드였던 전주원 선수(신한은행)도 임신 때문에 한때 코트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 지난 2004년, 25년 선수 생활을 접으며 그는 "시원섭섭하다"는 말을 했다.

그의 말속엔 아쉬움과 속상한 마음이 고스란히 배어 있다. 아시아 최고의 가드로 이름을 날렸던 그는 이제 후배들의 플레잉 코치로 구슬땀을 흘리고 있다. 그런 그에겐 마지막 꿈이 하나 있다고 한다. 바로 여자농구 최고의 감독이 되는 것.

그의 도전이 우리나라 스포츠계를 이끌어나갈 여성 선수들에게 장밋빛 희망이 되고 있다. 그의 꿈이 꼭 이루어지길 소망한다.

제2전성기 ‘그명성 그대로’

ⓒ 우먼타임스
“왕년의 인기, 안 부러워요.”

경기장을 누비던 스타에서 후진을 양성하는 지도자로 변신한 체육계 여성 리더들이 우리나라 스포츠 역사를 다시 써나가고 있다. 화려했던 현역 시절 못지 않게 지도자로서도 눈부신 기량을 뽐내며 후배들이 각종 국내·국제대회에서 눈부신 성적을 거두는 데 밑거름이 되고 있는 것이다.

정미라, 박찬숙, 김영주, 전주원 등 쟁쟁한 스타군단이 든든히 버티고 있는 농구계. 정미라 감독은 2004년, 2년간의 삼성생명 코치 생활을 마무리하고 미국 시애틀에서 농구연수를 하고 돌아온 해외 유학파다. 그는 MBC, SBS 방송 농구 해설위원 등으로 경험과 전문성을 쌓아왔다. 박찬숙 대한체육회 부회장과는 숭의여고 선후배 사이로 지난 7월 존스컵 때는 여자농구 대표팀 감독과 코치로 환상의 콤비를 보여줬다.

'여자농구의 전설' 박찬숙은 지난 해 8월, 여자농구 대표팀 사상 첫 여성감독이 되면서 "평생 꿈꾼 자리인 만큼 자신 있다"며 소감을 밝히기도 했다. 아시아의 최고 센터로 이름을 날리던 그는 1975년 태극마크를 처음 달았다. 1979년 세계농구선수권대회 준우승에 이어 1984년 LA올림픽 은메달의 주역으로 자리매김했다. 은퇴 후 대한농구협회 이사, 대한체육회 부회장을 지내는 등 농구 행정가 겸 지도자의 길로 들어섰다.

'무서운 아줌마'로 통하는 전주원 신한은행 플레잉 코치. 세 살배기 딸을 두고 있는 전 코치는 후배들의 지옥훈련을 진두지휘하며 강철 체력을 과시하고 있다. 그는 2004년 은퇴했다가 복귀해 지난해 여름리그에서 신한은행을 우승으로 이끈 공로로 MVP에 선정되기도 했다.

그런 만큼 전 코치는 후배들에게도 존경받는 선배다. 2m 장신 센터인 하은주는 "전주원 선배의 플레이에 매력을 느껴 신한은행을 택했다"고 했을 정도다. 이영주 신한은행 감독은 "전 코치는 자기관리를 확실히 한다. 후배들의 귀감"이라고 말한다.

이 밖에도 9월 브라질에서 열리는 세계여자농구선수권대회 대표팀 코치에 이옥자 전 일본여자농구 샹송화장품 감독과 김영주 우리은행 코치가 선임돼 환상의 콤비를 뽐내고 있다.

1973년 사라예보 세계선수권대회의 주역인 이에리사를 비롯해 박신자, 양영자, 정현숙, 현정화로 이어지는 여자탁구 군단. 이에리사는 지난해 여성 최초 태릉선수촌장에 취임, 행정가로 성공가도를 달리고 있다. 또 한 명의 사라예보의 주역, 정현숙 감독은 단양군청 여자탁구단을 이끌며 지역 생활체육 활성화에 기여하고 있다.

현정화 여자탁구 국가대표팀 감독은 녹색 테이블에 새바람을 몰고 오며 여자탁구의 제2 전성기를 꽃피우고 있다. 이번 도하 아시안게임에서도 사령탑을 맡았다. 젊은 지도자이지만 현 코치는 선수를 보는 눈이 예리하고 가능성 있는 선수를 키우는 재주가 뛰어나다는 평가를 듣고 있다.

현정화는 고등학교 1학년이던 1985년 국가대표로 발탁돼 86아시안게임 단체 우승, 88서울올림픽 여자복식 금메달을 목에 걸었고, 1989년 세계선수권대회 혼합복식 우승, 1991년 지바 세계선수권대회 코리아 단일팀 단체 우승, 1993년 세계선수권대회 단식 우승을 차지했다. 1993년 현역에서 은퇴한 지 6년만에 소속팀인 한국마사회의 코치가 됐다.

이외 배구에선 이도희 흥국생명 코치, 축구에선 여자축구계의 최초 여성 코치 이미애, 한국 최초 여성 국제심판 임은주씨 등이 여성 체육인의 롤모델로 인정받고 있다.

정미라 전 농구대표팀 감독, 여성감독 롤모델 만들자

국내 프로농구 코트는 여성 감독을 꿈꾸는 선수들에게 여전히 성역이다. 단 한 명의 정규 여자 감독도 배출되지 않았을 만큼 높은 성차별 장벽이 스포츠 지도자를 꿈꾸는 차세대 여성들을 가로막고 있다. ‘경력이 부족하다’‘코치 경험이 없다’‘검증되지 않았다’는 등의 이유로 농구 코트 진입이 견제되고 있는 것.

하지만 이 같은 불모지에서 꿋꿋하게 차세대 여성 지도자 양성에 매진하는 위풍당당한 여전사가 있다. 1980년대 올림픽 국가대표 선수와 삼성생명 비추미 코치를 거쳐 존스컵 국제대회 대표팀 감독을 맡았던 정미라 감독(50)이 바로 그 주인공. 정 감독은 현재 SBS, MBC 농구 해설위원으로 활동하며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다.

2004년, 2년간의 삼성생명 코치 생활을 마무리하고 미국 시애틀에서 농구지도자 연수를 받은 후 국내에서 방송 해설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는 정미라 감독은 “각 팀마다 한 명이라도 여성 코칭스태프를 포함시켜야 한다”고 힘주어 강조한다. 여성 후배들이 더 큰 꿈을 향해 뛸 수 있는 환경이 마련되지 않고서는 20~30년 뒤에도 여성 프로농구 코트의 환경은 그대로일 게 뻔하기 때문이다.

여성감독·코치 1명도 없어

“외국에 나가 보면 여자 코칭스태프들이 참 많아요. 그런데 우린 어떤가요? 코치는 물론이고 여성 프로 감독 한 명 없죠. 감독의 꿈을 키우고 있는 어린 선수들에게 닮고 싶은 역할모델을 만들어 주는 투자가 필요해요. 계속 길을 열어 주는 시도가 이뤄져야 해요.”

프로 감독을 향한 여성 농구인들의 도전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선수 출신인 정미라, 유영주씨 등이 한때 코치로 선임돼 최초의 프로농구 여성 감독 탄생이 기대를 모은 적도 있었다. 그러나 여성 코치의 활약은 오래가지 않았고, 이들은 곧 잊혀져갔다.

때문에 정 감독은 여성 스포츠 지도자를 꿈꾸지 않는, 아니 감히 꿈꾸지 못하는 후배 선수들이 늘 마음에 걸린다. 그는 얼마 전 한 여성지가 여성 선수들을 상대로 선수생활을 마감한 후의 희망에 대해 설문 조사한 결과, 대부분이 다른 진로를 모색하고 있었다며 안타까워했다.

“역할모델이 없었으니까 지도자의 꿈을 꿀 수 없는 거죠. 저 역시 과거 선수생활을 할 때 ‘이 선배처럼 돼야지’ 하는 여자 선배가 없어서 일찍 진로를 모색하지 못했는데, 후배들도 똑같은 과정을 밟고 있더군요. 주부로서의 삶을 포기하고 이렇게 농구장에서 사는 것도 후배들에게 바람직한 여자 선배 상을 제시해주고 싶은 욕심 때문이에요.”

정 감독은 지난 7월 대만에서 열린 존스컵 국제여자농구대회에서 대표팀 사령탑을 맡았다. 정 감독과 오랫동안 한솥밥을 먹었던 박찬숙 대한체육회 부회장은 코치로 발탁돼 그와 호흡을 맞췄다. 여자 감독, 여자 코치, 여자 선수들. 정 감독이 그토록 소망했던 여성 코칭스태프가 탄생됐고 하루하루가 꿈만 같았다. 그는 연습을 하던 그때를 회상하며 “성적이 좋지 않아 아쉽긴 하지만 우리끼리는 너무 좋았다”고 말한다.

“가장 좋은 점이요? 경기 끝나고 목욕탕에 같이 갈 수 있잖아요. 서로 때 밀어주면서 선수들 이야기하고, 어떤 점이 부족했는지 경기에 대해 분석도 하고…. 무엇보다 여자들끼리는 서로 잘 통하죠.”

“최선 다해 승부 하라” 조언

정 감독은 선수들의 장점을 정확히 파악하고, 그 장점을 키워줄 수 있는 예리한 눈을 가진 ‘엄마 같은’ 감독이 되고 싶다고 말한다. 그리고 자신처럼 감독을 꿈꾸는 후배들에게 조언한다. 치열하게 싸우고, 최선을 다해 연습하고 승부 하라고.

“감독을 꿈꾸는 후배들에게 세 가지만 말해주고 싶어요. ‘애기 봐야 해서’, ‘제사가 있어서’, ‘시부모님이 오셔서’ 같은 변명을 늘어놓지 말고 어찌됐든 농구만 하는 여자가 될 것. 더 큰 무대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나만의 농구’를 정립할 것. 그리고 언제나 노력하고 최선을 다할 것.

그러면 머지않아 많은 팀들이 ‘여자라서 안 돼’가 아니라 ‘여자라서 더 좋아’라며 우리 후배들을 모셔 갈 날이 오겠죠?” 코트 밖에선 12명의 선수들이 모두 ‘내 귀여운 딸들’이라고 말하는 정미라 감독. 그의 딸들이 미래의 어느 날, 엄마를 쏙 빼 닮은 여성 지도자로 성장해 있기를 기대해 본다.

금밭갈이 이상무…종합 2위 자신
[인터뷰] 이에리사 태릉선수촌장

90여 일 남은 2006 도하아시안게임을 앞두고 태릉선수촌의 분위기는 늦더위만큼이나 후끈 달아올라 있었다. 여자탁구 국가대표 선발전이 열리던 9월 4일, 여성으로서는 최초로 태릉선수촌 수장이 된 이에리사 촌장을 만나 아시안게임 준비 상황과 목표, 그리고 선수촌 운영, 포부 등을 들어 보았다.

-아시안게임 준비는 어떻게 하고 있나?
"가장 중요한 것은 선수들이 건강하고 안전하게 경기를 준비하도록 환경을 조성하고, 훈련 프로그램이 차질 없이 진행되도록 지원하는 일이다. 또 경기력을 향상시키기 위해선 각 종목 간에 선의의 경쟁을 하도록 분위기를 북돋아주는 일도 필요하다."

-도하아시안게임의 목표는? 금메달은 몇 개 정도 예상하고 있는지?
"37개 종목에 7백50여 명의 선수단이 출전하는데 그 가운데 3백50명이 여성 선수다. 특히 탁구, 농구, 배구, 펜싱, 양궁, 역도 등에서 여성 선수들의 메달을 기대하고 있다. 메달 70~75개를 획득한다면 중국에 이어 무난히 2위는 차지할 것이라 내다보고 있다. 이번 아시안게임은 2008년 베이징올림픽을 가늠하는 좋은 기회가 될 것이다. 미주, 유럽에서도 아시안게임에 출전하는 세계적 기량의 아시아 선수들을 주시하고 있다."

-경기를 앞둔 선수들에게 평소 당부하는 말이 있다면?
"긴장과 피로로 녹초가 된 선수들을 보면 안쓰럽다. 나도 국가대표 선수, 코치, 감독을 거쳤기 때문에 그 마음을 잘 알고 있다. 격의 없는 엄마, 친구처럼 선수들과 손잡고 산책하면서 허심탄회하게 이야기를 나누며 카운슬러 역할을 하려고 한다."

-체육계에 여성 지도자가 매우 적다. 여성 지도자 양성 대안은?
"태릉선수촌엔 여성 지도자가 6명밖에 없다. 대한체육회가 제시한 국가대표 감독, 코치 등 지도자는 국가대표를 지도한 경력이 있어야 한다고 규정해놓고 있다. 이럴 경우 여성 선수들이 지도자로 나아갈 수 있는 확률은 거의 없다고 봐야 한다. 인위적으로라도 여성 지도자를 늘리는 데 예산과 정책을 국가가 지원해야 한다. 또, 여성 선수들도 지도자로서 경험과 역량을 쌓기 위해 사전에 준비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태릉선수촌장으로 앞으로의 계획은?
"선수촌장이기 전에 체육계 선배로서 후배들에게 모범이 되고 싶다. 특히 후배 선수들의 복지와 안전을 위해 낙후된 선수촌의 시설 환경을 현대화하는 데 주력하고 싶다.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할 때 좋은 결과가 나타나는 것은 불변의 진리라 믿는다." / 주진

댓글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