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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오페라단의 마이 퍼스트 오페라 시리즈 1 <라보엠>
국립오페라단의 마이 퍼스트 오페라 시리즈 1 <라보엠> ⓒ 박옥경
그런데 당첨되었다고 메일이 와서 너무 기뻤다. 이 기회에 감수성이 은근히 예민하고 늦게야 사춘기가 온 듯 요즘 말과 행동이 예전보다 삐딱한 중3 아들을 데리고 가기로 했다. 녀석은 "그게 뭔데? 재미있어요?"한다. 여태까지 보아온 것 중에서 가장 수준 높은 것이라고 네가 보면 네 수준도 높아질 거라고 했더니 믿지 못하겠다는 듯 씩 웃었다.

<라보엠>입장 10분 전 백운아트홀
<라보엠>입장 10분 전 백운아트홀 ⓒ 박옥경
공연이 있는 토요일(9일)은 주5일제 수업이라서 선약이 있었는데 뒤로 미루었다면서 녀석이 생각보다 좋아하는 눈치였다. 그렇게 둘이 오랜만에 버스를 타고 나란히 앉아서 <라보엠>을 만나러 갔다. 가을이 훌쩍 와서인지 시원하고 서늘한 날씨가 기분을 더욱 좋게 했다. 공연 시작 20분전에 도착한 백운아트홀 입구에는 입장하고 있는 사람들로 붐볐다.

"미리 화장실 갔다 와야 해" 영화관에 가도 화장실부터 찾는 내 습관을 아는지라 녀석은 또 씩 웃으며 화장실을 다녀왔다. 좌석은 1층 맨 뒤쪽이었다. 아주 괜찮은 자리라고 나는 좋아했다. 속으로는 조금 더 무대와 가까웠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공연 중에는 촬영이 금지 되어 있어서 막에 쓰인 < LA BONEME > 제목만 찍을 수밖에 없었다.

막에 비친 <라보엠>
막에 비친 <라보엠> ⓒ 박옥경
드디어 막이 오르고 무대는 젊은 예술가들이 꿈은 있지만 가난과 싸워야 하는 파리의 다락방에서 시작되었다. 시인 로돌프, 화가 마르첼로, 철학자 콜리네, 음악가 쇼나르. 이들은 크리스마스이브인데 어떤 풍족한 은총도 받지 못 하고 직면한 추위를 우선 해결해야 하는 예술가들이다. 시인 로돌프는 최근 집필한 대본을 난로에 던져 놓고 훈기를 만들어 낸다. 그 장면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예술가들은 여전히 배고프고 힘겹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 같아 가슴이 아프다.

<라보엠>의 굵은 줄기는 로돌프와 아래층의 바느질하는 여공 미미와의 사랑이다. 로돌프는 미미에게 분홍 모자를 사주는데 이야기의 끝까지 이 분홍 모자는 로돌프와 미미의 사랑을 상징하는 매개체로 등장한다. 로돌프가 부르는 '그대의 찬 손'과 미미가 부르는 '나의 이름은 미미라고 합니다'는 널리 알려진 너무도 유명한 아리아.

2막에서 자유분방하고 사치스러운 뮤제타가 돈 많은 고관인 알도르와 함께 카페에 나타나 '뮤제타의 왈츠'를 부른다. '내가 길을 가면 모든 남자들이 정신없이 나를 쳐다본다'고 노래하는 그녀의 매력은 당당하게 뽐내는 아름다움에 있다고 할까? 청순하고 연약한 미미와는 정반대의 인물인 뮤제타는 화가 마르첼로의 옛 애인이었다.

말하자면 부귀와 영화를 위해 가난한 애인을 쉽게 버린 한 마디로 속물근성의 여자이다. 그러나 푸치니는 <라보엠>을 통해 가난하고 힘들지만 따뜻한 인간미를 가진 인물들을 등장시켜 여운을 준다. 뮤제타는 4막에서 죽어가는 미미의 차가운 손을 녹여주기 위해 귀걸이를 팔아 토시를 사오는 인정 많은 인물이다.

뮤제타는 다시 마르첼로의 품에 안기고 알친도르에게 상당액의 계산서만 남긴 채 그 자리를 떠나는데 그 모습이 코믹하고도 재미있다. 2막이 끝나니 15분간의 휴식 시간이 주어졌다. 비로소 주위를 둘러보니 여학생들이 참 많이 와 있었다. 아무래도 남학생보다는 여학생들이 더 관심 있는 장르여서일까? 우리 아들 또래의 학생들은 별로 눈에 띄지 않았다.

백운아트홀 입구
백운아트홀 입구 ⓒ 박옥경
아들 녀석은 15분간의 휴식이 너무 길다고 했다. 드디어 3막이 시작되었는데 앞좌석의 여학생이 자꾸 핸드폰을 켜고 그 불빛으로 책자에 있는 라보엠의 해설을 읽는 것이었다. 미안한 줄은 아는지 얼른 껐다가 잠시 후 다시 읽곤 하였는데 공연 도중에는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다.

3막이 시작되었을 때 무대 뒷배경 그림이 좀 흔들리는 게 눈에 띄게 보였다. 시간이 지나자 그 흔들림은 차츰 없어졌는데 이런 부분은 신경 써야 할 점이 아닌가 한다. 3막은 가슴 아픈 현실적인 내용을 담은 이야기다. 너무 가난한 로돌프에게 사랑만으로는 폐결핵으로 죽어가는 미미를 살릴 수 없었다.

더구나 미미에 대한 질투와 의심 때문에 불화로 치닫는 로돌프의 사랑은 4막에서 미미와의 이별을 미리 준비하고 있다. 마르첼로도 다른 남자와 히히덕거리는 뮤제타와 크게 다투고 두 쌍은 '이별의 사중창'을 부른다.

4막에서 미미는 로돌프를 찾아와 로돌프 곁에서 죽음을 맞이한다. 철학자 콜로네는 자신의 외투를 팔아 약을 구해오고, 뮤제타는 귀걸이를 팔지만 아무 소용도 없이 미미는 숨을 거둔다. 조명이 죽은 미미와 미미를 안고 흐느끼는 로돌프의 등으로 창백하게 떨어진다.

막이 내리고 나서 오페라 작곡가들은 천재라는 생각이 새삼스럽게 들었다. 감정과 상황과 분위기에 맞는 곡을 등장인물마다 다르게 표현할 수 있는 능력을 가졌으니 말이다. <라보엠>은 프랑스의 시인 앙리 뮈르제의 소설 <보헤미안의 생활>에서 쟈코사와 일리카의 대사를 쓴 것인데 푸치니는 같은 내용으로 작품을 만든 레온 카발로처럼 뮈르제의 원작에 구애되지 않고 대본을 써서 성공을 거두었다고 한다.

<라보엠>은 초심자를 위한 국립 오페라단의 '마이 퍼스트 오페라'시리즈 첫 번째 공연이라고 한다. 오페라 관람 경험이 없는 초기 관객에게도 친숙하게 다가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국립오페라단의 관극 도우미 프로그램으로 이를 시작으로 매년 서울 및 주요 지역 도시를 순회하며 찾아가는 오페라 무대를 선보일 계획이라고 하니 앞으로 기대해도 좋을 것 같다.

만 원에서 3만 원의 입장료로 소극장에서 오페라 명작을 접할 수 있도록 기획해, 개막 전부터 표가 동이 났다는 이야기를 들은 것도 같다.

로돌프 역의 테너 (송승민) 목소리가 너무 아름답고 심금을 울렸다. 부드러우면서도 힘 있고 곱고 편안한 목소리여서 로돌프가 가진 모든 것이 더욱 효과적으로 전달되었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아들 녀석과의 오페라 여행을 끝내고 돌아오는 길은 가슴 가득 가을이 넘쳤다. 너무 재미있고 좋았다는 녀석의 한 마디가 감상 평의 다였지만 나는 많이 흐뭇했다. 마침 다음 주에 녀석의 생일이 돌아오는데 미리 선물을 한 셈이기도 하다. 가을의 초입에서 만난 <라보엠> 덕분에 아들과 데이트도 잘 해서 행복한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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