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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념, 축하 기부 (Memorial & Honor Donations)' 탁자
'기념, 축하 기부 (Memorial & Honor Donations)' 탁자 ⓒ 한나영
미국 버지니아주 해리슨버그 메사누튼 도서관에 들어서면 오른쪽에 작은 탁자가 하나 보인다. 탁자에 쓰인 글씨를 보면 대충 무슨 용도로 쓰이는 탁자인지 짐작할 수 있다. 바로 도서관에 기부한 사람들의 이름이 적힌 '기념, 축하 기부 (Memorial & Honor Donations)' 탁자다.

탁자 위에 놓인 책자를 펼치면 명단이 나온다. 바로 메사누튼 도서관에 기부한 사람들의 이름들이다. 이름 옆에는 '아무개를 기념하여(In memory of)'라는 문구가 씌어있다. 그러니까 돌아가신 아무개를 기념하여 가족이나 친지들이 도서관에 돈을 기부했다는 뜻이리라.

그런데 기부자의 명단이 수록된 이 탁자 말고도 메사누튼 도서관에는 '아무개를 기념하여'라는 동판이 군데군데 붙어있다.

신간 서적 코너에도, 책을 반납하는 창구에도, 사서들이 앉은 자리 뒤에도, 일반 서가에도 동판이 붙어있다. 뿐만 아니라 아이들이 노는 방에도, 현관 로비에도, 컴퓨터가 있는 코너에도, 회의실 들어가는 입구에도 동판은 붙어있다. 말하자면 도서관에 들어와서 한 발 뗄 때마다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이 바로 이 동판들이다.

우리나라 도서관에서는 좀처럼 찾아볼 수 없는 기부자의 동판들. 바로 이러한 풍성한 기부문화가 작은 도시 해리슨버그의 도서관을 알차게 만드는 것 같아 그 해답을 찾아보기로 했다. 먼저 창구에 있는 아가씨에게 다가가 말을 건넸다.

"안녕하세요? 저는 한국에서 온 시민기자 한나영입니다. 이곳 메사누튼 도서관을 취재하고 싶어서요. 도서관이 보유하고 있는 장서와 전자자료 등이 얼마나 되는지 알고 싶습니다. 특히 도서관 곳곳에 붙어있는 기부자들의 명패에 대해서 질문을 드리고 싶은데요."

"저, 실은 제가 잘 모르거든요. 잠깐만요."

신간 서적 코너에도 동판이 붙어있다.
신간 서적 코너에도 동판이 붙어있다. ⓒ 한나영
서가에도 기부자의 이름이 적혀 있다.
서가에도 기부자의 이름이 적혀 있다. ⓒ 한나영
개인 뿐 아니라 기관도 기부를 한다.
개인 뿐 아니라 기관도 기부를 한다. ⓒ 한나영
느닷없이 나타난 한국 시민기자의 질문으로 인해 창구 아가씨가 바빠졌다. 아가씨는 안으로 들어가 누군가에게 질문을 했고, 또 어딘가로 전화를 해서 내 취재건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한국에서 왔다는 어떤 여자분이 우리 도서관을 취재하고 싶대요."

두 번의 통화 끝에 내 앞에 나타난 사람은 메사누튼 도서관의 마케팅 디렉터인 '바바라 부시(Barbara Bush)'. 나는 그녀에게 한글로만 되어있는 오마이뉴스 명함에 영문 이름을 적어주면서 한국에서 온 프리랜서 기자라고 나를 소개했다.

마케팅 디렉터인 '바바라 부시'
마케팅 디렉터인 '바바라 부시' ⓒ 한나영
- 바바라 부시라고요? 그렇다면 혹시 조지 부시의…? (바바라 부시는 조지 W. 부시 현 미국 대통령의 어머니 이름이자 자신의 쌍둥이 딸 이름이기도 하다. 할머니와 손녀가 같은 이름을 가졌다.)
"오, 천만에요. 전혀 관계가 없어요."

이름과 관련된 가벼운 농담을 건네면서 인터뷰가 시작되었다.

- 도서관 입구에 놓여있는 탁자에 대해 알고 싶습니다.
"'기념과 축하 기부' 탁자라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우리 도서관에 돈이나 물건을 기증한 사람들의 이름이 수록된 책자를 놓아둔 탁자입니다. 우리 도서관은 공립이지만 아울러 사립의 성격도 띄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로부터 기부를 받고 있는데 그분들의 이름을 기리기 위해 저 탁자를 마련해 둔 것입니다. 감사를 표하기 위해서죠."

- 정부에서 지원하는 예산이 넉넉하지 않은가요?
"우리는 주정부, 연방정부, 그리고 자치단체로부터 지원을 받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전체 예산의 80%입니다. 나머지 20%는 우리 도서관의 관할 구역이라고 할 수 있는 해리슨버그 시와 라킹햄 카운티, 그리고 페이지 카운티의 주민들로부터 기부를 받고 있습니다."

어린이실에도 기부자의 동판이 붙어있다.
어린이실에도 기부자의 동판이 붙어있다. ⓒ 한나영
- 도서관 안을 둘러보면 '아무개를 기념하여'라는 동판이 굉장히 많던데요(도서관 안의 동판을 세어보니 거의 40개 가까이 되었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참여하여 기부를 했습니까?
"예. 우리 도서관은 75년의 역사를 가진 도서관입니다. 지금의 도서관은 2000년에 리모델링을 해서 새로 지었지요. 건축 당시 저희들이 모금을 했는데 그때 참여한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가족 단위로 참여하기도 하고 기관에서 참여하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지금도 꾸준히 기부를 하고 있고요."

- 기부하는 사람들은 보통 얼마를 기부하나요?
"가장 적은 금액은 25달러입니다. (도서관에는 시민들로부터 기부를 받는 '기부신청서'가 있었다. 이 신청서에는 가장 적은 금액이 25달러, 그 위로 50, 75, 125, 200달러가 있다. 그리고 많게는 500달러까지 기부할 수 있다.) 하지만 어떤 분은 단돈 2달러를 보내온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많게는 10만 달러를 기부한 사람도 있었고요. 그런 고마운 분들에 대해 저희가 감사의 마음을 표시하기 위해 기부자의 이름을 동판에 새겨 넣었습니다. 하지만 간혹 익명을 요구하는 경우도 있었어요."

- 왜 그럴까요, 자랑스러운 일일 텐데요.
"이런 데 기부해서 이름이 나오게 되면 부자인줄 알고 연락처를 알아내 귀찮게 하는 경우도 있거든요. 여기저기서 도와달라고요. 그래서 아마 익명을 요구하는 것 같아요."

- 'In memory of'와 'In honor of'란 표현은 구체적으로 어떤 경우에 쓰이나요?
"'In memory of'는 돌아가신 분을 추모하기 위해 가족이나 친구, 동료들이 돈을 내서 기리는 경우에 사용하고요. 'In honor of'는 살아있는 사람에 대해 그의 생일이나 졸업, 또는 결혼 따위를 축하할 때 사용합니다."

살아 숨 쉬고 있을 때는 살아 있어서 기념할 만한 일을 갖게 된 것이 감사해서 기부를 하고, 또 죽게 되면 죽은 자를 기리고 기념하기 위해 산 자들이 다시 기부를 하는 이곳 사람들의 높은 문화 의식이 부럽기만 했다.

그런데 이곳 도서관에 들어오는 건 돈 만이 아니었다. 책도 들어오고 가보로 내려오는 작품이 들어오기도 한다. 내가 도서관에서 빌려온 브루스 윌킨슨이 쓴 <꿈을 주시는 분 (The Dream Giver)>이라는 책도 그 표지를 펼치면 이런 문구가 나온다.

'조앤 & 모리 울드리지를 기념하여'

'조앤 & 모리 울드리지'를 기념하여 메사누튼 도서관에 기증하다.
'조앤 & 모리 울드리지'를 기념하여 메사누튼 도서관에 기증하다. ⓒ 한나영
누군가가 이들을 기념하기 위해 도서관에 책을 기증한 것이다. 이와 같이 단 한 권의 책이라도 누군가를, 무엇인가를 기념할 일이 있을 때 이들은 기꺼이 도서관에 기증을 한다고 한다.

또한 도서관 창구 옆에는 '조지 콘래드(George Conrad)'의 초상화가 걸려 있었다. 우리에게는 익숙하지 않은 이름이지만 조지 콘래드는 이곳에서 가까운 엘크튼 지역의 성공한 사업가로 저명한 유지였다고 한다. 이곳에서는 그를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콘래드 가문에서 기증한 'George Conrad'의 초상화.
콘래드 가문에서 기증한 'George Conrad'의 초상화. ⓒ 한나영
"아주 귀한 작품이죠. 콘래드 집안에서 우리 도서관에 기증을 했어요. 저희로서는 영광이지요."

이와 같이 돈이나 책, 또는 물품을 기부하는 사람이 많은 것은 도서관이 마케팅을 잘해서가 아니었을까. 바바라의 직함인 마케팅 디렉터에 대해 물어보았다.

- 마케팅 디렉터는 무슨 일을 하나요? 제 짧은 소견으로는 마케팅 디렉터는 도서관에 어울리는 직함이기보다 비즈니스 기업에 필요한 직함일 것 같은데요. 구체적으로 무슨 일을 하는지 궁금합니다.
"공공 도서관에서 마케팅 디렉터가 하는 일은 크게 세 가지입니다. 첫째는 일반인과 미디어와의 상호교감을 위한 'PR(Public Relations)'이고, 둘째는 우리가 누구인가, 무엇을 제공하고 있는가를 알리는 '홍보' 그리고 마지막인 셋째는 뉴스레터, 웹사이트, 팸플릿과 그 밖의 필요한 자료 등을 '출판'하는 일을 책임지고 있습니다.

작은 규모의 도서관에서는 이런 일을 맡는 전담자가 없거나 도서관 관리자가 맡기도 하지만 규모가 큰 도서관에서는 대부분 우리와 같은 시스템으로 운용되고 있습니다."

사실 바바라를 인터뷰할 때 나는 그녀가 마케팅 디렉터인 것을 이미 짐작할 수 있었다.

"우리는 사람들에게 '도와주세요. 돈이 필요해요'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강요하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그건 마치 구걸을 하는 거나 마찬가지이니까요. 우리는 신문이나 뉴스레터 등을 통해 왜 도서관에 돈이 필요한지 그 취지를 설명하고, 그 돈이 어떻게 쓰이는지를 알려줍니다. 그렇게 해서 기부금을 받고 있습니다."

바바라가 말한 내용은 도서관에서 발행된 팸플릿에도 나와 있었다. 바로 'Making a difference'라는 팸플릿인데 여기에는 도서관의 역할과, 기부금이 왜 필요한지, 어떤 식으로 기부에 참여할 수 있는지 등이 자세히 설명되어 있었다.

메사누튼 도서관에서 발행한 팸플릿 <Making a difference>
메사누튼 도서관에서 발행한 팸플릿 ⓒ 한나영
우리 아이들이 숙제를 하기 위해 방과 후에 찾아갈 안전한 곳이 없는 동네를 상상해 보십시오. 인터넷 세상과 접속하기 위해 도서관을 찾아가지만 인터넷을 할 수 없는 상황을 상상해 보십시오. 도서관도 없고 여러분과 가족들이 당연하게 누려왔던 모든 혜택이 사라져 버린 삶을 상상해 보십시오.

바로 여러분이 변화를 가져올 수 있습니다. 우리는 당신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여러분의 기부를 언제나 환영합니다. 그리고 지정하지 않은 모든 기부금은 일반 운용 기금으로 사용되는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이 팸플릿을 읽으면 도서관이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지, 또 사람들과 지역 사회를 어떻게 변화시킬 수 있는지 알 수 있을 것 같다. 그리하여 주민들의 참여를 '자발적으로' 유도해 내는 것이리라.

- 마지막 질문은 저의 첫 기사를 읽은 독자로부터 받은 질문인데요. 그 분은 집을 사서 재산세를 내기 전까지는 그동안 누려온 혜택에 비용이 따른다는 사실을 몰랐다고 합니다. 지금 그분은 해마다 시 도서관에 약 300달러의 돈을 내고 있다고 하는데요, 버지니아 주를 포함하여 다른 주에서도 그렇게 세금을 걷고 있는지요.
"다른 주에서는 어떤지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버지니아 주에서는 개인이 내는 세금으로는 소득세와 집, 자동차 소유 유무와 관련된 재산세만이 있습니다. 개인이 내는 세금이 도서관이나 공공시설로 직접 가지는 않습니다. 다만 도서관이 있는 카운티나 시에서 도서관 등의 시설을 지원하기 위해 해마다 예산 가운데 일부를 쓰고 있습니다."

바바라와의 인터뷰를 마치면서 '온 국민의 책읽기 운동'을 활발하게 펼치고 있는 도정일 교수의 주장이 문득 떠올랐다.

"디지털이 책을 대체한다는 믿음은 환상이다. 책을 읽지 않는 국민은 건강한 민주주의를 발전시키거나 장기적인 경제적 성과를 내기 어렵다. 독서의 위축은 정치적 위기를 조성하고 독서력이 빈곤한 백성은 읽고 쓰는 것이 기본인 경제활동에서 활발한 활동을 하는 게 어려울 것이다. 정치, 경제, 문화적으로 건강하기 위해선 책이라는 매체를 결코 포기해서는 안 된다."

'책 속에 모든 시대의 지식과 지혜가 들어있다.' 도서관 입구에 있는 타워 로비 동판.
'책 속에 모든 시대의 지식과 지혜가 들어있다.' 도서관 입구에 있는 타워 로비 동판. ⓒ 한나영
나 역시 도 교수의 의견에 전적으로 동감한다. 우리 사회가 진정으로 건강한 사회가 되기 위해선 책읽기가 적극적으로 장려되어야 하고, 이러한 책읽기의 모판이 될 도서관 건립이 얼마나 중요한지도 국민들이 깨달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런 시설의 확충에는 정부뿐 아니라 자발적인 시민들의 참여가 필수적이고 도서관 관계자들 역시 함께 뛰어야 한다는 사실도 새삼 깨닫게 된 유익한 인터뷰였다.

덧붙이는 글 | 다음 편에는 '동판에 담긴 사연' 기사가 이어집니다.

인터뷰 가운데 '마케팅 디렉터'와 '세금 관련' 질문은 이메일로 답변을 받은 것입니다. 세금과 관련된 질문을 보내주신 미시건주의 애나버에 사시는 이진구 님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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