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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인호 비지니스칸 선실
천인호 비지니스칸 선실 ⓒ 오창학
텐진(天津)으로 가는 진천호 선실은 아늑하다. 겨우 사람 하나 누울 침대에 커튼을 드리운 구조이지만 지친 몸 누이고 머릿속을 정리하기엔 최적의 공간이다.

살다보면 사람의 힘으로도 어쩌지 못할 일이 있음을 안다. 그래서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한다. 그러면서도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말을 믿는다. '우공이산(愚公移山)'의 신념이 객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오랫동안 꿈을 쫓는 사람은 어느새 그 꿈을 닮아가는 법이니까. 오늘의 일이 그 같은 맥락이리라.

이번 여행의 한국 쪽 업무를 도맡아 주었던 K사장과 인천 제3부두에서 만났을 땐 이미 오후 4시 40분. 오후 7시 출항인데 이제야 닿았다. 대전에서 인천에 닿자마자 베이스캠프인 '마스타 지프'에서 타이어교체와 출발 전 마지막 점검을 서둘렀으나 일이 끝났을 땐 이미 오후 4시.

선적 대기중인 1호차 백구(뒤)와 2호차 파라곤(앞)
선적 대기중인 1호차 백구(뒤)와 2호차 파라곤(앞) ⓒ 오창학
태어나 처음 하는 통관이라 K사장이나 나나 잔뜩 얼어 있는데 다른 사람들은 느긋하다. 일단 일행을 여객터미널로 보냈다. K사장과 함께 부두 출입증을 받아 차를 몰고 우련통운에 도착하니 세관 승인서류를 요구한다.

"아…" 이 얼마나 우매한 백성이냐. 통운의 선적 과정에서 통관절차를 거치는 줄 알았는데 이곳에 들어오기 전 통관부터 했어야 한다니. 문제는 시간이다. 통운을 찾는데 부두를 뱅뱅 돌아 시간을 많이 허비했다.

이마가 깨진 백구. 보닛 오른쪽에 서류를 얹고 작성하고 있었으니 바로 내 머리를 넘겨 백구를 친 것이다.
이마가 깨진 백구. 보닛 오른쪽에 서류를 얹고 작성하고 있었으니 바로 내 머리를 넘겨 백구를 친 것이다. ⓒ 오창학
백구의 보닛 우측에 통관서류를 얹어 놓고 허겁지겁 기입하는 찰라, 배에서 컨테이너를 하역하는 트레일러들 사이에서 '팍'하는 소리와 함께 차량 바퀴를 고정하는 고임목 하나가 튀었다. 서류를 작성하는 와중에도 근 20여 미터 거리를 단숨에 날아드는 두툼한 나무토막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느꼈다 싶은 순간, 백구의 앞유리 우측에서 유리 으깨지는 소리가 난다.

"으와아아!" 미친놈처럼 이성을 잃고 소리를 질렀다. 내가 이 여행을 어떻게 준비했는데… 그깟 유리 때문에… 하늘이 노랗다. 왜 이런 어이없는 일이 내게 생기는가. 굉음을 내며 이리저리 분주한 트레일러들을 향해 고래고래 목청을 높였지만 이미 유리는 깨어져 있다. 이대로 차를 싣는다면 톈진에서 이 유리가 수입 도착할 때까지 기다려야 할 터. 안 싣고 수리한다 해도 나흘 뒤 출항하는 배에 실어야 하는데 기간도 문제이거니와 이 모든 절차를 다시 시작해야 할 처지다.

서해를 넘는 천인호. 원래의 실크로드 노선대로라면 육로로 평양을 거쳐 산해관으로 들어가 베이징, 뤄양(낙양)으로 들어가야 한다. 그러나 제 노선을 밟지 못하고 차를 배에 싣고 들어가면서 조국의 분단 상황에 가슴이 미어졌다
서해를 넘는 천인호. 원래의 실크로드 노선대로라면 육로로 평양을 거쳐 산해관으로 들어가 베이징, 뤄양(낙양)으로 들어가야 한다. 그러나 제 노선을 밟지 못하고 차를 배에 싣고 들어가면서 조국의 분단 상황에 가슴이 미어졌다 ⓒ 오창학
벌써 시간은 5시 40분. 절망으로 가슴을 쥐어뜯다가 정신을 차리니 K사장이 다친 데 없냐며 걱정이다. 그래 목숨 건진 게 어디냐. 저 고임목이 부순 게 내 머리가 아니고 유리인 게 얼마나 다행이냐. 보닛 위에 서류 얹고 작성하는 사람의 머리를 피해 유리만 깨기가 어디 쉬우냐. 그래 난 행운아다 살 길은 있다.

나와 백구가 몸을 얹은 천인호. 내가 탄 배를 내가 찍을 순 없었고 선 내에 게시된 사진을 찍은 것이다.
나와 백구가 몸을 얹은 천인호. 내가 탄 배를 내가 찍을 순 없었고 선 내에 게시된 사진을 찍은 것이다. ⓒ 오창학
차를 뺐다. 바로 일단 3부두 정문 앞에 있는 세관으로 가서 통관신청을 해 놓고 세관주차장에서 '마스터 지프'에 연락해 유리를 기다리는데 에릭님의 전화. "배 출항이 2시간 지연된답니다" 말했잖아.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다행히 6시가 넘은 시간에 세관에서도 퇴근하지 않고 차대번호, 엔진번호 조회와 휴대품 검사를 마쳐줬다. 검사 와중에도 유리 작업은 진행되어 말끔히 교체. 시간에 쫓기고 절차에 어두워 진땀 흘리고 유리까지 깨지는 횡액을 맞은 하루가 그렇게 갔다. 백구를 입고 시켜놓고 여객 터미널로 돌아오니 힘이 쑥 빠진다. 그래도 일행이 보내는 격려는 안도가 탈진으로 변하는 걸 막는다.

여전히 배는 잔잔한 물살을 가른다. 서해는 호수만큼이나 평온하다. 인천에서 톈진까지 25시간의 인내가 필요한데 승선 직전까지의 숨 가쁜 일정들을 돌이켜보고 이제 시작될 여행들에 대한 기대와 구상들을 정리하다 보면 굳이 인내랄 것도 없다.


공부. 콘센트가 있는 선내 라운지에서 실크로드 DVD 감상. 먹고, 자고, 생각하고, DVD보고, 25시간이 부족하다.
공부. 콘센트가 있는 선내 라운지에서 실크로드 DVD 감상. 먹고, 자고, 생각하고, DVD보고, 25시간이 부족하다. ⓒ 오창학
내 차를 가지고 중국에 가는 것. 선적료 지불하고 배에 차 실으면 되는 그런 일은 아니었다. 사륜구동을 준비하고 장거리 여행에 맞게 차량을 개조하는 일. 중국 내 차량운행에 필요한 면허와 임시번호판, 그리고 공안부, 국가여유국, 인민해방군 작전부 공동부처의 운행허가서 발급에 필요한 제반 준비, 임시수출입통관 절차… 녹록치 않은 준비과정과 기간. 출발 당일까지 이어지는 복잡한 절차들. 막대한 경비. 낯설고 험한 지역에서의 운전.

인문계 고등학교에서 국어교사가 방학 내내 자리를 비운다는 것. 보충수업 부담을 다른 분께 전가하고 학급의 아이들을 남겨둔다는 것은 송구스럽고 부담스러운 일이다. 복잡함, 생활, 현실, 굳이 지금이어야 하나? 조금 더 안정적인 지위를 가졌을 때, 조금 더 경제적 여유가 있을 때, 그런 때 하면 안 되나? 그런 고민 사이에서 질척일 때 아내가 말했다. 당신 인생에서 서른다섯의 여름은 다시 오지 않을 거라고. 현실의 벽에도 불구하고 오늘, 내가, 이 배 안에 있을 수 있는 것, 그것은 아내의 격려와 의지 덕이다.

실크로드 1만4000Km 답사 계획 노선

▲ 예정노선

제1일: 인천항
제2일: 천진(톈진天津) 당고(塘沽)항 도착
제3일: 톈진-바오딩(保定)- 타이원(太原) - 린펀-허우마(후마)-윈청(運城)- 싼먼사(三門峽)
제4일: 싼먼사(삼문협) - 시안(西安)
제5일: 시안(西安 )
제6일: 시안-센양(咸陽) -바오지(玉鷄)-톈수이(天水)
제7일:톈수이-통위(통웨이通渭)-정서(딩시定西)-난주(란저우蘭州)
제8일: 란저우-융덩(永登)-구랑-우에이(武威)
제9일: 우에이(무위)-진창(金昌)-아라사여우치(阿拉善右旗-바단지린사막巴丹吉林 沙漠)
제10일: 바단지린사막-바단지린 사막
제11일: 바단지린사막- 주취안(酒泉)-자위관(嘉峪關)
제12일: 자위관(嘉峪關)-안시(安西)-둔황(敦煌)
제13일: 둔황(敦煌)
제14일: 둔황-고비사막-하미(合密) 방향으로 이동
제15일: 고비사막-하미
제16일: 하미-싼싼(선선)-투루판
제17일: 투루판-쿠얼러 캠핑
제18일: 쿠얼러-룬타이- 쿠차
제19일: 쿠차-악수(아커스)-카스
제20일: 카스
제21일: 카스-피산- 호탄(허티엔)
제22일: 호탄-우전(위톈)-민펑
제23일: 민펑- 치에모-노챵(뤄챵)
제24일: 노챵- 망암 캠핑
제25일: 망암 - 더링하(德令合)
제26일: 더링하-우란- 칭하이(靑海)호수
제27일: 청해호수 - 시닝(西寧) - 평안 - 란저우
제28일: 란저우 -바이인(白銀)- 은촨(銀川)
제29일: 은촨
제30일: 은촨-우하이(烏海)-린허(臨河)-우위안(五原)-바오터우(包頭)
제31일: 바오터우-후허하오터(呼和浩特)-청수이허(淸水河)-다둥(大同)
제32일: 다둥(大同)-톈진(天津)
제33일: 천진
제34일: 천진 출발
제35일: 인천항 도착
/ 오창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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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서.화에 능하고 길떠남에 두려움이 없는 생활인. 자동차 지구 여행의 꿈을 안고 산다. 2006년 자신의 사륜구동으로 중국구간 14000Km를 답사한 바 있다. 저서 <네 바퀴로 가는 실크로드>(랜덤하우스,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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