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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섯 살 내 딸과 세살 내 아들이다. 예전에 아이들을 ‘교육’의 대상으로 보았던 때에는 이 아이들을 나는 종종 '고집쟁이'와 '말썽쟁이'이라 불렀다. 하지만 지시가 아닌 함께 하는 ‘학습’의 관점에서 보면서 지금은 이 아이들을 '관심이' 와 '호기심'이라 부른다.
여섯 살 내 딸과 세살 내 아들이다. 예전에 아이들을 ‘교육’의 대상으로 보았던 때에는 이 아이들을 나는 종종 '고집쟁이'와 '말썽쟁이'이라 불렀다. 하지만 지시가 아닌 함께 하는 ‘학습’의 관점에서 보면서 지금은 이 아이들을 '관심이' 와 '호기심'이라 부른다. ⓒ 장희용

우리는 흔히 아이들을 바람직하게 키우기 위한 방법으로 ‘육아 교육’이라는 말을 쓴다. 나는 이 ‘교육’이라는 개념 자체에 굉장한 모순이 있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결론적으로 바람직한 육아법이 아니므로 부모님들의 의식 속에서 이 ‘교육’이라는 말을 버려야 한다고 본다.

교육이라는 말을 사전에서 찾아보자. ‘가르치어 기름’이라고 적혀 있다. 이어 ‘지식과 기술 따위를 가르치어 개인의 능력을 신장시키고 바람직한 인간성을 갖추도록 지도함’이라고 부연 설명 하고 있다. 그리고 그 교육의 장에 따라 가정교육, 학교교육, 사회교육 등으로 구분한다고 되어 있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내가 했던 행위(바람직한 육아 교육 정보를 찾으려 했던 행위와 그것을 또한 아이에게 적용했던 행위)는 ‘아이를 가르치어 기르기 위한 것, 즉 지식과 기술을 가르치어 아이의 능력을 신장시키고 바람직한 인간성을 갖추도록 지도하기 위해 육아교육의 방법을 찾은 것’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얼핏 보면 ‘교육’이라는 것 좋은 뜻일 것 같다. 잘 가르쳐 바람직한 인간성을 갖춘 아이로 키운다는 데 뭐가 문제란 말인가? 그렇다면 정말로 이것이 좋은 행위였을까? 나는 표면적으로 보면 분명 옳은 행위로도 볼 수 있지만 근본적인 것으로 들어가면 이 같은 행위가 굉장히 무섭고도 위험한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

지시하는 ‘교육’ 대신 부모와 함께 하면서 배우는 ‘학습’의 개념 필요

둘째 태민이 녀석이 과일을 주었더니 저렇게 조각조각 먹지도 못하게 잘라 놓고는 자기 딴에는 뭐가 저리 즐거운지 웃고 있다.
둘째 태민이 녀석이 과일을 주었더니 저렇게 조각조각 먹지도 못하게 잘라 놓고는 자기 딴에는 뭐가 저리 즐거운지 웃고 있다. ⓒ 장희용

예전 같으면 벌써 혼냈고, 아이는 울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무작정 혼내기 전에 앞서 아이 하는 것을 지켜보거나 같이 하면서 “뭐가 그렇게 재밌냐고 묻는다.” 그런 후 나는 과일의 용도에 대해 조용히 설명한다. 나는 믿는다. 말썽이 아니라 호기심과 관심이라고. 나는 또한 그 믿음을 믿는다. 이후 과일 먹을 땐 지난번처럼 하지 않는  태민이를 봤으니까.
예전 같으면 벌써 혼냈고, 아이는 울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무작정 혼내기 전에 앞서 아이 하는 것을 지켜보거나 같이 하면서 “뭐가 그렇게 재밌냐고 묻는다.” 그런 후 나는 과일의 용도에 대해 조용히 설명한다. 나는 믿는다. 말썽이 아니라 호기심과 관심이라고. 나는 또한 그 믿음을 믿는다. 이후 과일 먹을 땐 지난번처럼 하지 않는 태민이를 봤으니까. ⓒ 장희용

생명을 가진 모든 것에는(사람이든 동물이든) 당연히 존중받고, 보장받고, 또한 누려야 할 ‘자유’가 있다. 하지만 최소한 지금 우리 현실에서의 이 교육의 최종 목표에는 결국 그 ‘자유’를 억압하고 빼앗는 데 있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교육’이라는 허울 좋은 명목 뒤에 숨어 있는 것이 바로 이 ‘마음의 강제와 행동의 제약’이기 때문이다.

즉 ‘아이의 자유’를 ‘교육’이라는 명목 아래 ‘부모의 지나친 욕심’과 ‘아이의 마음에 대한 강제’를 허울 좋게 ‘포장’한 것이 결국 오늘의 교육의 개념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많은 부모들은 “이게 다 너를 위해서야!”라는 말로 행위를 정당화하려 하지만 그것은 힘을 가진 자의 자기 합리화일 뿐 정당성을 인정받을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민주주의 작동 원리 중 하나인 ‘역지사지’처럼 입장을 바꿔 한 번 생각해 보자. 과연 어떤 누군가가 당신의 마음과 행동을 강제하고 제약한다면, 그래서 ‘자유’를 억압한다면 당신은 어떠하겠는가? 그 사람의 존재를 인정하고 그 사람의 말대로 행동하겠는가?

아이들도 마찬가지다. ‘아이의 자유’를 부모가 지금처럼 서슴없이, 그리고 아무런 성찰 없이 빼앗아버린다면, 그런 가정환경에서 자란 아이가 ‘교육’의 목적처럼 ‘개인의 능력이 신장되고 바람직한 인간성을 갖춘 아이’로 성장할 수 있겠는가?

강제하면 강제할수록 더 심각하고도 반항적으로, 그래서 점점 ‘교육’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비뚤어진 아이로 자랄 것이다. 그러면 부모는 더 큰 교육, 즉 ‘체벌’로 이어지고, 아이는 더 반항하고 비뚤어지는 악순환의 구조로 빠져들 수 있으니 이 얼마나 무섭고도 위험한 행위인가?

아이가 어리니 그런 것을 모를 것이라고? 천만에 말씀이다. 아이들 다 안다. 단지 어른들이 쓰는 말로 표현을 못할 뿐이지 자기 나름대로 알 건 다 알아서 의사표현을 한다. 갓난 아이 때는 울음으로 의사를 표시하고, 점점 크면서는 말과 행동으로 분명히 자신의 의사를 표현한다. 단지 아이를 ‘교육’시키려고만 하니 그러한 아이들의 말과 행동을 알아채지 못하는 것 뿐이다. 나도 그랬다.

교육’ 관점으론 ‘말썽’이었던 것이 ‘학습’ 관점으론 ‘호기심과 관심’으로

부모들은 아이들이 책을 가까이 하고 많이 읽기를 바란다. 그래서 밤에 자기 전에 책을 읽어 주거나 아이들이 책을 쉽게 접할 수 있도록 거실 등에 책을 놓기도 한다. 하지만 아이들이 책을 장난감 대하듯 흩트리거나 하면 ‘교육’ 차원에서 정리하라고 혼을 낸다. 과연 이 상황에서 아이들이 부모의 바람처럼 책을 가까이 하고 많이 읽을까?
부모들은 아이들이 책을 가까이 하고 많이 읽기를 바란다. 그래서 밤에 자기 전에 책을 읽어 주거나 아이들이 책을 쉽게 접할 수 있도록 거실 등에 책을 놓기도 한다. 하지만 아이들이 책을 장난감 대하듯 흩트리거나 하면 ‘교육’ 차원에서 정리하라고 혼을 낸다. 과연 이 상황에서 아이들이 부모의 바람처럼 책을 가까이 하고 많이 읽을까? ⓒ 장희용

그렇다면 ‘교육’이 아닌 다른 방식의 육아방법이 있을까? 내가 육아 전문가가 아니니 개념 정의에 대해 학술적 관점 등에서 이 단어의 선택이 적절한 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내 경험과 옅은 지식에서 나온 단어를 선택한다면 나는 ‘학습’이라는 개념을 도입하고 싶다.

강제의 성격이 아닌 참여와 자율의 성격이 더 강한 ‘학습’. 가르치고 기르는 것이 아니라 배우고 익힌다는 ‘학습’. 언뜻 같은 뜻일지 몰라도 미묘하고도 분명한 언어 의미의 차이점과 그 속에 담긴 철학의 의미가 다름을 알 수 있다. 아직은 아이가 어리니 ‘부모가 함께 하는 학습’이라면 더 할 나위 없이 좋은 육아법이 아닐까 싶다.

예를 들어 간단한 차이점을 보면 아이가 집에 있던 화장지를 다 풀어놓거나 혹은 정리해 둔 물건을 흐트러뜨리는 경우 대부분의 부모는 어떤 반응을 보일까? ‘교육’ 측면에서 볼 때는 아이의 그런 행동은 분명 화장지가 제 용도로 쓰이지 않고 버려지는 것, 즉 그것은 아이의 ‘말썽’으로 부모는 인식하게 된다.

그런데 부모가 생각하기에 ‘말썽’을 부리는 아이의 행동을 무작정 혼내기에 앞서 유심히 살펴 본 적이 있는가? 뭐가 그리도 재미있는지 막 웃을 때도 있고, 뭔가 심각한 표정을 지을 때도 있다. 그것을 휙휙~ 저어 놓고는 가벼운 화장지가 공중에 떠올랐다 바닥에 내려와 멈출 때까지 두 눈의 시선을 고정시킬 때도 있다.

그 때의 아이는 분명 자기만의 세상에서 자기의 눈을 가지고, 자기의 생각을 가지고 뭔가 ‘의미 있는 행동’ 하고 있는 것이다. 부모의 입장에서 본 ‘말썽’이 아님을 유심히 살펴보면 분명히 알 수 있다. 의심나면 한 번 관찰해 보아도 좋다.

그래서 나는 아이의 그 같은 행동을 ‘말썽’이 아니라 ‘호기심과 관심’이라는 말로 대체했다. 또한 그 행동에 대한 나의 후속조치를 교육이 아닌 ‘학습’이라는 개념으로 대체했다. 내가 생각하는 학습이란 별거 아니다. 혼내기 전에 그저 아이한테 다가가 “뭐해?”라고 일단 물어보는 것이다.

일단 그렇게 물어보면 아이는 “화장지가 뽑아도 뽑아도 계속 나와. 신기해!”라고 자신의 행위에 곧바로 대답하는 경우도 있고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다. 그럼 나는 아이와 똑같은 행동을 해 본다. 나는 “야, 재밌다!”라고 말한다. 그럼 아이는 말한다. “아빠도 재밌지!”라고.

아이는 화장지를 하늘로 날려 본다. 그리고는 말한다. “아빠 봐봐. 화장지가 하늘로 올라간다. 그치? 왜 그런지 알아? 화장지는 가벼워서 그래”. 그럼 나는 말한다. “아, 그렇구나!”라고.

아이들의 행동을 바로잡기 위해 강제하기 보다는 우선 아이의 행동을 이해하려는 자세가 필요하다. 가만히 살펴보거나 참여해 같이 하면서 대화를 하다보면 아이 행동의 원인을 알 수 있으며 또한 강제적으로 고치려고 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대화속에서 올바른 행동을 유도할 수 있다.
아이들의 행동을 바로잡기 위해 강제하기 보다는 우선 아이의 행동을 이해하려는 자세가 필요하다. 가만히 살펴보거나 참여해 같이 하면서 대화를 하다보면 아이 행동의 원인을 알 수 있으며 또한 강제적으로 고치려고 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대화속에서 올바른 행동을 유도할 수 있다. ⓒ 장희용

나는 그렇게 아이의 행동에 한참을 동참하면서 대화를 하면서 일방적으로 무엇인가를 가르치고자 하는, 또한 혼을 내는 ‘교육’이 아닌 그 속에서 배우고 익히게 하는 ‘학습’이라는 것을 자연스럽게 하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그런 후 나는 아이에게 화장지의 용도를 알려주면서 화장지를 다시 정리하자고 말한다. 아이는 아주 기분 좋게 흔쾌히 “네”라고 대답한다. 결국 ‘교육’을 통해 아이에게 전달하려는 ‘화장지의 올바른 용도’는 이렇게 마찰 없이 긍정적인 모습으로 나타났다.

하나의 예만 들었지만 이와 유사한 경우는 아주 많다. 말썽이라고 규정하는 것, 고집이라고 규정하는 것 등 아이들의 행위를 ‘교육’이라는 측면에서만 부모들이 규정해 일방적으로 가르치려 하는 경우는 우리 일상에서 허다하다.

이런 부모의 생각이 나는 분명히 잘못됐다고 생각하기에 나는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아이의 마음과 행동을 강제하지 않는 것, 그래서 부모의 마음속에서 ‘교육’이라는 말 자체를 지워버리는 것이야말로 바람직한 육아법의 우선적 첫 걸음이면서도 가장 중요한 것이라 말하고 싶다.

나는 이것이 선행될 때 바람직한 육아의 실천적 방법인 '대화와 존중‘이라는 말이 제대로 작동할 것이라 여긴다.

덧붙이는 글 | 다음 블로그에도 보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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