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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서웠다. 결코 작은 돈이 아니었다. 끈질기게 버티니 저들이라고 별 수 있겠는가. 그들도 나같은 사람을 만나 뜻을 이루지 못했고 조금은 순수한 이들을 만나 다행히 몸만 곳곳이 멍이 드는 걸로 끝이 났다.
무서웠다. 결코 작은 돈이 아니었다. 끈질기게 버티니 저들이라고 별 수 있겠는가. 그들도 나같은 사람을 만나 뜻을 이루지 못했고 조금은 순수한 이들을 만나 다행히 몸만 곳곳이 멍이 드는 걸로 끝이 났다. ⓒ 시골아이 맛객
영만이도 됐다고 했다. 몸과 마음으론 어린 동생의 채근을 거부했지만 무거운 내 몸에 달린 짐 때문에 도리 없이 질질 끌려가고 있었다. 괜스레 효순이 뒤를 쫓았다는 후회는 이미 때늦은 거다.

"요 새끼들이여. 성!"
"뭐라고 이놈들이라고?"
"잉."
"알았어."

광주일고를 지나 광주천으로 향하는 북동성당 인근 큰 도로에서 4~5미터밖에 들어가지 않았다. 건물과 건물 사이 어둠침침한 골목에 시골 촌놈 둘이 삽시간에 다섯 명에게 둘러싸였다. 일순간 생판 다르게 변한 상황에 어리둥절하며 궁지에 몰리기 일보직전이었다.

"얌마, 니기들 이리 와봐."
"왜요? 뭣땜시…."
"이 새끼들이 와보라면 오면 되지 주먹뎅이만한 것들이 지랄이여."

숫자로나 힘으로 도저히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더군다나 내겐 한 달치 자취방 월세와 책값, 용돈이 바지 뒷주머니에 만 원짜리로 스무 장이 넘게 들어 있었다. 여차하면 모두 뜯기어 알거지가 될 판이다.

영만이는 그래도 순순히 있던 돈을 모두 털어냈다. 하기야 수중에 만 2천원밖에 없었으니 정 안 되면 걸어서라도 집에 도착할 수도 있거니와 도시학교에서 친구들에게 소위 삥땅 뜯는 이런 저런 무용담을 수도 없이 들었을 테니 대처법을 조금은 알고 미리 작정을 하고 내줘도 무방하였을 게다.

나는 상황이 달랐다. 담양 하고도 창평면이라 하면 일개 작은 면소재지에 지나지 않는다. 명색이 신생 시골고등학교를 장학생으로 갔으니 공부는 뒷전이었지만 모범생을 자처하며 재기의 기회만을 엿보고 있던지라 형은 대학 때와 달리 내가 요구하는 대로 많게는 한번에 30만원을 넘게 부쳐주고 있었다.

내게 가장 풍족했던 시절이라 배짱보다 더 두둑한 게 내 주머니 사정이었다. 더군다나 나는 도시 뒷골목에서 벌어지는 갖가지 세상사와는 담쌓고 여전히 1970년대 후반에 머물러 사는 촌놈에 지나지 않았다.

내 행동이 범상치 않음을 깨달은 그들은 나를 집중 추궁하기 시작했다. 껍질째 사과를 한번 베어 물고는 들고 있던 사과를 내 가슴에 사정없이 던졌다. 그도 모자라 씹고 있던 사과를 얼굴에 뱉어버리며 겁을 주고 있었다.

두 명이 양쪽 팔을 잡고는 주먹과 발길로 내 배를 사정없이 가격했다. 얼굴을 때리자 입에서 피가 질질 흐르고 있었다. '아, 내 옷가지며 무거운 짐이여!' 옴짝달싹하지 못하고 독 안에 든 쥐가 되었다.

"야 꼬마야, 친구 엄마가 병원에 있다니까. 그러니까 우리 나눠쓰자. 응?"
"안 돼! 내 방값이란 말야."
"아따 긍께 나눠쓰자고 했자너. 너 절반 우리 반 쓰면 되잖냐? 그것도 안 돼?"

이젠 상황이 조금 바뀐 건가? 이젠 내 주머니에 돈이 가득 들어 있을 거라 확신을 한 깡패들은 사지를 잡고 몸을 수색하기 시작했다. 난 몸부림밖에 달리 방법이 없었다. 어찌나 몸을 비틀며 저항을 거세게 했던 지 오래 시간을 끌면 안 된다고 판단을 했던지 모른다.

"악-"
"사람 살려요."

내 친구 영만이는 괜히 건드려 부스럼을 만들지 않으려는 건지 머리를 숙인 채 죽은 듯이 있었다. 야속한 순간이다. 나 같으면 여차하면 튀어서 사람 두엇만 불러오면 모든 게 정상으로 갈진대 꿈쩍도 않고 있고 내가 어찌 되든 상관이 없나보다. 더군다나 대로에서 몇 미터 들어오지 않았는데도 이렇게 치안이 허술하다니!

바로 건너편 공용터미널에선 수십만의 사람이 오가는 그 시각 우린 골목에서 10분을 훌쩍 넘겼다. 내가 지쳐갈 무렵이었다. 몸부림을 치며 수없이 맞아가며 버틴 지 20분에 육박할 무렵 그들은 내 뒷주머니에서 기어코 돈 주머니를 꺼냈다.

"안 돼~. 안 된다니까. 그러면 나는 못 살아. 내 돈 내놔."

처량하게 무릎을 꿇고 빌며 애걸복걸 시대로 접어들었다. 곧장 빠져나가도 될 일이지만 젖 먹던 힘까지 보태 사정을 하자 쉬 떠나지 못하고 몇 마디 나눈다.

"아따 이 새끼 정말 징그러운 놈이구만. 야, 어쩔까?"
"독종이다야. 그냥 줘서 보내, 재수 옴 붙었다야."
"얌마, 여깄다. 담부턴 이런 데 오지 마. 알았지?"

내 몸은 맘껏 구겨졌다. 마음도 상처를 크게 입었다. 깡패들이 내 돈을 탐내며 무참히 밟은 건 그렇다 치고 아무 저항이나 손도 쓰지 않은 영만이가 과연 내 친구인가 하는 의문이 들어 돈을 챙긴 뒤 황급히 그 자리를 떴다.

다시 103번 시내버스로 갈아탄 건 8시가 다 된 시각이었다. 9시 무렵 시내를 돌고 돌아 담양 창평에 도착하니 껄렁껄렁한 한 무리가 지나간다. 소름이 끼쳤다. 창평은 함평, 남평과 함께 3평으로 불리던 일제 때 순사들도 강 건너 불 보듯한 건달과 깡패들 소굴이요, 서방파 젖줄이 아니던가.

"야, 인자 오냐?"

어디서 나를 보았던 걸까? 아니면 내 친구도 한 명 끼어 있는지도 모른다.

"예, 형님, 개학 준비하느라고 자취방에 가는 길입니다."
"그래, 밤길 조심하고…."
"예, 형님. 들어가십쇼."

이렇게 해서 난 깡패들과 친하게 되어 그 뒤론 스물한 살 때 종로4가에서 대낮에 뺨따귀 한번 맞은 것 빼고는 얻어터지지 않았다. 생판 모르는 퇴학당한 친구들에게 '형님'이라 부른 건 몇 시간 전 벌어진 사건을 겪고 나서니 얼마나 내 처세술이 뛰어난 건가. 더불어 세상 절반을 알았으니 혹독한 시련이 가르쳐준 교훈은 결코 작지 않다.

후배에게도 집단구타를 심심찮게 당했던 창평에서 살아남는 방법을 나는 불과 한 시간만에 터득한 머리 좋은 아이였다. 지금도 8월 그 날을 떠올리면 웃음이 피식피식 나오곤 한다. 내 깡다구를 단련하는데도 한 몫 단단히 한 셈이다.

덧붙이는 글 | 김규환 기자는 시골아이  바로가기☜  를 만들고 있습니다. 고향, 추억, 맛있는 이야기가 그립거든 언제든지 찾아오세요. 

SBS 유포터뉴스에도 송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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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환은 서울생활을 접고 빨치산의 고장-화순에서 '백아산의 메아리'를 들으며 살고 있습니다. 6, 70년대 고향 이야기와 삶의 뿌리를 캐는 글을 쓰다가 2006년 귀향하고 말았지요. 200가지 산나물을 깊은 산속에 자연 그대로 심어 산나물 천지 <산채원>을 만들고 있답니다.도시 이웃과 나누려 합니다. cafe.daum.net/sanchaewon 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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