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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사는 사람일수록 "인생이 뭐지?"라는 식의 난데없고 다분히 철학적인 질문을 던지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학교를 늘 바쁘게 오가면서도 "학교가 뭐지?"라고 스스로에게 물어보는 것이 쉽지 않은 것처럼 말이다.

하긴 사는 것이 다 그렇고, 학교가 어떤 곳인지 대강 알 만한 일인데 굳이 그런 한가한 질문을 던질 필요가 있을까? 하지만 왜 사는지를 알아야 삶의 내용이 달라질 수 있듯이, 학교가 무엇을 하는 곳인지 제대로 알아야 교사는 교사대로 학생은 학생대로 학교에서 해야 할 일이 분명해질 것 같기도 하다.

요즘 들어 학교에 대한 사색에 빠질 때가 많다. 방학이다 보니 마음에 여유가 생겨서 그런지 가끔 텅 빈 교정을 걷다가 문득 학교가 무엇인지, 나는 학교에서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 마치 허공을 향해 돌을 던지듯 나를 향해 질문을 던져보는 것이다.

해마다 새 학기가 시작될 무렵이면 누구랄 것도 없이 평범한 아이들이 제각기 동등한 생명을 지닌 눈부신 존재로 나에게 다가오는 것도 내 마음의 허공에 던진 그런 질문 덕분이 아닐까 싶다.

우리 집 바로 코앞에 학교 건물이 들어서고 있다. 아파트 베란다에서 보면 새롭게 조성한 운동장이 훤히 내다보일 정도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싱싱한 채소들이 자라던 남새밭과 무성한 밤나무 숲 사이로 등산로가 나 있던 아름다운 산기슭이 사라지고, 대신 그 자리에 내년 3월에 첫 입학생을 받게 될 인문계 고등학교가 생기는 것이다.

고추와 가지들이 사이좋게 자라던 텃밭과 해마다 계절의 변화를 느끼게 해준 고마운 밤나무들이 공사로 인해 풍경에서 지워질 즈음, 나는 엉뚱하게도 땅의 가치에 대한 손익계산을 하고 있었다. 온갖 채소가 자라고 숲이 우거져 있던 땅과 학교가 세워진 뒤 학생들이 드나들 교육 공간으로서의 땅의 가치를 견주고 있었다는 얘기다.

어차피 엉뚱한 발상이지만, 내 딴에는 이런 저런 고민이 되기도 했었다. 만약 고추와 가지들이 사이좋게 자라듯 아이들이 사이좋게 자라주지 않는다면? 땅에 튼튼한 뿌리를 내리고 햇살과 비와 바람의 도움을 받아 의젓하게 함께 키를 키워온 나무들과는 달리 오로지 점수경쟁에 매달려 우정도 모르고 배려심도 없는 이기적이고 편협한 아이들로 자란다면? 채소나 나무들처럼 자기가 수고하여 남을 이롭게 하는 넉넉하고 멋진 아이들로 자라지 못한다면?

인터넷 백과사전은 학교를 '일정한 목적 하에 전문직 교사가 집단으로서의 학생을 대상으로 교육을 실시하는 기관'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사전다운 해석이요 아주 틀린 말도 아닌데 상상력이 빈곤한 학교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 같아 숨이 탁 막힌다.

한 사람이 세상에 태어나서 정상적인 의식을 가지고 행복을 추구하며 생활할 수 있는 기간이 몇 년이나 될까? 아니, 요즘은 태중에 있는 아이들도 행복을 추구할 권리가 있고, 흙으로 돌아갈 날이 머지않은 노인들도 나름대로 삶을 즐기거나 정리할 시간이 필요함으로 인간의 평균수명을 생각하는 편이 더 낫겠다. 그렇게 길게 잡아도 80년이다.

그 80년의 세월에서 한 사람이 초등학교에 입학하여 대학교를 졸업하기까지의 16년의 세월을 짧다고 말할 수 있을까? 4년 동안의 대학생활을 뺀다고 해도 한 아이가 학교라는 공간에서 보내는 기간이 12년이다. 더욱이 그 12년은 한 인간이 배우고 성장하는 초기단계로서 매우 예민하고 중요한 시기이다.

그 결정적인 시기에 아이들은 '일정한 목적 하에 전문직 교사가 집단으로서의 학생을 대상으로 교육을 실시하는 기관'인 학교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낸다. 특히 고등학생이 되면 잠을 자는 시간을 빼고는 거의 하루 종일 학교에서 지내야한다. 자발적인 개인이 아닌 집단의 일원으로서, 삶의 주체가 아닌 대상으로서 말이다. 이것이 사전적인 해석뿐만 아니라 실제 학교의 모습이라는 것이 문제인데, 이대로 좋을 것인가.

이런 문제제기를 하는 순간, 나는 현실을 모르는 이상주의자라는 말을 듣게 된다. 재미있는 것은 어느 학교를 막론하고 그 학교의 교육계획이나 교육과정을 살펴보면 더할 수 없이 '이상적'이라는 것이다. 문제는 청사진만 요란하게 그려놓고 현실과 이상의 접점을 찾으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는 저들의 게으름인데, 그것을 오히려 현실에 충실한 것으로 착각하고 있으니 답답한 노릇이 아닌가.

나는 학교를 이렇게 말하고 싶다. 나무가 자라듯 아이들이 자라는 곳이라고. 어린 생명들이 공부하고 뛰놀면서 삶을 배워가는 곳이라고. 남을 이롭게 함으로써 함께 행복해지는 연습을 하는 곳이라고. 대안 학교뿐만 아니라 일반 학교에서도 그런 교육공동체를 꿈꾸고 실천하는 사람들이 많아졌으면 좋겠다.

덧붙이는 글 | <경향신문 교단일기>에 기고한 글을 조금 더 잇대어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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ㄹ교사이자 시인으로 제자들의 생일때마다 써준 시들을 모아 첫 시집 '너의 이름을 부르는 것 만으로'를 출간하면서 작품활동 시작. 이후 '다시 졸고 있는 아이들에게' '세상 조촐한 것들이' '별에 쏘이다'를 펴냈고 교육에세이 '넌 아름다워, 누가 뭐라 말하든', '오늘 교단을 밟을 당신에게' '아들과 함께 하는 인생' 등을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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