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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르주 루오가 그린 창부와 광대의 그림에서는, 약자를 향한 동정과는 다른 게 느껴진다. 루오의 광대들은, 동정을 부르는 가련한 표정 따위는 짓지 않는다. 그들은 루오가 펼쳐놓은 짙은 그림자(그것은 그들의 숨겨진 진정한 자아를 나타내는 장치가 아닐까) 속에서, 관객들 앞에선 결코 보여주지 않는 사납고 거친 표정을 짓는다.

그들은 공격적이고, 짐승같기까지 하다. 그러면서도 묘하게 슬프고 비참한 느낌을 준다. 어쨌거나 그들은, 동정 따위는 애초에 바라지도 않고, 우리가 그런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을 용납하지도 않는다.

루오가 그린 창부들은 또 어떤가. 그 이전의 위대한 화가들이 그렸던 나부들과 비교해 보자. 모두들 신화의 여신들처럼, 우아하면서도 요염하고, 백옥같은 피부와 균형잡힌 몸매를 가졌다. 그러나 루오의 창부들은 거칠고 상처투성이다.

더러운 색을 띈 채 꿈틀거리는 그들의 몸은, 차라리 푸줏간의 고기를 연상케 할 정도다. 피곤에 찌든 채 머리를 매만지는 모습 역시 남성 관람자를 유혹하는 '여신'의 자태와는 거리가 한참 멀다. 그 추악한 표정과 몸뚱아리는, 유복한 '신사' 예술가들의 낭만적인 감상 따위는 '엿이나 먹어라'라고 외치는 것 같다.

광대와 창부는 우리 욕망의 '하수구'다. 우리는 창부를 통해 남에게 차마 말 못할 그런 욕망을 해소한다. 다른 이의 몸을 내 자위(나 혼자만 만족하는 행위이기 때문에, 이것은 성교가 아닌 자위일 뿐이다)의 도구로 쓴다. 따라서 이것은 성의 욕망이 아닌, 계급의 욕망이다. '천한 여자'를 함부로 대하면서, 우리는 우월감을 만끽한다.

광대는 또 어떠한가. '딴따라' 역시 오랫동안 우리의 우월감을 채우기 위한 도구 노릇을 했었다. 바보같고, 저급한 재주나 부릴 줄 아는 광대들. 그들은 언제나 가장 천민이었고, '정상인'을 상대하느라 지친 사람들, 특히 겉만 친구인 적들 사이에서 하루 종일 살았던 상류 계급 인간들의 위안용 노리개였다. 성적 서비스는 따라서 당연히 따라붙는 '옵션'이었다. 굳이 <왕의 남자>를 보지 않았어도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루오의 광대와 창부들은, 마지막까지도, 희생양의 '순결한' 눈물 따윈 흘리지 않는다. 정말 비참하고 슬픈 사람은, 눈물도 다 말라 버렸고, 비명도 더 이상 지를 힘도 없다. 그들은 이제 오히려, 세상을 향해 이빨을 드러낸다. 돈을 벌기 위한 영업용 미소와 제스처를 걷어치워버린다.

광대는 저승사자같은 표정을 지으며 불길한 리듬으로 북을 쳐댄다. 창부는 손님들의 손자국으로 만신창이가 된 몸뚱이를 해보자는 듯이 모조리 드러낸다. 그리고 그들의 뒤에 짙게 너무나 짙게 드리워진 그림자. 우리는 늦게서야 그들의 '영혼'을 알아차리고 전율하고 만다. 루오, 정말 잔인하도록 솔직하게 그리는 화가였다.

덧붙이는 글 | 얼마 전에 대전에서 루오의 그림 전시회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개인 사정으로 보지 못했습니다. 매우 안타깝게 여길 뿐이며, 반 고흐의 전시회도 조만간 한국에서 열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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