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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사람이 명예롭게 일생을 산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그 가늠으로 서울 동작구에 있는 국립현충원을 생각합니다. 국립현충원에는 국가에서 세운 일정한 규범의 명예로운 삶을 사신 분들이 계십니다. 대개는 군경을 지내신 분이 많으시지요.

국립현충원이 갖는 의미는 하나뿐인 자신의 목숨을 흔쾌히 바쳐 나라를 지킨 큰 가치를 만든 경우라 하겠습니다. 그러기에 명예를 지킨다는 것은 목숨과 바꿀 수 있을 가치를 지킨다는 것과 통하는 말이라 여겨도 무리는 아니라 생각합니다.

그러고 보면, 자신만을 위한 일생을 사는 경우는 명예로움과는 다소 거리가 있다고나 할까요? 대부분의 사람들은 개인적인 삶의 의미만을 부여하며 그럭저럭 살다가 이 땅에서 사라져가기 마련입니다. 그러기에 국립현충원에 안장되거나 특별한 사회적 의전 절차도 없이 통상적인 장례 절차에 따라 삶을 마감하게 되는 것이지요.

얼마 전 화장이나 매장이란 절차가 2년 뒤로 미루어진, 통상적인 장례 절차가 없는 상가에 조문을 다녀왔습니다. 같은 직장에 근무한 동료이었기에 오랜 기간 흉허물 없이 교류를 해왔던 터였습니다. 그런 친구를 하늘나라로 보냈습니다.

그는 명예롭게 삶을 마감했습니다. 다름 아니라 시신기증입니다. 그는 생전에 시신을 기증하기로 서약했습니다. 그는 생전에 저에게 시신기증서를 보여주면서 자랑스럽게 이야기했습니다. 자신이 마지막으로 명예롭게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라고 말입니다.

공직자가 자기관리를 제대로 못해 질병으로 중도 퇴직하고 방안에 갇혀 어두움 속에서 세상을 살다가 가는 처지에 명예롭게 할 일이 무엇인가, 많은 생각을 했답니다. 그가 내린 결론은 자신과 같이 질병으로 고통 받는 사람이 줄어들도록 의학 연구를 위해 자신의 시신을 의과대학에 기증하기로 한 것입니다. 그는 이후 처자식을 설득해 서명을 받아냈습니다.

친구의 시신은 앞으로 2년간 의과대학 학생들의 해부학 교육용으로 활용하게 된답니다. 그러기에 누구나 치르게 되는 입관절차도 없이 영안실에 안치되었다가 시신을 기증한 의과대학으로 옮겨졌습니다.

의과대학에서 학생들과 함께 생활하다가 약정기간이 끝나는 2년 후에는 다시 가족에게 돌아온답니다. 그때 다시 의과대학이 주관하는 장례 절차에 따라 가족과 친지들이 참여한 가운데 화장한 다음 묘지를 만들거나 뿌려진답니다.

그는 슬하에 아들만 셋을 두었습니다. 첫째, 둘째가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현역 장교입니다. 셋째는 학군장교를 거쳐 건축사 자격으로 건축회사에서 근무하고 있습니다. 떠난 친구는 평소에 자신의 육체적 고통을 이해하고서도 잘 자라준 세 아들을 무척 자랑스러워했습니다. 삶의 질긴 연줄을 이어준 무한의 가치였습니다.

세 아들 모두 문무를 겸한 대한의 아들들이기에 아버지의 시신기증이란 고결한 정신을 받들어 일생의 표상으로 삼겠다는 효자들이었습니다. 며느리들이 시아버지의 시신을 어루만지며 슬퍼할 정도이니 평소의 다정다감을 알 수 있었습니다.

시신기증은 아무런 보상이 없는 순수한 헌신입니다. 그러기에 숭고한 결단이 필요하다 하겠습니다. 글을 쓰고 있는 저 자신은 그런 생각을 하지 못했습니다. 그러기에 온화하게 웃는 얼굴로 저에게 마지막 인사를 나누는 친구 앞에서 저는 많은 부끄러움을 느꼈습니다. 마주 볼 수 없을 정도로 눈시울이 젖어들어 자리를 뜨고 말았습니다.

그는 농촌지도공무원으로서 원숙하게 일할 나이인 50세에 당뇨병을 앓게 되었고, 그 후유증으로 시각장애가 생겨 직장을 다닐 수 없게 되었습니다. 세상을 떠날 때까지 앞을 보지 못하는 12여 년 동안 그에게 유일한 정보원은 라디오방송이었고, 오디오북이었습니다.

그는 생활의 대부분을 라디오를 들으며 지낸 처지였으므로, 저에게는 가장 빠른 정보원 역할을 했습니다. 나라 전체적으로 관심이 될만한 뉴스는 물론이거니와, 저가 근무하는 직장이나 농업, 농촌에 관한 뉴스가 라디오에서 나오면 가장 먼저 저에게 전화로 알려 왔습니다. 그러기에 저는 남들보다 한 발 앞선 정보를 가질 수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제가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아침마다 출연하는 KBS-1R <농사정보>의 충실한 모니터 요원이었습니다. 때로는 간밤의 피로를 제대로 씻어내지 못하고 방송하는 경우 탁한 목소리를 지적했습니다. 내용이 조금 까다로우면 부가적인 설명을 요구했고, 이튿날 추가적인 해설 방송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에겐 전화를 통해 주위 사람들과 대화하는 것이 큰 즐거움 중 하나였습니다. 저와는 거의 매일 한 번씩 통화했습니다. 이런 저런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그 친구가 주로 저에게 전화를 걸었고, 저는 가물에 콩 나듯 제 신상에 변화가 있을 때나 친구가 며칠간 연락이 없어 궁금할 때만 먼저 전화를 했습니다. 그 친구는 자신이 시간이 많으므로 먼저 전화한다 하였지만, 저는 항상 미안했습니다.

가끔 만나 함께 식사를 하며 마음에 쌓인 회포를 풀기도 했습니다만, 대개는 제가 대접받았습니다. 그는 저에게 대접하는 것에 나름의 의미를 부여하고 있었습니다. 오래전 그가 매우 어려운 인간적인 고뇌에 처해 있을 때 제가 그를 격려하며 대접한 밥 한 그릇에 대한 뜨거운 고마움을 간직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항상 갚음의 자세를 가진다면서 저의 밥값 지불을 완강히 거절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세상을 떠날 때를 알았는지... 경기 포천, 경북 포항 등에 각기 가정을 꾸리고 있는 아들들의 집에 며칠간 다녀왔습니다. 저와도 세상을 떠나기 이틀 전 통화하면서 “건강이 우선이므로 잘 챙기고, 지금까지 열심히 잘 해 왔지만 공직에서 물러날 그 날까지 최선을 다하라”고 충고했습니다.

평소에는 남편을 대신해서 생계를 꾸리는 부인에게 항상 들리는 라디오소리가 불편할 것이라며 다른 방을 사용하도록 요청했답니다. 그런데, 떠나기 이틀 전부터는 부인을 옆 자리에 눕도록 권유하고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답니다.

그리고, 마지막 날, 하늘나라로 간 날 아침에는 평소처럼 제 방송을 들을 시간인데도 아무런 기척이 없기에 부인이 흔들어 깨웠답니다. 아무런 반응이 없었답니다. 편안한 얼굴로 잠자듯이 누워 있었기에 미처 깨닫지 못했답니다. 놀란 가슴을 다스리고, 평소 진료하던 병원으로 연락을 취해 긴급 후송했으나 이미 숨을 거둔 상태였답니다.

그는 비록 떠났지만, 명예로운 삶의 마감이 어떤 것인가를 보여주었습니다. 통속적인 잣대로 보면 결코 성공했다거나 화려했다고는 할 수 없는 삶이라 할 수 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자식에게는 삶의 표상을 친구에게는 애틋한 정감을 남겼습니다.

그러기에 60여년의 길면 길고 짧다면 짧은 인생을 살다가 하늘나라로 간 친구의 명예로운 삶은 저의 가슴 속에 깊게 남겨지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축복하심이 그와 함께 하시기를 영전에서 기도드렸습니다.

덧붙이는 글 | 기자는 농촌진흥청 고객지원센터에 근무하고 있습니다. 매주 월요일부터 금요일 새벽 5시27분에서 30분까지 3분간 KBS-1R에서 진행하는 '뉴스와이더' 프로그램 중 현안 영농과제 중심의 내용을 담은 '농사정보'를 전화로 생방송하고 있습니다. 얼마전 세상을 떠난 친구는 저의 방송을 매일 아침 듣고서 모니터해 주기 위해 5시부터 저녁 잠들 때까지 라디오를 들었습니다. 그러기에 세상 정보에 매우 밝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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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다양성을 인정 할 수 있는 연륜의 지경에 이르렀다고 믿고 싶습니다. 나와 너의 다름을 인정할 때 서로간에 존중과 협력이 가능하리라 여깁니다. 세계의 평화로운 공존은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는 폭이 넓어질수록 가능하리라 여깁니다. 그 일을 위해 미력하나마 힘을 보태도록 노력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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