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평소 판판한 길이었던 곳, 물이 넘쳐 도랑이 되어버렸다.
평소 판판한 길이었던 곳, 물이 넘쳐 도랑이 되어버렸다. ⓒ 최성수
그런데, 양평에 이르자 시야를 가리는 거센 빗줄기가 쏟아진다. 비는 잠시 그쳤다가 언제 그랬느냐는 듯, 다시 마구 퍼붓는다. 옆으로 지나가는 차가 도로에 고인 물을 내 차로 튀길 때면 시야 확보가 안 돼 아찔하기도 하다. 조심조심 차를 몰아 횡성으로 들어서는데 양평에 비할 바가 아니게 비가 쏟아진다.

전재를 넘어 (강원도 횡성군) 안흥시장에 들러 이것저것 필요한 물건들을 산 뒤, 큰 길로 올라서는데, 차들이 잔뜩 밀려있다. 찐빵축제를 할 때도 이 정도로 밀리지는 않던 길인데 웬일일까? 의아해 하며 밀린 사이로 들어서 조금 가니, 안흥초등학교 앞 삼거리에서 경찰과 동네 주민들이 나와 교통정리를 하고 있다. 호각과 수신호로 차들을 둔내 방향으로 우회시키고 있다.

내 차례가 되어 직진을 하려고 하자, 경찰이 두 팔을 벌려 막는다.

"이 쪽으로는 못 갑니다. 둔내 쪽으로 가세요."
"집이 상안리인데요. 왜 무슨 일이 났나요?"


내 말에 경찰은 웃으며 대답한다.

"상안리는 가셔도 됩니다. 방림에 길이 끊겼거든요."

방림은 평창군에 속하는 곳이다. 안흥에서 문재를 넘으면 방림이다. 돌아가신 어머니 고향인 개수에서 흘러내린 물이 평창강과 합해지는 곳, 그래서 늘 물이 맑고 많기도 한 곳이다.

나는 그 맑은 물살을 떠올리며, 그저 도로가 유실됐나보다 하는 생각만 했을 뿐이다. 그런데 상안리로 가는 길에는 차가 한 대도 없고, 빗줄기만 도로 위로 쏟아졌다.

보리소골로 들어서면서, 혹시 길이 끊기지나 않았나 걱정을 했지만, 개울물은 평소 비가 좀 많이 왔을 때 정도의 수준이었다. 토관을 묻어놓은 작은 개울에도 물이 조금 거세게 흐를 뿐, 별 문제는 없어 보였다.

집에 도착해 짐을 정리하고, 밭에 나가 고추도 따고 감자도 조금 캤다. 호박과 오이도 따 자연식으로 차린 저녁을 먹을 때만 해도 아무 문제가 없었다.

"빗소리 참 듣기 좋네. 개울 물소리와 어울리니 더 좋아."

내 말에 아내와 늦둥이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내 말을 비웃기라도 하듯, 저녁을 먹고 나자 갑자기 억수같이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잠시도 쉴 틈 없이 쏟아지는 빗소리는 좋은 것이 아니라 무서웠다. 캄캄한 어둠 속에서 빗줄기는 마치 퍼다붓듯 쏟아졌다.

비만 오는 것이 아니었다. 몇 초 간격으로 번개가 번쩍이고, 우레 소리가 골짜기를 찢듯이 울렸다. 번개가 칠 때마다 창밖으로 얼핏 드러났다 사라지는 어둠 속의 풍경은 지금까지 보아온 보리소골이 아니라 어디 아주 낯선 곳 같았다.

어둠 속의 빗소리, 천둥에 번개... 전기도 나갔다

뉴스라도 들을 양으로 텔레비전을 켜자, 그 순간 또 번개가 번쩍 했다. 그리고 텔레비전에서 피시식 소리가 나더니, 화면이 꺼져버렸다. 전원을 다시 꽂고 켜봤지만, 아예 작동도 하지 않았다. 영영 망가져 버린 것이다. 비는 그칠 줄 모르고 내리고, 마음은 괜히 심란해진다.

불을 끄고 얼핏 한 잠 들고 났는데, 여전히 창 밖에서는 빗줄기가 퍼붓고 있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 전기로 연결된 시계만이 반짝반짝 빛나고 있다. 시간은 열 두 시. 화장실에 다녀와 다시 자리에 누워 시계를 쳐다보고 있는데, 갑자기 시계의 불빛이 사라져버렸다.

벌떡 일어나 보일러 계기판을 보니, 거기에도 불이 들어와 있지 않다. 번개가 치면 가끔 자동 차단기가 내려가기 때문에 얼른 랜턴을 찾아 차단기를 살펴보니, 차단기는 내려가 있지 않았다. 그렇다면 집 안에서의 문제가 아니라 집 밖의 전기에 문제가 생긴 것이리라.

혹시 벼락이 변압기를 때린 것은 아닐까? 영영 불이 들어오지 않으면, 냉장고는 또 어쩐담? 아니 냉장고가 문제가 아니지. 지하수를 끌어올려 쓰는 물도 못쓰게 될 테고, 그럼 당장 먹을 물도 없게 되는데, 어쩐담? 이런저런 걱정을 부채질이라도 하는 듯, 빗줄기는 점점 거세진다. 캄캄한 어둠 속에 빗소리만 더 크게 울린다.

[둘째날] 넘실넘실 물살, 오들오들 떨린다

무너져 내린 집 뒤 언덕. 물은 제 앞을 가로막는 것이면 다 무너뜨린다.
무너져 내린 집 뒤 언덕. 물은 제 앞을 가로막는 것이면 다 무너뜨린다. ⓒ 최성수
윗 골짜기에서 산사태가 났는지, 물이 온통 흙빛이다.
윗 골짜기에서 산사태가 났는지, 물이 온통 흙빛이다. ⓒ 최성수
아무리 비가 쏟아져도 아침은 밝는 법인지, 어느새 창밖이 희끄무레 해진다. 나는 얼른 장화를 신고, 우비를 입고 집 밖으로 나가본다.

먼저 개울가로 가본다. 개울물이 넘실넘실 흘러가고 있다. 물살을 바라보니 절로 무서워진다. 몸이 오들오들 떨린다. 사람 키 높이보다도 더 크게 자라있던 갈대들은 물살에 쓸려 길게 가로 누웠는데, 금방이라도 뿌리째 뽑힐 것처럼 흔들리고 있다. 도라지밭 건너가는 길로 가 보니, 길 위로 온통 물이 흘러가고 있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몇해 전 태풍으로 큰물이 났을 때 밭이 떠내려갔던 곳은 돌로 복구를 해놓아서인지, 아무렇지도 않다.

쏟아지는 빗줄기 속에서 아무 할 일도 없는 우리 부부와 늦둥이는 그저 그날 하루 종일 하늘만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도대체 언제 이 비가 그칠까? 그런 걱정을 하는 사이에도 비는 쉬지 않고 내린다.

오후, 몇몇 아는 사람들이 전화를 걸어왔다. 횡성에 300mm가 넘는 비가 왔다는데 괜찮냐는 걱정이었다. 그제야 우리는 전국에서 가장 많은 비가 이곳에 내리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몇mm로 계산될 수 없이, 그저 마구 퍼붓는 비를 바라볼 수밖에 없는 속수무책의 시간이 이어졌다. 집 뒤 언덕에 조그만 사태가 난 것도 그날 오후였다. 개나리를 심은 언덕 아랫부분의 흙이 무너져 미나리밭으로 떨어졌다. 나는 그저 물길을 내줄 뿐, 떨어진 흙을 어쩔 수조차 없었다.

결국 산사태, 개울물은 검은색으로 바뀌고

오후 2~3시쯤 되자, 갑자기 개울물이 검은 색으로 바뀌었다. 골짜기 위에서 산사태가 난 것이 분명했다. 집 위쪽 골짜기로 급히 올라가 개울물을 살펴본다. 흙과 나무와 풀이 뒤섞여 떠내려 온다. 콸콸대고 으르렁대며, 마치 성난 사자나 호랑이처럼 물은 골짜기를 할퀴고 있다. 흐르는 물속에서 꽝꽝대는 소리도 들린다. 큰 바위들이 물살에 휩쓸려 서로 부딪치며 내는 소리다. 머리칼이 쭈뼛 선다.

세상에 무서운 것이 물과 불인데, 불보다는 물이 훨씬 더 무섭다더니, 그 말이 사실인가 보다. 불탄 자리는 재라도 남지만, 물지난 자리는 아무 것도 건질 것이 없다. 저 험한 물살에 제 형체를 보전할 것이 과연 무엇이란 말인가?

저녁 무렵이 되자 비가 조금 덜 내리기 시작한다. 덜 내리는 비라도 평소보다는 훨씬 많다. 개울가로 나가 보니 물이 많이 줄었다. 쏟아붓지 않으니 유입량이 줄고, 유입량이 줄자 물은 급속도로 빠지기 시작한다. 집으로 들어오는 토관을 묻은 곳으로 가보니, 물은 많이 빠졌지만, 흙에 덮여있던 토관이 다 드러나고, 토관 옆으로 물이 흙을 다 파가버려 길은 뚝 끊겨버렸다. 꼼짝없이 갇혀버린 셈이다.

"길이 망가져서 내일 올라갈 수 없을 것 같은데. 진형이 너 아무래도 결석을 해야 될 것 같다."

내 말에 진형이 녀석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린다.

"아직 한 번도 결석 안 했는데."

나는 방학을 했지만 늦둥이는 아직 며칠 더 나가야 방학이다. 하지만, 길이 끊겨 나갈 방법이 없으니, 내일 중으로 길이 복구되지 않으면 결석을 할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비는 이제 조금 가늘어졌지만, 그래도 여전히 쉴 기미가 없다. 둘째날 밤도 그렇게 비는 쉬지 않고 내렸다.

[셋째날] 비가 가늘어졌지만 그치지는 않았다

빗줄기 속에서 포클레인이 길을 새로 만들고 있다. 그 새 길을 따라 우리는 사흘간의 고립에서 벗어났다.
빗줄기 속에서 포클레인이 길을 새로 만들고 있다. 그 새 길을 따라 우리는 사흘간의 고립에서 벗어났다. ⓒ 최성수
폭우에 도로 곳곳이 유실된 한계령 구간이 만신창이가 돼 있다.
폭우에 도로 곳곳이 유실된 한계령 구간이 만신창이가 돼 있다. ⓒ 연합뉴스 이종건
셋째날 아침, 많이 가늘어진 빗줄기를 뚫고 다시 토관묻은 곳으로 가보니, 이제 물은 토관으로만 흐를 뿐이다. 그래도 차는 도저히 나갈 수가 없게 개울이 푹 파여 있다.

여기저기 전화를 해보니, 고속버스나 시외버스는 운행을 한단다.

"버스라도 타고 서울에 갈래? 학교에 가려면 버스를 타고 올라가는 수밖에 없다."

내 말에 진형이 녀석이 고개를 끄덕인다. 천재지변이니 결석을 해도 결석 처리는 안 되겠지만, 그래도 녀석은 마음이 좀 찝찝한가 보다. 차는 두고, 간단한 짐만 챙긴 후, 여전히 빗방울이 그치지 않는 길을 나섰다.

신발을 다 적시며 숲길을 걸어 내려오다, 녀석은 산딸기를 보더니 신이 나서 따먹기도 하고, 빗속에 떨고 있는 패랭이꽃 구경도 한다. 갈대숲 사이로 피어있는 나리꽃을 툭 쳐보기도 하며 보리소골 초입까지 나오자, 포클레인이 작업을 하고 있다. 이장을 맡고 있는 친척 동생이 포클레인 옆에 서 있다.

"두어 시간이면 길이 다 복구 될 거예요. 길 다 고쳐지면 차몰고 가세요. 군데군데 국도가 끊겼다는데, 버스로 얼마나 걸릴지 모르잖아요."

이장은 어제 이 지역을 고립지역으로 면에 신고해 놓았다며, 그래서 아침 일찍 장비로 길을 복구하는 중이라고 했다. 면 직원도 나와 일을 독려하고 있다. 갇힌 사람 하나라도 피해가 없도록 밤새 계획을 짜고 도움의 손길을 주는 사람들 덕분에 물난리 속에서도 삶을 다시 꾸려갈 수 있는 것이라는 생각에 고마운 마음이 절로 든다.

정말 두어 시간 뒤, 임시방편이긴 하지만, 어지간히 길이 복구되었다. 끊어졌던 길도 포클레인이 몇 번 흙을 퍼 담아 메워 놓자 차가 겨우 건널 정도는 되었다.

포클레인의 뒤를 따라 우리는 천천히 차를 몰아 보리소골을 빠져나왔다. 고립된 지 사흘 만이었다. 나오는 길, 많이 약해졌지만, 비가 내린다. 성난 짐승처럼 무섭게 울부짖던 물살도 언제 그랬느냐는 듯, 시원스레 풀숲을 흘러간다.

우리에게 길을 만들어준 포클레인 기사와 이장, 면 직원은 또다른 곳에 복구 작업을 하러 가야 한다며 바삐 떠난다. 그 뒤에 대고 나는 그저 고맙다는 말밖에 더 할 말이 없다.

거대한 자연 재해 앞에 선 인간은 얼마나 나약한가

밀림의 숲을 마구 베어버리고 온갖 문명의 기기를 위해 환경을 파괴하는 인간의 행위들이 결국 폭우와 같은 자연재해를 불러오게 되었다는 주장이 있다. 그 주장의 옳고 그름을 따지기에 앞서, 거대한 자연 재해 앞에 선 인간은 얼마나 나약하고 무기력한 존재인가를 새삼 깨닫게 된 사흘간이었다.

골짜기를 벗어나며 나는 사방을 둘러본다. 자욱하게 안개가 낀 산과 키를 가릴 정도로 자란 갈대들, 윤기나는 잎을 뽐내는 뽕나무들, 빗줄기 속에서도 싱싱하게 빛나는 온갖 꽃들과 시원스레 소리를 내며 흐르는 개울물. 아, 제 숨결을 찾은 자연은 얼마나 가슴뛰게 아름다운가!

나는 그 풍경을 바라보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래도 물은 무섭다."

끊어진 길. 물은 많이 빠지고, 상처만 남았다.
끊어진 길. 물은 많이 빠지고, 상처만 남았다. ⓒ 최성수

덧붙이는 글 | 이 글을 비롯한 제 모든 글은 제가 운영하는 카페 http://cafe.naver.com/borisogol.cafe에서도 보실 수있습니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시집 <장다리꽃같은 우리 아이들>, <작은 바람 하나로 시작된 우리 랑은>, <천년 전 같은 하루>, <꽃,꽃잎>, <물골, 그 집>, <람풍>등의 시집과 <비에 젖은 종이 비행기>, <꽃비> , <무지개 너머 1,230마일> 등의 소설, 여행기 <구름의 성, 운남>, <일생에 한 번은 몽골을 만나라> 등의 책을 냈습니다.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