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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로 가던 버스 안에서 고양시 벽제를 지나는 도중 창문을 열고 곡릉천을 찍었다. 세차게 넘실거리며 흐른 흙탕물이 건너편 제방 끝에 거의 육박했다.
서울로 가던 버스 안에서 고양시 벽제를 지나는 도중 창문을 열고 곡릉천을 찍었다. 세차게 넘실거리며 흐른 흙탕물이 건너편 제방 끝에 거의 육박했다. ⓒ 한성희
곡릉천 흙탕물은 제방까지 찰랑거리며 널름대는 악마의 거대한 혓바닥처럼 위협하고 있었다. 우산을 쓰고 나온 시민들이 몇몇씩 여기저기 서서 무섭게 쓸려오는 흙탕물을 근심스런 얼굴로 바라보고 있었다.

12일 오후 3시경, 서울로 가는 버스 안에서 걱정스럽게 불어나는 물을 내려다보다가 이날 만난 농협 모 전무가 조바심내며 걱정하던 일이 생각났다. "이젠 비가 그쳐야지. 큰일이야, 큰일."

지겹고도 두려웠던 수해의 추억

파주시는 1996년 대홍수를 겪었다. 1998년과 1999년에도 연거푸 엄청난 수해를 입었다. 1998년 8월 6일 수해 당시 내가 살고 있던 파주시 조리읍 봉일천은 읍 전체가 물에 잠겼다. 크나큰 피해가 발생했던 문산의 대홍수는 아직도 사람들 기억에서 지워지지 않았으리라.

1998년 8월 6일 곡릉천 제방이 터지며 조리읍 봉일천 전 시내가 물에 잠겼다.
1998년 8월 6일 곡릉천 제방이 터지며 조리읍 봉일천 전 시내가 물에 잠겼다. ⓒ 파주시청
당시 통일로가 끊겨 파주로 들어올 수 없었던 취재진들은 헬기를 동원해 물에 잠긴 봉일천 시내를 사진으로 찍었다. 이튿날 각 조간 신문들은 1면 중 절반을 차지하는 대형 사진을 게재하고 파주의 대홍수를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물론 며칠 지난 후에야 그 신문을 볼 수 있었지만.

파주의 대홍수는 외신을 타고 전 세계로 타전됐다. 미국에 사는 언니가 뉴스를 보고 놀라서 전화를 걸어왔으니 어느 규모였는지 짐작갈 것이다. 파주시가 이렇게 크게 보도되고 알려지긴 역사상 처음일 텐데 하필이면 홍수 때문이라니. 나중에 동생에게서 언니 이야기를 전해 듣고 씁쓸했던 기억이 난다.

전기는 물론 수도, 전화마저 끊겼으니 내 걱정에 애를 태우던 언니와 지인들은 전화가 연결되자마자 사방에서 소식을 물어왔다. 전화통이 불이 날 지경이었다. 그 전화기마저도 파주시 상점이 모두 물에 잠기는 바람에 인근 고양시에 가서 사왔다.

"내 80평생 살도록 이런 물난리는 들어보지도 못했어!" 한 노인이 몸서리를 치며 이렇게 말했다. 나 역시 그 수재민 속에 들어 있었다. 당시 난 그날 새벽 곡릉천 둑이 터지면서 집안으로 밀려들어온 물살을 헤치며 식구들을 이끌고 탈출했다. 집은 꼬박 하루 동안 흙탕물에 잠겼다.

1998년 수해 당시 곡릉천 제방이 터진 모습. 차가 지나가는 봉일천교 밑으로 흙탕물이 흐른다. 수해를 입은 날, 사진 오른쪽에 있는 아파트에 사는 동생 집에서 이 사진을 촬영했다.
1998년 수해 당시 곡릉천 제방이 터진 모습. 차가 지나가는 봉일천교 밑으로 흙탕물이 흐른다. 수해를 입은 날, 사진 오른쪽에 있는 아파트에 사는 동생 집에서 이 사진을 촬영했다. ⓒ 한성희
그 이후 상황은 더 말하고 싶지도 않다. 봉일천 시내에서 만난 사람들의 얼굴은 집단 최면에 걸린 듯 모두 넋이 나가 얼이 빠진 모습이었다. 높은 지대에 있어 홍수를 피한 사람들은 몸살을 앓으면서도, 수해를 당한 이웃집의 복구를 도와주러 다녔다.

산더미 같은 쓰레기, 질퍽한 거리의 퀴퀴한 냄새, 전기가 끊겨 밤이면 적막과 어둠에 잠겼던 죽음의 도시와 흡사했던 풍경, 넋이 나가 말이 없던 주민들의 모습이 기억에 남는다.

파주시는 3300억원의 수해예방 예산을 들여 각 지역 하천 제방을 높이고, 대형배수펌프장을 설치했으며, 제방보다 낮은 지대에 흙을 부어 제방보다 더 높게 만들었다.

그 결과, 약 1400mm나 내린 2003년 집중호우 때도 피해액은 6억원에 그쳤다. 예전에 홍수 때마다 수백억원씩 피해를 입었던 전례를 보면 대단한 수해방지 효과라 할 수 있다.

파주시의 수해방지 성공사례와 수해복구 경험으로 쌓은 경험은 다른 시·도에서 벤치마킹할 정도다. 그렇지만 홍수를 몇 번 겪고 놀란 가슴은 비가 많이 내리기만 해도 덜컥 내려앉는 법. 그 기막혔던 홍수의 기억은 뇌리에서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다.

2003년 당시 난 장대비가 쏟아졌을 때 은행에 들렀다. 은행 직원들은 사무집기들을 모두 싸놓고 여차하면 옮길 준비를 하고 있었다. 지점장은 당시 초조한 얼굴로 내게 물었다. "둑이 지금 어떻대요? 괜찮대요?"

곡릉천을 둘러보고 온 내가 아직은 괜찮을 거라 해도 지점장은 "지금 아예 옮길까 말까"하며 안절부절 못하고 서성거렸다. 은행뿐 아니라 다른 상점이나 관공서도 마찬가지로 긴장태세에 들어갔고, 자동차가 물에 잠겼던 사람들은 일찌감치 높은 언덕에 있는 중학교 운동장으로 차를 옮겨놓기도 했다. 당시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비만 오면 가슴이 덜컥!

12일 서울에 도착해 일을 보면서도 곡릉천 흙탕물이 눈에 어른거렸고 창밖의 세찬 빗줄기에 마음이 불안해 전화를 걸기 시작했다. 우선 곡릉천 근처에 사는 친구에게 전화했다.

"거기 곡릉천 지금 어때?"
"걱정이야. 둑 위쪽에서 찰랑찰랑할 정도야. 동네 앞 장지천 제방을 높였는데 그게 터질까봐 지금 걱정이다. 제방이 마을보다 높은데 터지면 다 잠길 거야."
"그럼 정말 큰일이네. 그렇지만 그거, 새로 쌓은 지 얼마 안 되니까 쉽게 무너지진 않을 거야. 지금도 비가 계속 많이 오니?"
"다행히 비는 조금씩 내리다 그치다 해."
"비만 그치면 서너 시간이면 물 빠져나갈 거야. 무슨 소식 있으면 연락 줘."
"그래."

곡릉천은 고양시 벽제를 거쳐 통일로변을 끼고 흐르다 파주시에 오면 하류가 되어 넓어진다. 이 곡릉천 냇물은 봉일천과 교하읍을 거친 뒤, 한강 하류와 합쳐져 황해로 흘러 들어간다.

1999년 파주시 문산읍 대홍수에 문산천이 범람해 물에 잠긴 모습.
1999년 파주시 문산읍 대홍수에 문산천이 범람해 물에 잠긴 모습. ⓒ 파주시청
다시 파주시청에 근무하는 후배 공무원에게 전화를 걸었다. 파주로 돌아가 수해현장으로 취재하러 달려가야 할지도 몰랐고 문산이 걱정되기도 했기에 파주시 전체 상황을 알아보려 한 것이다.

"상황이 지금 어때요?"
"아슬아슬했는데 다행히 위기는 넘긴 것 같아요. 조리읍과 광탄면에 비가 제일 많이 내렸어요."
"아직 수해 피해 동향 보고 들어온 건 없지요?"
"아직은 없어요."

이날 오후 5시에 봉일천교 수위 4.95m까지 올라갔고 위험수위 5.96m에 1m를 남겨두고 있어 곡릉천은 범람 위기에 놓였으나 비가 그치고 있어 물이 빠지고 있는 중이란다. 다행이다 싶어 안도의 한숨이 다 나왔다. 수해방지책 덕분에 문산 홍수는 1999년을 마지막으로 악몽의 막을 내리긴 했다.

1999년 문산 홍수 당시 군 장병이 고립된 주민을 구출하는 모습. 이곳은 문산 중심가로 들어가는 언덕 쪽이고 시내 한복판은 2, 3층까지 물에 잠겼다.
1999년 문산 홍수 당시 군 장병이 고립된 주민을 구출하는 모습. 이곳은 문산 중심가로 들어가는 언덕 쪽이고 시내 한복판은 2, 3층까지 물에 잠겼다. ⓒ 파주시청

"그럼 문산과 적성 쪽은 괜찮은 거네요?"
"그쪽이 제일 걱정이었는데 비가 적게 왔어요."
"그러게…. 임진강 범람하면 큰일이죠. (중략) 지금 비상대기 중인가요? 퇴근시간 지났는데."
"네, 오늘은 밤새 비상근무죠."
"그럼 무슨 일 생기면 연락 줘요."
"그럼요."

저녁 7시, 전화를 마치자 조금 마음이 진정됐고 다시 일에 집중할 수 있었다. 해마다 곳곳에서 수해가 나면, 물난리를 진절머리 나게 겪은 파주 시민들은 남의 일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수해를 입었다는 뉴스를 볼 때마다 '저걸 어쩌나' 싶어 마음이 아프다.

수마가 할퀸 상처는 깊으며, 당한 사람에게 그 아픔은 오래오래 남는다. 이 여름, 이 비를 마지막으로 더 이상 수해소식을 듣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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