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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웅진지식하우스
그의 이름은 치바, 직업은 사신이다. 정해진 인간이 죽기 일주일 전부터 관찰을 해서 죽어도 좋을지를 판단한다. 저승사자보다 하는 일은 많은데 물론 저승사자처럼 감정이라고는 전혀 없다. 또한 인간을 특별히 좋아하는 것도 아닌 탓에 그는 거의 대부분 ‘죽어도 좋다’고 판단한다.

사신이 나타나서 죽어도 좋다고 판정을 내린다면 지켜보는 사람은 허무할 수밖에 없다. 굳이 사신이 찾아와서 관찰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사신은 꼭 필요하다. 사신이 온다면 최소한 일주일 동안은 죽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비록 인간은 그 사실을 모를지라도 사신 덕분에 일주일 동안 평소에 주저하던 것들 혹은 갈등하던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다. 긴 생보다 아름다운 단 하루를 보낼 수 있는 것이다.

이사카 코타로의 <사신 치바>는 독특한 매력으로 똘똘 뭉친 작품이다. 매력의 첫 번째는 주인공 치바의 독특한 성격에서 생겨난다. ‘인간이 다 죽어도 상관없지만 그렇게 되면 음악을 만들 수 없으니 죽으면 안된다’고 하는 치바는 사신이면서도 음악을 광신적으로 좋아한다. 락이든 발라드든 상관없다. 그래서 볼일이 없을 때는 음반 매장에서 죽치고 있다.

치바는 음악을 좋아하는 만큼 인간에게는 무관심한데 이러한 사실이 <사신 치바>에 미묘한 재미를 준다. 치바는 인간에게 무관심한 만큼 아는 것이 없다. 그래서 인간과 대화하면 꼭 빗나간다. 가령 죽기 전 날 누군가 최고급 스테이크를 먹고 싶다고 하면 사준다. 그러면서 묻는다. 소를 죽여서 먹는 것이 맛있냐고.

대화는 대부분 엉뚱하다. 하지만 그런 엉뚱함은 미묘한 사실을 알려준다. 바로 인간이 아닌 존재로부터 ‘인간의 특성’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꽤나 흥미롭다. 무서울수록 소리치는 이중적인 모습, 좋아하는 사람을 위해 죽을 각오를 하는 무모한 행동, 무엇이든 인생과 연관시켜 말하려는 속성 등 치바가 의아한 표정으로 지적하는 것들을 듣는 재미가 꽤나 쏠쏠하다.

<사신 치바>의 두 번째 매력은 치바의 보이지 않는 도움을 받은 인간이 생의 마지막 순간을 아름답게 장식한다는 것에서 비롯된다. 인간은 후회 없는 삶을 살고 싶어한다. 하지만 미래를 위해 현재를 저축한다. 언제 죽을지 모르면서도 훗날을 대비한다는 것이다. 인간의 이런 모습은 치바의 눈으로 보면 어리석기 그지없다. 일주일 후에 죽을 것이 뻔한데 일년 뒤를 계획하고 있으니 얼마나 가소로울까.

치바는 죽을 것이라고는 말해 주지 않는다. 대신에 따라 다닌다. 행동을 관찰할 의무 때문인데 그 과정에서 인간에게 보이지 않는 도움을 준다. 물론 의도하지 않은 것이다. 하지만 누군가가 짝사랑하는 사람에게 나중에 고백하겠다고 결심한다면 치바는 지금 하라고 암시한다. 또한 아들이 나중에 돈벌어 효도하겠다며 직장에서 야근하면서 돈 버는데 급급하고 있다면 치바는 지금 집에 가서 어머니 곁에 있으라고 충고한다. 특별한 이유는 아니다. 은연중에 내일 죽을 수도 있다는 것을 알려줄 뿐이다.

그런데 치바와 대화를 나눈 사람들, 특히 충고 아닌 충고를 받은 사람들의 마음은 급선회 한다. 일종의 깨달음이다. ‘내일 죽을 수도 있는데 오늘 하루 쓸모 없는 일이나 하고 있구나’하는 생각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래서 내일 죽을지 모르더라도 당장 오늘 하루에 하고 싶었던 일을 한다. 그럼으로써 생의 마지막을 아름답게 장식한다. 비록 그것이 남들 눈에는 대단한 것이 아닐지라도 개인에게는 가장 소중한 일이기에 그 모습은 찬란하기만 하다.

죽음을 다루고 있음에도 <사신 치바>는 가볍다. 코믹한 대화들이나 만화에서나 나옴직한 인물들이 나와 벌이는 소동은 전혀 무겁지 않다. 왜일까? 가벼움은 겉포장에 불과하기 때문이 아닐까? 실제로 <사신 치바>의 속내를 열어보면 보람된 삶을 사는 것이 무엇인지가 담겨 있다.

더욱이 인간이 아닌 사신의 눈을 통해서, 즉 외부의 시선으로 그것을 보게 만들어 주기에 그 이야기는 더욱 설득력 있게 다가온다. 그런 의미에서 ‘가볍다’는 수식어는 ‘쿨하다’는 말로 바꿀 수 있다. 너무 쿨해서 인생까지 시원하게 위로해주는 <사신 치바>, 삶에 의욕을 한 뼘 이상 높여준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알라딘 개인블로그에도 게재했습니다.


사신 치바 (양장)

이사카 고타로 지음, 김소영 옮김, 웅진지식하우스(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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