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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개 단체 정읍 농악단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 이용찬
지난 7월 3일, 정읍의 6개 단체 정읍농악단의 화합 한마당이 민선4기 강광 시장 취임식 식전행사인 길 굿으로 정읍시청 앞마당에서 100여명의 예인들이 참가한 가운데 화려하게 치러졌다.

이제는 화려했던 정읍농악의 전성기 농악은 찾아보기조차 힘들어졌다. 호남우도 정읍농악의 오늘 날 현실은 고목(古木) 그 자체다. 최근의 정읍농악에서는 과거의 화려했던 전성기의 연회형의 굿판은 찾아보기 힘들다. 하지만 호남우도 정읍농악으로 귀결되는 정읍의 독특한 농악 장르는 연희농악 형태의 농악으로 시대의 격동기를 거치며 뚜렷한 변천사를 통해 나타내는 특징들이 있다.

정읍농악은 1890년대인 구한말의 시대적 격동기를 거치며 예전의 농사를 짓기 위해 쓰이던 노작농악에서 동학농민혁명군을 지원하는 세 과시 형태로 군악으로 더 다듬어졌다. 이어 동학농민혁명이 실패한 후에는 1920년대 정읍의 입암 지역에서 번성했던 보천교의 종교음악으로 쓰이며 연희 형태의 농악으로 발전하게 되는 뚜렷한 변천사를 거쳐 정읍 굿이라는 독특한 장르를 만들어 후대에 전했다.

앞서 정읍농악을 이끌던 선대 선인 예인들을 통해 기라성 같은 역량을 전수받았던 후대 김광래, 박남식, 신두옥, 전사섭, 전사종, 김홍집, 김병섭, 이봉문, 이영식 등의 예인들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을 경축하기 위해 첫 서울 나들이를 하게 된다.

1948년, 서울 창경원에서 열렸던 제1회 전국농악경연대회에서 가인전목단무(佳人剪牧丹舞)라는 연회(宴會)형 창작 농악작품으로 참가해 당당히 대상인 최우수상을 수상해 첫 대통령상의 영애를 차지했다.

이어 정읍농악단은 전북대표단으로 각종 농악경연대회에 출전해 수차례의 수상을 거머쥐며 국립국악원 등지에서도 공연을 벌였지만 근대화시기로 접어들던 1970년대부터 개발의 논리에 밀려 그 빛이 퇴색되게 된다.

호남우도 정읍농악이 화려한 전성기를 뒤로하고 하향기를 걷기 시작한 것은 1970년 전, 후부터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의 경제개발 5개년 계획에 따라 추진됐던 새마을사업은 36년 동안의 일제치하 강점기보다 더욱 정읍의 농악판을 피폐하게 했다.

초가집 지붕이 슬레이트 지붕으로 개량되던 시기이던 1960년대 후반부터 1970년대 초 무렵, 정읍의 연예농악단의 기라성 같은 인재들이 생계를 위해 정읍을 등지고 떠나게 되자 정읍농악의 판도는 급격한 공동화 현상에 직면하게 된다.

근대화시기인 제3공화국의 박정희 대통령이 갈라놓았던 콘크리트와 아스팔트길로 나뉘는 행정의 갈림길은 오늘날 호남우도 정읍농악단을 각기 다른 객체로 이완되게 하는 계기로 작용되게 했으며 뿐만 아니라 오늘날 호남우도 정읍농악의 전체적인 위상이 무너지는 시기였다.

이러한 시련은 1980년 초반, 정읍농악을 국가지정 중요 무형문화재로 지정하려 했던 일부 정읍 농악 인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호남우도농악의 국가지정 무형문화재 지정은 현재의 익산인 1983년 당시 이리 우도농악으로 지정되게 하는 불운을 맞게 된다.

구한말 호남우도농악으로 대변되는 정읍농악은 행정구역 개편 이전의 고부군 지역으로 기라성 같았던 농악 예능인들은 대부분 이 지역들에서 농사를 짓고 살았던 농투성이들이었다.

1905년 일부 매국노들과 일본 제국주의자들에 의해 한일합방이 된 후 일제는 우리문화 말살정책의 일환으로 산맥을 통해 교류되던 민족적 정서를 그들 편의상의 관리 기준으로 묶어 1914년 행정구역을 개편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일제가 갈라놓았던 행정구역은 농악단을 갈라놓지 못했다. 한국지명 총람의 기록에 따르면 과거 고부군의 행정영역은 지금의 김제 금산사 입구부터 부안의 3/2와 고창군의 3/2 지역인 아산면에 이르기까지 광활했던 지역으로 알려져 있다.

일제의 민족말살 정책에 의해 갈라졌던 행정구역 개편은 정읍의 농악인 들에게 처음으로 닥친 위기였지만 초기 일제의 행정구역개편이 기존의 정읍 예인들을 갈라놓지는 못했다. 동일문화권이 일제에 의해 각기 다른 행정구역으로 나뉘었지만 정읍의 예인들은 그런 행정의 갈림길들을 초월해 넘나들었다.

▲ 참가 단체별로 내세운 깃발은 달랐지만 마음은 하나.
ⓒ 이용찬
그 예가 정읍농악단의 단원이던 부안의 김바우와 그의 아들 김대근으로 이어지는 계보가 정읍 영원의 이명식에게 장구 연주의 기능을 전수 했는가 하면, 정읍 농악단을 이끌던 김광래의 사부가 현재의 김제 모래실 지역 출신인 김도삼 명인으로 장구 연주계승이 현재 기준의 지역이 아닌 옛 고부 문화권역으로 귀결되게 하는 대표적인 예로 증명되고 있다.

또한 고창의 신두옥과 김상구, 황규언씨로 이어지는 명인들 역시 정읍농악단 소속으로 1970년대 이후부터 해당 지역인 고창에서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형태다.

우리나라 1970~1980년대로 이어지는 군부독재 정치는 경제개발과 국가안보라는 미명아래 전통문화에 대한 관심을 현저하게 멀어지게 했을 뿐만 아니라 특정 분야에 따라서는 이제는 그 자취조차 찾아보기 힘든 문화의 단절을 가져왔다.

당시의 이러한 시대흐름은 정읍농악 예인들이 급속하게 정읍을 떠나게 하는 계기로 작용했다. 하지만 1965년 이후부터 정읍의 예인들이 떠나자 과거부터 같은 우도농악의 계보를 잇던 주변의 우도농악단들은 미력하나마 나름의 번성 시대를 맞았다.

그동안 정읍농악단의 그늘에 가려있던 인근지역 삼례와 고산의 강수병과 이인수씨, 부안의 나금추, 이동원씨 등의 활동이 나름대로 왕성했었으며, 바로 이들이 1983년 이리의 호남우도농악을 국가지정 중요 무형문화재로 지정하게 하는데 힘을 보태게 된다.

당시 이리농악단은 박성철, 유신욱씨 등이 이리농악단을 이끌고 있었지만 이리농악단 역시 호남우도농악을 대표로 하는 국가지정 문화재로 지정받게 하기에는 그 역량이 부족한 상태였다.

하지만 때를 함께해 인근 삼례와 고산, 부안의 예인들이 이리 농악단에 합류되어 우도농악을 계승하게 되자 당시 정부가 추진했던 국가지정 중요 무형문화재 선정에 호남우도농악으로 이리농악이 국가지정 중요 무형문화재로 지정되는 행운을 맞아 오늘에 이르고 있다.

오늘날 정읍의 많은 사람들이 과거의 화려했던 정읍농악의 전성기를 꿈꾸며 새로운 정읍농악을 시도했지만 이미 흩어져 버린 마음들을 추슬러 가기 힘들었던 관계로 서로간의 반목과 갈등이 심화되어 있는 상태다.

▲ 화합 한마당을 연출했던 정읍사예술회관 하남기 관장.
ⓒ 정읍사예술회관
그런데 최근 이런 흩어져 버린 예인들의 마음을 추슬러 옛 정읍농악의 화려한 부활을 꿈꾸는 일련의 일들이 현실로 나타나고 있다. 정읍사 예술회관 하남기 관장이 호남우도 농악의 화려한 부활을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다. 그동안 하 관장이 노력했던 그 첫 작품이 지난 7월 3일, 5.31 선거 당선자인 강광 시장의 취임식 식전행사에서 나타났다.

정읍사 예술회관 관계자에 따르면 하 관장의 노력은 “지난 1월, 정읍시와 전북대 인문학연구소가 주관하고 국문학과 김익두 교수가 주도해 발행했던 ‘호남우도 정읍농악’을 접하고 화려했던 정읍농악의 전성기에 비해 명맥을 잇지 못하고 반목하는 정읍의 농악단을 하나로 규합하고자 하는 하 관장의 소망 때문이다”라고 전한 바 있다.

이러한 움직임이 과거 일제가 갈라놓았던 행적구역과 현시대 아스팔트로 문화로 대변되는 각 읍, 면, 동으로 나뉜 행정의 경계를 넘어 정읍만의 독특한 화합한마당을 연출해 갈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하지만 하 관장의 노력만큼 정읍 농악인들 모두가 공감하고 만들어 가는 문화인들 전체의 문제라는 공동의 문제의식을 느낄 때 다시금 정읍농악은 과거의 화려한 전성기와 같은 푸지고 멋진 창작 연회형의 굿판을 만들 수 있게 될 것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서남권 밝은신문 전북투데이에도 함께 송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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