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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쌀이 이렇게 가득입니다.
ⓒ 이갑순
2주전쯤 엄마에게서 전화가 왔습니다. 엄마는 쌀이 떨어지지 않았냐고 물었습니다. 지난 해 가을걷이가 끝나고 쌀을 받은 후 쌀을 보내 달라고 하지 않으니, 엄마는 객지에서 살고 있는 딸들이 대체 밥은 해 먹고 사는 지 궁금하셨던가 봅니다.

동생은 무농약 현미를 사서 먹고 있고, 또 남자친구 할아버지께서 지난 해 가을걷이해서 보내 주신 쌀을 나누어 먹느라 올 여름이 다 되도록 쌀이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아직 쌀이 조금 남았다고, 다 먹을 때쯤 연락 드리겠다고 말씀드리고 전화를 끊었습니다. 전화기 너머에선 ‘아니, 얘네들은 굶고 사나’ 하는 아빠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도 했습니다.

그리고 며칠 후쯤 쌀이 떨어질 듯 하여 집에 전화를 걸어 쌀을 부쳐 달라고 했습니다. 좁은 집에 쌀을 놔 둘만한 데도 없고, 지난여름에 부엌에 놔둔 쌀에 쌀벌레가 생겨 엄청 고생했던 걸 생각하여 조금만 보내달라고 거듭거듭 말씀을 드렸습니다.

날도 덥고 하여 반찬 같은 건 보내지 못할 것 같아 쌀만 말씀을 드렸더니 필요한 거 없냐고 하십니다. 그래서 고춧가루를 보내 달라고 했습니다. 고춧가루 정도면 비닐봉지에 넣어 꼭꼭 싸매어 쌀 포대에 넣으면 될 거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택배비도 한 번만 들테니까요.

이틀 뒤 택배가 도착했습니다. 그렇게 쌀은 조금만 보내 달라고 말씀을 드렸는데도 예전이나 별 차이가 없습니다. 쌀 놔둘 데가 없다고, 쌀벌레 생기면 괜히 귀찮기만 하다고 말씀을 드렸는데도 말입니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택배가 하나 더 왔습니다.

상자를 꽁꽁 싸맨 청 테이프를 뜯고 나니 감자가 한 가득 입니다. 거둔지 얼마 안된 감자인 듯 크기도 적당하고, 흠집도 별로 없는 감자들입니다. 또 그 비싼 파프리카가 반입니다. 빨간색, 노란색이 어쩜 그리도 선명한 지 그 빛깔들이 감자를 물들일 것만 같습니다. 그리고 토마토도 있습니다. 토마토는 완숙된 걸 보내셨는지 상자 속에서 조금 터지기도 했습니다. 풋고추도 들어 있고, 물론 고춧가루도 들어 있습니다.

집에서 감자나, 파프리카, 토마토 농사를 짓지 않으니 아마 부모님께선 돈을 주고 사셨을 것입니다. 자식들 지갑에서 돈 나가는 게 아까우신 지 직접 사서 보내 주신 듯 합니다. 부모님이 사시면 더 좋은 채소들을 더 싸게 살 수 있으니 그럴 것입니다. 하지만 택배비와 부모님의 수고로움을 합하면 서울에서 사 먹는 거와 별반 차이도 나지 않을 텐데, 그러고 싶은 게 부모님 마음이려니 생각을 했습니다.

집에 있는 큰 김치 통을 전부 꺼내 쌀을 담았습니다. 김치 통 2개에 담고도 모자라 작은 김치 통 하나가 더 필요했습니다. 쌀벌레가 생길까봐 바로 슈퍼에 가 쌀벌레 약을 사왔습니다. 김치 통마다 쌀벌레 약을 하나씩 넣어 주고 뚜껑을 닫은 후 하나씩 가지런히 세워놓으니, 갑자기 가슴이 뿌듯해지는 것 같았습니다.

저야 잘 모르지만 겨울이 시작되기 전 집 마당에 연탄을 가득 채워 놓은 기분이랄까요?. 당분간은 쌀 걱정 없이 지내겠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물론 제가 살아오면서 쌀 걱정을 한 건 아니지만, 그냥 왠지 배가 든든하니 기분이 좋았습니다.

그런데 그 기분이 문제였을까요?. 제가 느낀 가슴 뿌듯함을 남자친구에게 말했을 뿐이었는데 남자친구는 엄청 화를 냈습니다. 남자친구의 말인즉 언제까지 집에서 쌀을 받아먹을 거냐는 거였습니다. 쌀을 살 돈이 없는 것도 아니면서 부모님 힘드시게 왜 그러냐는 것이었습니다.

지금은 부모님이 쌀을 보내주지만 더 나이가 드시면 일이 힘드신 데도 자식들에게 쌀을 보내줘야 할 것 같아 일을 손에서 놓지 못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부모님이 언제든 일을 그만두실 수 있도록 기대지 말아야 한다고 합니다.

남자친구가 이렇게 말을 하는 것은 아직도 농사를 짓고 계시는 할아버지 때문입니다. 여든 살이 다 되신 할아버지께서는 아직도 자식들을 위해 쌀 농사를 짓고 계십니다. 자식들 보내 줄 생각에 농사에서 손을 놓지 못하고 계신 데, 손자 된 입장에서 그 모습을 보면 그렇게 안타까울 수가 없다고 합니다. 그래서 남자친구는 할아버지가 보내주신 쌀도 받지 않으려고 했고요.

하지만 저는 말했습니다. 부모님은 자식들에게 쌀을 보내면서 아직도 내 자식이 내 도움을 필요로 하는구나 하고 생각하시며 기분 좋아하실 거라고요. 부모님이 좋아하시는 일을 해드리는 게 효도가 아니냐고요. 부모님 집에 있는 쌀은 놔두고 마트에서 돈 들여 쌀 사먹는다고 하면 부모님 기분이 어떻겠냐고요. 김장철이 되면 김치도 보내주고 싶은 게 부모마음이라고, 그걸 기쁘게 받아서 맛있게 먹어주는 게 효도라고 말입니다.

그렇게 남자친구랑 한참을 싸우다가 회사의 아이 있는 동료 직원에게 어떤게 효도하는 거냐고 한 번 물어 보라하고 싸움을 끝냈습니다. 그런데 솔직히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지금이야 부모님께서 아직 나이가 많지 않으시니 이렇게 맘 편하게 쌀을 받지만 대체 언제까지 이 쌀을 받아야 하는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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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살아갈 날이 살아온 날만큼 남아있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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