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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친하게 지내는 나무가 한 그루 있다. 동네 어귀 빨간 신호등 앞에서 파란 불이 켜지길 기다리며 바라보곤 하다가 정이 든 후박나무이다. 파란 불이 켜져 있는 날은 나무의 몸통이라도 한 번 어루만지고 가야 서운함이 덜하다. 빨간 불이 켜져 있는 날은 한껏 여유를 부리며 잎사귀들과 일일이 눈을 맞추기도 한다. 그런 재미가 있어서인지 나는 여간해서는 신호등을 어기지 않는다.

하지만 동행이 있다보면 사정이 달라진다. 나 혼자 교통법규를 지키자고 신호가 바뀔 때까지 버티고 서 있기가 난감한 것이다. 어쩔 수 없이 신호를 무시하고 함께 길을 건너고 나면 영 마음이 개운치 않다.

언젠가는 일행을 따라가지 않고 혼자 남아 파란 불이 켜지기를 기다린 적이 있다. 그때 길 건너편에서 나를 향해 손짓 하는 사람들의 표정이 미묘했다. 그들의 눈에는 내가 일탈의 낭만도 모르는 앞뒤 꽉 막힌 알량한 도덕주의자 정도로 보였을지도 모를 일이다.

길을 가다보면 차량이나 인적이 드문 곳에서는 열이면 아홉은 신호등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나는 그 열 명 중 한 사람이 되고 싶다든지, 내 자신이 은근히 도덕적 우월감을 느끼고 싶다든지 하는 마음은 추호도 없다.

그럼 나는 왜 유난을 떨어가면서까지 교통법규를 지키려는 것일까? 이유는 간단하다. 법을 어기고 싶지 않은 것이다. 그것이 어려운 일도 아니지 않은가. 그냥 잠깐 서서 하늘을 쳐다보면 될 일이다. 아니면 나무에게 말이라도 걸어보든지. 내게는 법을 어기는 것보다 그것이 더 쉽고 낭만적이다.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을 보면 나는 좀 유순한 사람일까? 그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내 주변에는 나를 다른 눈으로 보는 사람도 있는 것 같다. 적당히 넘어갔으면 싶은데 따지기를 좋아하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고집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지만 정말이지 하고 싶지 않은 일이 있다.

그 사람의 의사와 상관없이 무언가를 강요하는 것. 또한 그런 강요를 받는 것. 그 순간 나는 어쩔 수 없이 얼굴을 붉히고 만다. 유순하던 내가 갑자기 투사로 돌변할 때도 있다. 원래 성정이 유순한 나로서는 그런 상황이 닥치는 것이 달갑지 않지만 지켜야할 것을 지켜내기 위한 궁여지책인 셈이다.

그렇다면 나는 무엇을 지키려는 것일까? 그것은 이 사회의 산소라고도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자유와 최소한의 낭만이다. 물론 강요된 삶 속에는 존재하지 않는 것들이다.

아이들을 잡을 것인가 말 것인가. 담임을 맡다보면 그런 고민에 빠질 때가 있다. 다행히도 나는 아이들을 잡을 열정으로 사랑을 주자고 나를 다독여왔다. 그것이 남의 눈에 실속 없는 헛장사처럼 비춰질 지라도 내 나름대로는 계산이 있다. 좀 더디더라도 아이들이 스스로 판단하고 노력하여 뭔가를 이룰 수 있도록 기회를 주고 싶은 것이다.

또한, 신호등을 지켜야 하는 작은 법 앞에 겸손하고 싶듯이 아무리 작고 부족한 아이라도 그의 존재 앞에 몸을 낮추고 싶은 것이다. 아이를 세워주는 것이 교육이요, 교사의 일이 아닌가.

강제된 공간에 익숙해진 아이들은 안에서 자유를 갈망하기보다는 밖에서 일탈의 낭만을 즐기려는 경향이 있다. 여기서 밖이란 어둑한 거리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삶의 저편이 될 수도 있다.

해마다 꽃다운 나이로 목숨을 버리는 아이들이 생기는 것은 그만큼 학교사회가 최소한의 낭만조차 유지하지 못하고 있다는 반증일 수도 있다. 그것은 내가 건강한 낭만주의자가 되고 싶은 이유이기도 하다.

최근 방과후 교육활동 때문에 이런 저런 말들이 많다. 대통령까지 나서서 방과후 교육활동을 지원하고 있는 형국이다. 이것이 과연 필요한 것일까? 그리고 성공여부는? 이에 대한 다양한 전문적인 견해들이 피력될 수도 있겠지만 내 대답은 아주 간단하다.

'최소한의 자유와 최소한의 낭만.'

이 두 가지가 보장되지 않는 강제된 학교 공간 속에서는 어떤 훌륭한 교육정책이라도 성공을 보장하기 어렵다. 말을 물가로 끌고 가기는 쉬워도 목마르지 않는 말에게 물을 먹이기는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보기에 아무리 시원한 샘물이라도 말이다.

덧붙이는 글 | 경향신문에 기고한 글에 내용을 조금 보탰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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ㄹ교사이자 시인으로 제자들의 생일때마다 써준 시들을 모아 첫 시집 '너의 이름을 부르는 것 만으로'를 출간하면서 작품활동 시작. 이후 '다시 졸고 있는 아이들에게' '세상 조촐한 것들이' '별에 쏘이다'를 펴냈고 교육에세이 '넌 아름다워, 누가 뭐라 말하든', '오늘 교단을 밟을 당신에게' '아들과 함께 하는 인생' 등을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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