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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제가 살고 있는 곳은 전형적인 주택가입니다. 근처에 대규모 아파트 단지들이 들어서고 있긴 하지만, 2층 이상이 되는 건물이 별로 없는 한적한 곳입니다. 집들이 많이 붙어 있어 요즘처럼 축구 경기가 한창일 때는 함성소리가 담을 넘어 크게 들리곤 합니다.

저희집 아래는 주택을 개조해서 식당을 하는 분이 살고 계십니다. 주택가 한가운데여서 장사는 그렇게 잘 되는 것 같지는 않지만, 다소 어두운 거리를 가장 환하게 밝히는 곳이기도 합니다. 옥상을 함께 쓰기 때문에 아래층에 사는 분들이 저희집 문 앞을 지나갈 수밖에 없고, 편한 차림으로 앉아 있다가 그냥 인사를 하게 되는 민망한 경우도 많이 있습니다.

원래 두 분이 살고 계셨는데, 몇 달 전부터 식구가 늘어났습니다. 맞은편으로 아들이 이사를 왔기 때문입니다. 그 아들에게는 초등학교에 다니는 딸과 아직 유치원에 다니는 아들이 있습니다. 잠을 자는 것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시간을 식당에서 보내기 때문에 저희와 만나게 되는 시간도 많아졌습니다.

아침에 출근을 할 때 밥을 먹고 있는 아이들과 간단히 눈인사도 하고, 퇴근할 때 거리에서 놀고 있는 아이들이 보기도 했지만, 별로 시간을 보낸 적은 없었습니다. 어머니에게 전해들으니, 아들이 이혼을 해서 아래집 아주머니께서 아이들을 키운답니다. 그리고 전해들은 이혼 사유는 배우자의 외도였습니다.

금요일에 하는 드라마나 선정적인 주제를 가지고 시선을 끄는 잡지에 나오는 이야기처럼 일주일에 한 번씩밖에 집에 오지 못하는 남편 몰래 만났던 사람이 아이들에게 어느 순간 삼촌으로 둔갑되어 집에서 가끔 생활도 같이 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그러던 것이 밝혀져서 이혼으로 이어졌고, 아이들은 할머니집으로 오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서 자신의 행동을 후회하는 아이들의 어머니는 딸 아이의 학교로 찾아와 함께 살자며 눈물을 흘리기도 하고, 반성하고 있으니 같이 살자는 말도 전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후회할 일을 왜 했을까 싶기도 한데, 그 뒤에 들은 이야기는 놀랍기도 하고 가슴이 아프기도 했습니다.

아마도 아버지보다 더 많은 시간을 보냈을 아이들의 어머니에게 아이들은 엄마라는 말 대신 '집 나간 여자'라고 부른답니다. 어머니가 학교로 찾아온 이야기를 할머니에게 전하면서 "집 나간 여자가 나 보러 와서 도망갔다"라며 자신들이 받았던 상처를 고스란히 드러냈습니다.

아이들에게 자신들의 이혼과정을 어떻게 설명하고 이해시켰는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자신들의 어머니를 그렇게 표현한다는 것이 저는 참으로 안타까웠습니다. 아이들을 키우고 있는 할머니는 그 어머니를 만나 아이들이 대학을 갈 때까지는 절대 볼 생각하지 말라고 단호하게 말을 했고, 엄마될 자격이 없는 사람이 엄마 노릇을 할 생각은 꿈도 꾸지 말라는 말도 했다고 합니다.

그런 말들을 들으니 아이들이 불쌍하기도 하고, 애틋해지도 했습니다. 보통 아이들보다 훨씬 깊은 상처를 가지고 살아갈 터인데, 땀 흘리며 공을 차기도 하고 학교 가기 싫다고 투정부리다 할머니의 잔소리도 듣는 모습들을 보니 잘해주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아마도 당연한 것이겠지요.

주말에 집에서 편한 복장으로 식사를 하고 있는데, 아이들이 저희집으로 올라왔습니다. 저와 어머니를 계속 보더니 제발 부탁인데 잠깐만 내려와 달라고 해서 어머니 대신 제가 아래층 식당으로 내려가 보았습니다. 아이들은 할머니께서 성당에 가셨는데, 시간이 지나도 오지 않는다며 계란후라이를 해달라고 했습니다.

식당에서 사용하는 가스는 좀 위험한 편입니다. 계란과 후라이팬은 가져다 놓았는데, 불을 켤 수 없는지 고민을 하다 올라온 모양이었습니다. 가스불을 켜고 계란말이를 만들어 아이들에게 주니 눈 인사정도로만 만났던 아이들과 갑자기 친해지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아이들은 환성을 질렀고, "아줌마 고맙습니다"라는 말을 하며 먹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웃으면서 "맛있게 먹어. 그리고 절대 가스불은 켜지마. 그런데 나 아줌마 아니거든"이라고 말을 하고 다시 올라와 식사를 했습니다.

그 뒤 아이들은 제가 출근을 할 때나 퇴근을 할 때 한마디씩 붙이기도 하고, 자전거를 탈 때면 와서 이것저것 묻기도 했습니다. 꼭 아줌마라 부르면서 말입니다. 아직 어린 아이들에겐 서른의 여자는 다 아줌마로 보이나 봅니다.

동생이랑 함께 외출할 일이 있어 나가는데, 역시나 달려와 한마디 합니다. "아줌마 애인이에요?" 동생의 얼굴은 일그러지고 저는 민망하기도 하고 웃음이 나기도 합니다.

딱히 방과 후에 가는 학원이 없기 때문에 식당 주변에서 오랜 시간 노는 아이들에게 조금 시간을 내서 함께 놀아주어야겠습니다. 예전에 제가 많이 했던 놀이들을 함께 해보는 것도 저에게 즐거운 시간이 될 것 같습니다. 그렇게 놀아주다 보면 언젠가는 언니, 누나라고 부르는 날이 오겠지요. 그리고 아이들에게도 집나간 여자가 엄마로 바뀌는 날이 다가오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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