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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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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과 바다가 수천 년 사귀어 낳은 생명들

강물과 바다가 만나 수천 년을 사귀어, 갯벌을 만들고 그곳에 물길을 내었다. 서해의 황금바다도 물길을 찾아 풍요로운 생명을 나누고 새만금에 둥지를 마련했다. 물길은 생명의 길이요, 어머니의 자궁이었다. 이 물길을 따라, 철마다 황금조기와 실뱀장어가 줄지어 올라왔다. 영등사리에 수성당 개양할미가 바다를 열고 백합씨, 바지락씨, 고막씨를 뿌려놓았다.

신과 자연이 뿌려놓은 농사에 기대어 인간들은 갯살림을 시작했다. 비료를 줄 필요도 없고, 김을 매줄 필요도 없이 물 흐르는 대로 바다와 강이 만나, 인간이 배설한 온갖 것들을 안고서 풍요로운 갯벌을 만들었다.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다. 물길이 만들어낸 생명들로는 성에 차지 않는 모양이다.

자연이 준 생명에 보태어 논과 밭에 농사를 짓듯 바다농사를 시작했다. 김농사, 바지락농사, 백합농사 등, 짧은 시간에 더 많은 것을 갖고 싶어 하는 인간의 욕심에 자연의 가끔씩 화를 냈다. 새만금갯벌에 농사를 짓는 사람들이 그랬다. 욕심껏 갯벌을 제 땅인 냥 금을 긋고, 논밭 농사짓듯 바지락에 백합 씨를 뿌렸지만 큰 재미를 보지 못했다. 대신 물길은 갯벌에 주민들이 먹고 살만큼의 바지락과 백합을 보내주었다.

ⓒ 김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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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물길 막아 뭘 하려나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다. '농사'에 익숙한 '육지 것'들이 어민들의 먹고사는 갯벌을 탐을 내기 시작했다. 육지 것들이 보면 갯벌을 아무짝에 쓸모없는 땅이다. 저걸 막아서 '농사'를 짓고 싶어 했다. 어민들이 어떻게 살았는지 관심도 없다. 그곳을 지켜온 백합, 망둥이, 칠게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 황금바다와 풍요로운 강물이 만나는 저 물길을 막으면 농사를 지을 수 있을 것이라는 육지 것들의 욕심만 있을 뿐이다. 그때는 보리밥도 귀하던 시절에 쌀농사를 짓을 땅을 마련한다는 명분이라도 있었다.

평생을 갯내음을 맡으며 물때에 맞춰 그레(백합을 캐는 도구)를 움켜쥐고, 그물을 들고 봄, 여름, 가을, 겨울 바다로 가던 어민들은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하나. 육지 것들처럼. 아침이면, 그레 대신 삽과 괭이를 들고 논과 밭으로 나가야 하고, 해가 지면 집으로 돌아와야 할 것인가. 아니면 일당 벌이를 위해 이 공장 저 공장을 기웃거려야 하나.

물길이 막히자 갯벌위로 하얀 소금 꽃이 피어났다. 마치 눈이 온 것 같다. 지난 장마에 소금 꽃에 녹아내리자 갯벌 속에 몸을 숨기고 자나 깨나 바닷물을 기다리던 백합과 동죽들이 기어 나왔다. 그게 바닷물인 줄 알았다. 너무 반가웠던 모양이다. 너무 목이 말랐기 때문이다. 펄 위로 기어 나온 백합들이 바닷물을 찾아 갯벌을 헤매다 다시 펄 속으로 들어가지도 못하고, 바닷물을 만나지도 못하고 눈물을 흘렸다.

ⓒ 김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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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의 시간, 생명의 시간, 물때

새만금갯벌의 어민들은 물때에 맞춰 새벽에 나가기도 하고, 해질 무렵에 나가기도 하고, 간혹 불을 키고 저녁에 바다로 나가던 이들이었다. 인간이 만들어낸 '시계'가 아니라 해와 달, 파도와 바람이 만들어낸 자연의 '생태시간'에 맞춰 살았던 어민들이었다. 이를 '물때'라고 한다. 어민들은 수백 년을 생태시간에 맞춰 갯살림을 해왔다. 이제 물길이 막혀 이들은 인간이 만들어낸 시간에 적응할 것을 강요받고 있다.

논둑길을 걷다가 서해에서 불어오는 비릿한 갯바람이 불어오면 그들의 오장은 꿈틀거릴 것이다. 갯살림에 맞춰진 그들의 신체는 무너질 것이다. 이를 어찌 한단 말인가. 누구에게 수천 년 이어온 바다와 물길, 그리고 갯살림을 무너뜨릴 권리가 있단 말인가. 이것은 육지 것들의 탐욕에서 비롯된 오만과 편견이다.

ⓒ 김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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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만들어낸 저 방조제, 신이 무너뜨릴 것이다

동진강과 만경강의 물길이 가지고 온 아주 작은 흙이 모여서 갯벌을 이루고, 황해의 바닷물과 만나 갯골을 만들었다. 자연이 빚어낸 생명의 모태는 그렇게 만들어져 풍요롭고 아늑한 생명의 자궁이 되었다. 갯골을 따라 바닷물과 강물이 오가며 그려낸 어민들의 질퍽한 갯살림도 그리 오래된 것이 아니다. 수천 년 그곳을 지켜온 것은 작은 갯벌생물들이다. 인간은 강물과 바닷물 그리고 갯벌의 작은 생명들이 만들어 놓은 풍요로운 땅 갯벌을 이용만 했을 뿐이다.

어민들에게 바다와 갯벌은 삶을 터전이면서 벗어나고 싶은 멍에였다. 오죽했으면 두둑한 보상금과 장밋빛 청사진이라는 개발논리에 삶터를 내주는 계약서에 도장을 꾹꾹 눌러주었겠는가. 그 결과 건설업체들에겐 ‘금자탑`이요, 전라북도에겐 ’희망‘이라고 하는 새만금방조제가 이어졌다. 군산과 부안을 잇는 물길을 가로 막아 도로를 만들었다. 육지 것들은 물길이 막힌 도로 위에서 만세 삼창을 하며 환호했다. 수천 년을 물길을 지켜온 수많은 생명들, 어민들의 삶터를, 미래 세대들의 자산을 빼앗고 부르는 만세삼창은 인간의 탐욕의 소리였다. 인간의 무지에 의해 가로막힌 자연의 물길은 언젠가 다시 자연의 힘으로 열리고 갯벌 생명들이 꿈틀거릴 것이다.

새만금 어민들의 '몸짓'과 '기억'
<새만금은 갯벌이다>를 출간하였습니다.

▲ <새만금은 갯벌이다> 표지사진
ⓒ한얼미디어
갯벌에 기대어 살아온 어민들의 '몸짓'과 '기억'이 책의 출발이었습니다. 칠산바다의 조기처럼 영영 '기억'에 갇혀버리는 것이 두려웠습니다.

우리 안에 웅크리고 있는 육지 중심의 사고가 부른 무자비한 폭력을 '망각'하고, 장미빛 환상으로 '왜곡'시키는 것을 용서할 수 없었습니다. '육지것'들의 오판과 편견을 허물어내는 '기억투쟁'의 하나가 되길 원했습니다.

새만금 갯벌, 한때는 굶주린 백성들의 밥알이었습니다. 해방되던 해에 계화도갯벌에서는 유난히 조개가 많이 났다고 합니다. 먹을 것이 없었던 부안의 주민들은 그 조개를 닮아 허기를 달랬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그 조개를 "해방조개"라 부릅니다.

새만금 방조제가 막히기 전에는 생합과 바지락만 캐도 먹고 사는 데 아무 지장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갯벌을 막아버린 것입니다. 정부가 나서서 백성들의 살 길을 막아버린 것입니다. 갯벌을 지키려는 새만금 어민들의 처절한 몸부림을 고스란히 담고 싶었습니다.

그 동안 육지것의 하나 였던 필자에게 다양한 시선을 가르쳐준 새만금 연안의 어민들과 지역주민들에게 감사드립니다. 새만금의 기록은 계속 이어질 것입니다. / 김준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아름다운재단 <콩반쪽>(2006년 6월)에 게재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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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여 년 동안 섬과 갯벌을 기웃거리다 바다의 시간에 빠졌다. 그는 매일 바다로 가는 꿈을 꾼다. 해양문화 전문가이자 그들의 삶을 기록하는 사진작가이기도 한 그는 갯사람들의 삶을 통해 ‘오래된 미래’와 대안을 찾고 있다. 현재 전남발전연구원 해양관광팀 연구위원으로 근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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