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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밖 가득히 하얀 햇살이 눈부시게 비치는 새 집이다.
창밖 가득히 하얀 햇살이 눈부시게 비치는 새 집이다. ⓒ 양지혜
남들은 월드컵 경기가 열린다고 설레던 지난 13일 이른 아침부터 우리집 이사는 시작됐다. 막상 이사를 시작하니 이삿짐 센터 직원조차 혀를 내두른 채 중간에 가 버릴 정도의 이삿짐이 많았다.

이삿짐 직원들이 옷장 같은 큰짐들은 자리만 잡아 두었고, 속 내용물들은 말 그대로 '쑤셔 박아' 넣는 것으로 대충 마무리를 하더니 "퇴근시간이 되었다"며 우르르 돌아가 버렸다. 포장 박스조차 열지 않은 짐들이 수두룩한 난감한 상황이었다. 짐들을 늘어놓은 탓에 편히 잠을 잘 곳은 차치하고 발 디딜 틈조차 없으니 한시라도 빨리 정리를 해야 했다.

이사라는 것에 몸과 마음이 모두 지쳤다. 이럴 때 파출부가 필요한 것 아닐까?
이사라는 것에 몸과 마음이 모두 지쳤다. 이럴 때 파출부가 필요한 것 아닐까? ⓒ 양지혜
그러나 나는 이사 전날 이미 병원에서 입원을 권유할 만큼 몸상태가 좋지 않았으며, 한밤중에 응급치료를 받고 귀가했던 내게 도움을 줄 손길은 아무도 없었다. 그러니 이삿날 돈을 주고 사람을 사는 '파출부'를 써야만 할 방법 말고는 무방책이었다.

결국 산더미 같이 널어놓은 옷가지들과 그릇들을 펼쳐 놓은 채 남편과의 신경전이 시작되었다. 몸이 힘든 만큼 마음도 지치고, 하루종일 아니 며칠 전부터 무리가 따르는 일의 연속으로 냉랭한 기운만 감돌던 집안 분위기가 급기야 아이가 곁에 있는데도 고성이 오가게 했다. "파출부 좀 쓰자니까요!! 당신은 내가 얼마나 힘드는지 아세요?" 남편에게 참고 참았던 속내가 터졌다.

정말 그랬다. 이삿짐 양으로나 벌어진 상황은 누가 보더라도 내 혼자의 힘으로 정리하기엔 불가능했다. 하지만 내내 무응답이던 남편의 대답은 역시 내 예상을 벗어나지 않았다. "내가 다 해줄게. 당신은 아무 것도 하지 말고 가만히 앉아 있어!"

급기야 이사 전날 밤, 병원 응급실로 향했다.
급기야 이사 전날 밤, 병원 응급실로 향했다. ⓒ 양지혜
되레 큰소리를 치더니 일단은 "잘 자리는 마련해야 되는 게 아니냐"며 온통 이삿짐으로 북새통인 집안을 번잡스럽게 오가면서 물건들을 놔 둘 곳을 꼬치꼬치 물어대기 시작했다. 남편의 헛말(?)에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아픈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남편에 대한 서러움과 도의적(?)으로 도저히 파출부를 쓸 수 없는 내 얄팍하고 한심한 양심이 정말 원망스러워서였다. "남들은 쉽게도 부르고 쓰는데…, 그깟 파출부 한번 불러 쓰는 게 뭐 그리 큰 죄라고…." 혼잣말처럼 고시랑거렸지만, 결국은 남편 들으라는 소리였다.

하지만 여태 살아오면서 단 한차례도 '파출부'라 불리는 '살림 도우미'의 손길을 빌리지 않았던 속사정은 시어머님의 가슴 먹먹한 사연 때문이다.

평생 시아버님의 딴 집 살림으로 홀로 살다시피했던 시어머님의 희망은 주변에서 공부 잘한다고 부러움이 가득했던 두 아들이 삶의 전부였다.

집안에서 바라다 보이는 초록의 산이 든든한 위로가 됐다.
집안에서 바라다 보이는 초록의 산이 든든한 위로가 됐다. ⓒ 양지혜
그러나 두 아들 모두가 시어머님의 기대와 희망을 저버린 채 민주화 운동이다 뭐다 해서 구치소와 감옥을 오가는 동안 애간장 태우며 파출부 일을 다니셨다. 그리고는 내가 결혼을 하자 시시때때로 자신의 한스러움을 며느리인 내게 퍼부어대곤 하셨다.

"새파랗게 젊은애가 남의 손 빌리는 것은 죄다!" 시어머님의 그 단 한마디에 내 아픔이나 고단함은 일찌감치 물거품이 되어 버렸던 시간들이었다. 그런 연유로 '파출부'라는 말을 내 입으로 꺼낸다는 것은 우리 집안에서는 시어머님에 대한 '불경스러움'이자 금기로 치부되었다.

그러니 남편 마음이야 오죽할까. "자신이 다 하겠다"는 말로 파출부의 도움을 받는다는 것은 이미 '불가능한 현실'이니 미련을 갖거나 머뭇거림은 아무런 해결책이 되지 않는다는 '선언'이다. 내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 그저 안될 일에 연연하지 말고, 빨리, 덜 힘들게 정리할 방법을 찾는 것이 현명함이고 급선무일 뿐이었다.

발을 다친 아이는 이사에 정신없던 나를 더욱 마음 아프게 했다.
발을 다친 아이는 이사에 정신없던 나를 더욱 마음 아프게 했다. ⓒ 양지혜
하지만 아픈 몸이 어디 마음대로 따라 주느냐 말이다. 자꾸만 나오는 한숨과 알 수 없는 속상함에 괜스레 마음은 널브러진 이삿짐보다 더 어지러웠고 힘겹기만 했다.

더구나 곁에 있던 속 모르는 후배는 "남들 다 쓰는 파출부 한번을 왜 못 쓰냐"며 훈수 겸 바람잡이를 자청했다. 하지만 난 오히려 세 식구 살림에 '남의 손'을 빌리는 것도 싫고, 일하는 사람을 불러들이기에는 아직은 젊은 내 양심이 허락하지 않는다는 엉뚱한 핑계를 대며 퉁퉁 부은 손과 발로 이리저리 정리를 시작했다.

하지만 문제는 다른 곳에서 생겼고, 일주일간을 남편과 '이사 전쟁'을 치르게 되었다. 오비이락이라 했던가. 이사 그 자체만으로도 힘들고 고단하건만, 어지럽게 널려 있던 장난감에 아이가 그만 발을 다친 것이다.

도움을 줄 손길이 없기에 '파출부'를 부르자고 제안을 했었다.
도움을 줄 손길이 없기에 '파출부'를 부르자고 제안을 했었다. ⓒ 양지혜
자지러지게 우는 아이를 병원에 데리고 가라는 내 말을 묵살하고 남편은 발바닥 살갗이 살짝 벗겨졌다며 간단히 약을 발라 주었다. 그런데 며칠을 이삿짐에 치여 있으랴 정신없는 사이에 아이의 발바닥 상처가 덧나 버렸다.

밤중에 끙끙 앓는 아이의 발을 쳐다 본 순간 괜스레 죄 없는 남편에게 원망이 쏟아졌고, 저녁나절에 아픈 아이를 데리고 낯선 동네를 휘저으며 병원을 찾아 헤매야 했다. 간신히 병원에서 치료를 하고 돌아오면서도 아이에 대한 미안함은 남편의 무심함을 향한 질타로 번졌다. 그리고 이번 '이사 전쟁'을 절정에 다다르게 만들었다. 그간 살아오면서 이런저런 남편이 밉고 야속했던 일들이야 많았지만 요 며칠만큼의 감정과는 비할 바가 아니었다.

발 디딜 틈조차 없이 쌓여 있는 이삿짐이 "내가 다해 줄께"라는 한마디로 해결이 되는지...
발 디딜 틈조차 없이 쌓여 있는 이삿짐이 "내가 다해 줄께"라는 한마디로 해결이 되는지... ⓒ 양지혜
"당신, 정말 너무 한 것 아니에요? 이거 설마 나 혼자 다 정리하고 치우라고 하는 건 아니지요? 애가 상처가 덧나 병원에서 꿰매야 할 정도라는데 너무 하다는 생각이 안 드세요? 세상 달라졌다고들 하는데, 이젠 나도 파출부를 좀 불러서 부엌 살림이랑 묵은 때 청소라도 하면 안되냐구요!"

거절당할 줄 알면서도 그래도 아이를 돌봐야 하고, 힘에 부치는 이삿짐 정리를 빨리 하기 위해서는 불가피하게 다시 '파출부' 타령을 하게 됐다.

그러나 들려오는 남편의 대답 또한 녹음기 틀어 놓은 듯 같은 말의 반복이었다. "그래, 파출부 부르라니까. 왜 부르지도 못하면서 그래? 그리고 내가 다 해준다고 했잖아. 당신은 아무 것도 하지 말고 가만히 있으라구!!"

결국 그렇게 자신이 '다 해 준다'는 말로 파출부 도움을 포기하라는 강압(?)에 의해 나는 장장 닷새간에 걸친 이삿짐 정리를 남편에 대한 원망과 야속함에 대한 오기로 해냈다.

도저히 끝이 안보일 듯했지만 깨끗이 정리가 되어가자 남편은 그간 함구했던 입으로 의기양양해 하며 어색하게 말을 걸었다. "원래 분노의 힘이 가장 크다니까. 괜히 파출부를 쓰고 마음 고생하는 것보다 당신 몸이 힘들어도 마음 편한 게 좋잖아? 우리 힘으로 해낼 수 있는데 왜 남의 손을 빌려?"

눈물 바람에 원망이 뒤범벅된 이삿짐 정리가 마무리가 되었다.
눈물 바람에 원망이 뒤범벅된 이삿짐 정리가 마무리가 되었다. ⓒ 양지혜
세상에…. 눈치가 없어도 유분수지! 마누라 손의 인대가 늘어나고 진통제를 먹으면서 이삿짐 정리를 했더니, '분노의 힘'으로 해냈다고 흐뭇해(?) 하다니…. 그리고 "내가 다해 줄게!"라는 자신의 무책임(?)한 말 한마디에 아내의 속마음이 얼마나 상처받고 속앓이를 했는지는 아랑곳없이 씩씩한 모습으로 출근을 했다.

그렇게 사연 많던 이삿짐 정리는 되었지만 여전히 가시지 않는 궁금증이 있다. "내가 다해 줄게. 당신은 가만히 있어!"라고 했던 남편의 속마음과 "파출부 쓰자!"고 퉁명스럽게 말하던 남편의 두 가지 말 중 어떤 말이 아픈 아내에 대한 배려가 담긴 진실이었을까?

그러나 새삼 묻지 않을 생각이다. 대신 나부터 '파출부'라는 말에 좀더 슬기로워지고 가벼워지기로 작정을 했다.

이사에 지친 몸과 마음에 평안이 하루빨리 다가오기를 기도한다.
이사에 지친 몸과 마음에 평안이 하루빨리 다가오기를 기도한다. ⓒ 양지혜
온 가족이 30년 전의 일인데도 아직도 벗어나지 못하는 '파출부 악몽'이 몸이 힘든 것보다 마음을 더 없이 힘들게 만든다는 사실. 그래서 다음부터는 이렇게 나 혼자 감당하기에 버거운 일이 생긴다면 지금과는 다른 선택을 할 것이다. 그렇다고 남편의 가슴에 지닌 '파출부'라는 까칠한 표현에 대한 아픔은 굳이 외면하고 싶진 않다.

어차피 잊거나 털어지지 않는다면 기꺼이 받아들이고 감싸 안는 것이 내 몫이고, 내 선택이지 않겠는가. 그리고 그 길만이 정신적 혼란스러움을 덜고, 몸 고달픔을 더는 가족의 화목을 위한 현명한 방법일 테니.

착잡한 마음과 우여곡절 속의 사고와 사연이 많은 이사였지만, 내 고단함 덕분에 깔끔해진 집안으로 어느새 들어왔는지 포실한 햇살과 살랑이는 바람이 상쾌함을 전한다. 커다란 꽃 화분에 우리 가족 모두의 얼굴에 피어오를 환한 미소를 닮은 유월의 꽃 모란 한 소꿉을 가득 꽂아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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