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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6월은 붉습니다.
6월은 붉습니다. ⓒ 양지혜
바람은 꽃향기의 길이고
꽃향기는 그리움의 길인데
내겐 길이 없습니다.
밤꽃이 저렇게 무시로 향기를 쏟는 날,
나는 숲 속에서 길을 잃었습니다.
님의 체취에
그만 정신이 아득해졌기 때문입니다.
강물은 꽃잎의 길이고
꽃잎은 기다림의 길인데
내겐 길이 없습니다.
개구리가 저렇게
푸른 울음 우는 밤,
나는 들녘에서 길을 잃었습니다.
님의 말씀에
그만 정신이 황홀해졌기 때문입니다.
숲은 숲더러 길이라 하고
들은 들더러 길이라는데
눈먼 나는 아아,
어디로 가야 하나요.
녹음도 지치면 타오르는 불길인 것을,
숨막힐 듯, 숨막힐 듯 푸른 연기 헤치고
나는 어디로 가야 하나요,
강물은 강물로 흐르는데
바람은 바람으로 흐르는데.

시 '6월' - 오세영


이 유월엔 어디로 가야 할지 길을 잃습니다.
이 유월엔 어디로 가야 할지 길을 잃습니다. ⓒ 양지혜
나 또한 시인처럼 유월이면 길을 잃습니다. 온통 붉음이 넘치는 유월이 오면 이 땅은 피울음 속에 살 떨리도록 아픈 기억들이 살아납니다. 아름다운 생을 다 피우지 못한 채 떠나야 했던 고귀한 죽음들이 부활합니다.

그런 그들의 안타까운 넋 앞에 보잘 것 없는 노래 한 곡과 가녀린 촛불 하나 켜며 감사와 애절함을 전했던 우리들의 모습이 함께 했습니다.

젊은 청년의 죽음, 그 댓가는 무엇이었을까요?
젊은 청년의 죽음, 그 댓가는 무엇이었을까요? ⓒ 양지혜
그런데 어느 날부터 6월의 주인공인 그들이 우리의 기억 속에서 지워졌습니다. 영혼을 위로하던 노랫소리 대신 우렁찬 응원가가 울렸고, 찰나지만 그들을 기렸던 짧은 묵념 대신 "대∼ 한민국"을 외치는 힘찬 함성과 박수 소리만이 유월을 기억하게 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저 먼 역사의 뒷장에 다시 묻었습니다. 지난 시절 그들이 흘린 붉은 피를 대신해 월드컵 순위만을 향한 화려한 붉은 광장이 열리고, 우리 모두는 두 눈을 TV에 고정한 채 축구공에 희비를 걸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붉은 유월이 두렵습니다. 그들의 민주화를 위해 흘린 붉은 피와 월드컵의 붉은 티셔츠의 열광 속에서 유월이면 길을 잃습니다.

누가 이 어린 꽃들의 넋을 위로 할 수 있을까요... 아픈 유월의 기억.
누가 이 어린 꽃들의 넋을 위로 할 수 있을까요... 아픈 유월의 기억. ⓒ 양지혜
[6월 9일] 남의 나라 전차에 참혹하게 스러진 효순·미선이의 어린 꽃 넋들의 아픔에 가슴이 무너지고, 고문의 고통과 최루탄의 공포를 '민주화'로 맞바꾼 청년들의 젊은 영혼이 '민주화'란 물길을 열었습니다.

그리고 1987년 오늘, 우리는 '고문철폐'와 '군사독재 청산'을 목 터져라 외쳐대며 명동성당과 광화문 거리를 메웠습니다. 그리고 거대했던 독재의 벽을 무너뜨리고 오늘을 열었습니다. 그 고통과 영광의 유월을 그래서 잊을 수가 없습니다.

붉은 빛깔은 같은데 마음은 왜 이렇게 착찹하기만 할까요?
붉은 빛깔은 같은데 마음은 왜 이렇게 착찹하기만 할까요? ⓒ 양지혜
하지만 이제 유월은 온통 붉은색 티셔츠 물결 속에 "대∼한민국!"의 호쾌한 응원가 속 동그란 축구공 하나로만 기억됩니다.

시청 광장도 내어 주고, 뉴스도 축구공만 좇습니다. 어느 나라 어느 선수가 몇 골을 넣었는지가 어린 넋의 위로를 대신하고, 멋들어진 슛 폼에 지난 시절 피 흘리며 투쟁했던 '민주화'의 고귀한 희생들이 지워졌습니다.

민주광장 광화문 한복판은 태극기와 붉은 물결의 열렬함이 그날의 결연함을 대신하고, 민중의 커다란 함성은 '꼭짓점 댄스' 속에서 흔들리고 있습니다.

6월의 기억을 지워버릴 비가 내리는 날, 다시 6월을 생각 합니다.
6월의 기억을 지워버릴 비가 내리는 날, 다시 6월을 생각 합니다. ⓒ 양지혜
나는 어디로 가야 합니까? 어린 넋들을 위로하는 붉은 피 가득했던 인도조차 없는 작은 길에 서야 합니까? '살려 달라'는 절규에 여전히 귀 막고서 덤덤히 하늘만 봐야 합니까? '고문철폐' '군사독재 청산'의 함성은 이제 흘러간 고물장수 가위질 소리로 역사 한 귀퉁이에 처박혀야 합니까?

온통 핏빛 붉은색의 모든 광장은 "대∼한민국 짝짝 짝 짝짝!!" 힘찬 응원의 외침과 박수만이 넘치고 있습니다. 매년 같은 붉은 유월이 오건만 어느덧 유월만 되면 나는 이렇게 길을 잃습니다.

유월을 지우는 빗줄기가 우리의 모습을 되살려 주고 있습니다.
유월을 지우는 빗줄기가 우리의 모습을 되살려 주고 있습니다. ⓒ 양지혜
[6월 10일] 오늘 하루만은 "대∼한민국!" 함성 대신 이 땅을 위해 이 땅에서 붉은 피를 뿌렸던 그들을 기억하면 안 되는 것일까요?

오늘 단 하루만이라도 저 멀리 떠나간 어린 넋들을 기억하며 작은 촛불 하나 켜면 안 되는 것일까요?

오늘 하루만이라도 '빨간 티셔츠'를 벗고서 명동성당과 광화문 네거리를 메웠던 우리들의 지난 역사를 되돌아보면 안 되는 것일까요?

잊지 말아야 할 기억조차 우린 너무 쉽게 잊고 사는 것은 아닌지...
잊지 말아야 할 기억조차 우린 너무 쉽게 잊고 사는 것은 아닌지... ⓒ 양지혜
그런 오늘, 왜 월드컵 개막식 소식만으로 이 땅을 누벼 대는지, 남은 6월의 긴 시간을 오로지 시청 앞을 붉게 물들이는 빨간 티셔츠만 바라봐야 하는지….

축구공을 향한 눈길 대신 나는 추적추적 내리는 빗줄기 속에 곧 무너질 듯 으르렁거리는 검은빛 하늘을 바라볼 뿐입니다.

'6월 10일' 민중항쟁의 함성이 광화문을 뒤흔든 오늘 하루만이라도 월드컵 축구공만이 전부가 아닌 6월이 되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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