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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악관까지!"  FTA저지 원정 시위대가 미 의회에서 백악관 앞까지 총 1.5km이상을 삼보일배로 행진하고 있다.
"백악관까지!" FTA저지 원정 시위대가 미 의회에서 백악관 앞까지 총 1.5km이상을 삼보일배로 행진하고 있다. ⓒ 강인규
FTA = 곰과의 포옹?

곰 한 마리와 사람이 부둥켜 안고 있다. 둘이 서로의 품에 안겨있지만 둘의 표정은 사뭇 다르다. 사람은 곰으로부터 빠져나오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지만 곰의 표정은 사납지만 여유만만하다. 그 밑에는 다음과 같은 글귀가 쓰여져 있다.

"내가 먼저 안았지만, 곰이 나를 놔주지 않는다."

오래 전에 보았던 어떤 외국신문의 만평이다. 꽤 오래 전의 일이어서 풍자의 상황맥락은 잘 기억나지 않는다. 유럽 어느 나라의 갈등상황을 그리고 있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처럼 아득하게 잊고 있던 시시한 만화 한 편을 떠올려준 것은 한미자유무역협정에 대한 한국정부의 자신감에 찬 태도였다. 그들은 FTA의 불평등성과 이것이 가져올 폐해를 지적하는 여론에 대해 이렇게 반박한다.

"이건 누가 강요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자발적이고 주도적으로 추진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일 것이다. 그러나 그 '자발성'이 어떤 것인지는 좀 더 생각이 필요하다. 앞의 만평이 그리고 있듯이, '내가 먼저 (주도적으로) 안았지만, 상대가 나를 놔주지 않는' 상황이 아닌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불행히도 이런 우려는 본협상이 시작되자 마자 현실로 나타나고 있다.

자발적으로 마무리할 수 없는 '자발적인 협상'?

곰과의 포옹도 그렇지만, 국제간의 무역협정 역시 누가 먼저 시작했느냐보다 누구의 의도대로 끝나느냐가 더욱 중요하다. 미국의 경우, 한국과 자유무역협정을 체결한다 하더라도 의회의 승인이 없으면 그 협정은 효력을 갖지 못한다. 가능하지 않은 이야기지만, 미국이 스스로 절대적으로 불리한 (따라서 한국에 유리한) 협정에 서명한다 하더라도 의회는 이를 거부할 권리가 있다.

이 경우 미국정부가 취할 조치는 "미안하게 됐다"는 말 한 마디 정도일 것이다. 그러나 반대의 경우를 생각해 보자. 한국이 스스로에게 불리한 (물론 무엇이 불리한 것인지 이해하고 있다는 전제하에서다) 협정에 서명하게 될 때 한국은 같은 방식으로 대처할 수 있을까?

물론 한국에도 국회가 있고, 한미자유무역협정은 국회의 승인을 얻어야 한다. 그러나 한국의 국회가 미국과 체결한 무역협정을 거부하는 상황은 상상하기 어렵다. 우리도 가볍게 손을 털면서 "안타깝게 됐다"고 말하는 것으로 끝낼 수 있을까? 그런 면에서 한미자유무역협정은 시작부터 동등한 입장의 협상이 될 수 없다.

물론 대안은 있다. 불리한 협정에는 서명을 하지 않는 것이다. 이는 개인과 개인, 국가와 국가 사이에 늘상 일어나는 일로, 협정의 본질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 협정은 스스로 불리한 것을 택하지 않을 권리, 즉 결렬을 기본적인 조건으로 한 상태에서 진행된다.

그러나 우리는 과연 이 권리를 가지고 있는가? 우리가 '자발적'으로 시작한 것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우리는 '자발적'으로 협상의 결렬을 선언할 수 있는가? 뒤에서 자세히 다루겠지만, 한국은 '한미관계'라는 상징적 가치를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경제적 불이익을 감수할 준비가 되어있는 나라다. 불행한 것은 미국이 이 사실을 아주 잘 알고 있다는 것이다.

한미 양측 협상대표  지난 3월 6일 서울 세종로 외교부청사에서 열린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협상을 위한 양국간 1차 예비협의에 앞서 양국 수석대표인 김종훈(왼쪽) 대사와 웬디 커틀러 미국 무역대표부(USTR) 대표보가 좌석으로 향하고 있다.
한미 양측 협상대표 지난 3월 6일 서울 세종로 외교부청사에서 열린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협상을 위한 양국간 1차 예비협의에 앞서 양국 수석대표인 김종훈(왼쪽) 대사와 웬디 커틀러 미국 무역대표부(USTR) 대표보가 좌석으로 향하고 있다. ⓒ 연합뉴스 하사헌
쇠고기 수입 과정은 향후 FTA '자발성'의 지표

현재 논의되고 있는 쇠고기 수입재개 문제는 앞으로 FTA가 어떻게 진행될 것인지를 보여주는 지표적 성격을 지니고 있다. 어떤 경우든 국민의 건강보다 우위에 있는 '국익'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한국정부가 국민들의 입장에 서서 요구할 것을 당당하게 요구하고 있는지는 이 문제를 둘러싼 정부의 태도를 통해서 알 수 있다. 교역상대국의 눈치를 보느라 안전성이 입증되지도 않은 음식물을 서둘러 국민밥상에 올려야 한다면, 그 정부가 어떤 교역협상에서 국민들의 이익을 대변할 수 있을까.

쇠고기 수입재개 과정은 한미자유역협정 진행과정과 여러 면에서 유사하다. 결정 과정에서 국민의 의사가 배제된 채 정부주도로 진행되고 있다는 점에 서도 그렇고, '비공개'를 원칙으로 진행되고 있다는 점에서도 그렇다. 통상부는 FTA의 구체적인 내용과 계획을 국민에게 공개하지 않고 있으며, 농림부 장관은 최근 미국내 쇠고기 처리장 위생실태를 공개하라는 시민단체의 요구에 "기술적인 부분이 많아 일반인들은 잘 이해하지 못할 것"이라고 거부한 바 있다.

미국산 쇠고기는 광우병 사태로 수출에 제동이 걸린 상태지만, 한국정부는 미국측에서 제시한 소의 치아 사진만으로 안전성이 입증되었다고 보고 쇠고기 수입 재개를 서두르고 있다. 그러나 소의 치아를 통해서 나이를 정확히 판단할 수 없다는 것은 수의학계의 상식이며, 무엇보다 광우병의 발병원인이 아직 정확히 밝혀지지 않은 상태다.

더우기 미국 내에서 광우병이 발생해도 축산업자들은 그 사실을 당국에 보고할 의무가 없다. 현재까지 미국에서 3건의 광우병 사례가 발견되었지만, 사실은 그보다 더 많은 소들로부터 광우병이 발견되었으리라는 것이 전문가들의 판단이다. 미국에서 도축되는 소는 1년에 3500만두가 넘지만, 그중 광우병 여부가 조사되는 것은 20% 미만이기 때문이다.

시위대와 협상단  지난 6일 협상장을 나서는 김종훈 한·미 FTA 한국 측 수석대표가 구호를 외치는 시위대를 외면하며 걷고 있다.
시위대와 협상단 지난 6일 협상장을 나서는 김종훈 한·미 FTA 한국 측 수석대표가 구호를 외치는 시위대를 외면하며 걷고 있다. ⓒ 김지형
커틀러 미 대표 "뼈가 든 쇠고기와 부산물까지 수입하도록 압력 넣을 것"

이처럼 허술한 조사방식과 축산업자들의 자발적인 신고에만 의존하는 검사체계에도 불구하고 '미국산 쇠고기가 안전하다'고 주장하는 농림부는 국민들의 매끼니를 '러시안 룰렛'으로 만드는 셈이다. 쇠고기 수입이 FTA와 무관하다는 한국협상팀의 주장 역시 설득력이 없다. 지난 5일 웬디 커틀러 미국 대표는 한국대표부와 첫 본격협상을 가진 후,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이렇게 밝힌 바 있다.

"우리는 분명히, 그리고 빠른 시일 내에 한국정부가 뼈없는 쇠고기의 수입을 재개하길 기대하고 있다. 그리고 일단 한국이 수입을 재개한 후에는 즉시 품목을 확대해 뼈가 든 부위의 고기와 부산물까지 수입하도록 압력을 넣겠다는 사실을 한국대표부에 아주 분명히 전달했다."

설렁탕이나 갈비처럼 뼈를 오랫동안 끓이거나 뼈와 함께 요리하는 경우가 많은 한국의 경우는 살코기를 주로 섭취하는 미국소비자에 비해 광우병의 더 큰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정을 번복할 수 없다’는 이유로 쇠고기 수입재개를 강행한다면, 이후 FTA가 동등하고 합리적인 방식으로 진행되리라고 기대할 국민들은 많지 않을 것이다.

가장 큰 장벽은 미국중심 이데올로기

미 국회의사당 건물
미 국회의사당 건물 ⓒ 강인규
자유무역협정에 임하는 한국과 미국측의 태도를 비교해 보면 한 가지 흥미로운 차이를 발견하게 된다. 미국대표단이 제시한 전망은 농업, 자동차, 의약, 금융 등 다양한 산업분야의 이해관계를 체계적으로 반영하는 경제중심적 접근인 반면, 한국측에서 제시한 내용을 살펴보면 경제 이외의 측면에 상당한 초점을 두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여기에는 '동맹'이나 '동북아 균형자 역할' 등의 정치적 담론은 물론, 예의 '국민소득 3만불 달성' 이나 '초고속 인프라' 그리고 '아시아 모델의 한계 극복' 등의 수사학까지 포함되어 있다.

물론 무역협정이 경제적 차원만을 갖지 않는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고, 다양한 분야에서 이익을 얻겠다는 발상을 비판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한국정부와 외교통상부, 그리고 FTA협상단이 제시하는 전망은 사실상 체계적인 평가와 분석이 결여된 문학적 수사학에 가깝다. 조희연 교수는 한국 정부의 이러한 태도를 '미국화는 곧 선진화이며 세계화'로 보는 미국중심 이데올로기로 분석한다.

제3세계연대 연구원인 샤오 룽 인의 분석 역시 한국정부의 조급한 FTA선택이 '약소국 이데올로기'와 무관하지 않음을 잘 보여준다. 그는 약소국일수록 경쟁적으로 미국과 먼저 자유무역협상을 맺으려 서두르는 경향이 있으며, 협상결렬 자체를 극도로 두려워하는 경향이 있다고 분석한다. 이것을 '이데올로기'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은 그들이 '선점효과'와 '협상결렬'의 결과를 실제보다 더 큰 것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더우기 '동맹강화'를 무역협정의 목표로 내세우는 것은 회담에서 한국의 입지를 스스로 좁히는 결과를 초래할 뿐이다. 이는 일방적으로 불리한 협상을 맺는 것보다 협상 결렬 자체를 더 끔찍한 실패로 여기게 만들기 때문이다. 미국은 협상의 결렬 자체를 상상할 수 없는 상대에게 많은 것을 양보할만큼 어리석지 않다.

조희연(왼쪽) 성공회대 교수와 샤오 룽 인(가운데) 제3세계연대 연구원 등이 한미FTA를 주제로 토론하고 있다.
조희연(왼쪽) 성공회대 교수와 샤오 룽 인(가운데) 제3세계연대 연구원 등이 한미FTA를 주제로 토론하고 있다. ⓒ 강인규
"결렬을 선언할 수 없으면 상대에게 하도록 하라"

그러나 분명히 기억해야 할 것은, 어떤 상대라 하더라도 불리한 서명을 하는 것보다는 협상결렬을 선언하는 게 더 현명한, 아니 덜 어리석은 선택이라는 점이다. (현명하다면 불리할 수밖에 없는 협상에 이렇게 성급하게 뛰어들지 않았을 것이다.) 물론 미국의 눈치를 보아야 할 것이고, 이로 인해 몇 가지 손해를 볼 수도 있지만 — 그러나 어느 경우든 정부나 보수언론이 우려하는 것만큼 크지 않을 것이다 — 국가경제를 위험 속에 몰아 넣는 것보다는 훨씬 더 나은 선택이다.

정책 연구소의 새라 앤더슨 연구원은 한국정부가 시간을 가급적 오래 끄는 것이 협상에서 유리한 위치를 점하는 방법이라고 조언한다. 실제로 미국은 무역촉진법(TPA)이 만료되는 7월까지 협정을 체결해야 하며, 웬디 커틀러 미국협상 대표는 올해 말까지 완료하겠다고까지 공언하고 있는 상황이다. 한국이 먼저 협상결렬을 선언할 수 없다면, 정해진 입장을 고수함으로써 미국측으로 하여금 스스로 결렬을 선언하도록 만들 수도 있다.

한국 국민들에게 가장 불행한 것은 협상이 어떤 결과를 가져오든 그에 대해서 아무도 책임지지 않을 것이며, 책임질 수도 없을 것이라는 점이다. 협상체결 후 합의내용을 3년간 국민들에게 공개하지 않는다는 조항은 회담 당사자의 어깨를 가볍게 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그들'이 비밀리에 결정하고 협상한 것에 대한 책임을 '우리'가 져야 한다는 점이 한국사회의 비극인 셈이다.

한미 FTA가 한국사회에 어떤 폭풍을 몰고 올지는 아무도 알 수 없으나, 분명한 것은 어떤 결과가 나타나든 협상테이블에 앉아있는 사람들이 사후에 감당할 몫이 일반국민보다는 작을 것이라는 점이다. 정부관료들의 생계가 서민들에 비해 경제상황에 더 큰 영향을 받거나, 그들의 식탁에 수입쇠고기가 특별히 더 많이 오르지 않는다면 말이다. 국민들이 FTA를 남의 일처럼 바라보고만 있을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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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학 교수로, 미국 펜실베니아주립대(베런드칼리지)에서 뉴미디어 기술과 문화를 강의하고 있습니다. <대한민국 몰락사>, <망가뜨린 것 모른 척한 것 바꿔야 할 것>, <나는 스타벅스에서 불온한 상상을 한다>를 썼고, <미디어기호학>과 <소셜네트워크 어떻게 바라볼까?>를 한국어로 옮겼습니다. 여행자의 낯선 눈으로 일상을 바라보려고 노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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