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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구역은 충북이지만 생활권은 대전에 가까운 도시, 옥천. 대전역사교사모임의 몇몇 선생님들이 의기투합하여 6월 4일(일) 옥천답사를 다녀왔다. 충북 옥천 검문소 앞에서 조일권(49·옥천향토사연구회 사무국장) 선생님의 안내로 답사를 시작하였다.

검문소 바로 위쪽에 척화비가 있었다. 척화비(斥和碑)는 병인양요(1866), 신미양요(1871)를 치른 흥선대원군이 밀려드는 서구열강의 통상교섭에 대한 강한 거부의 뜻을 나타내고자 전국의 교통요지에 세웠던 비석이다. 그 후 세계 여러 나라와 통상하게 됨에 따라 임오군란(1882) 이후 전국의 척화비를 모두 철거하였다. 이 비석도 땅에 묻혀 있다가 도로 공사 때 발견되어 이 위치로 옮겨졌다고 한다.

현재는 교통의 요지 및 행정경계의 관문에 검문소가 있다. 이곳에 검문소와 척화비가 함께 있는 것을 보면 옛날이나 지금이나 교통의 요지임은 분명한 듯하다.

▲ 척화비에는 많은 총탄 자국이 선명하게 남아있었다. 6·25때 사람으로 오인하여 그렇다는 말도 있고, 인민군이 총 쏘는 연습하느라 그랬다는 이야기도 있다. 진실이야 어떻든 전쟁의 상처가 사람이 아닌 문화재에도 역력히 남아있었다.
ⓒ 최장문
여기에서 관산성으로 바로 올라가도 되지만 시간이 많이 걸리기에 차로 이동하여 짧은 등산로를 택했다. 산에 막 오르려 하는데 밭에 뭔가가 있었다. 현대판 허수아비였다. 허수아비가 변했으니 날아드는 새들도 새롭게 변했을 것이라 생각하니 웃음이 나왔다. 관산성은 옥천 시내 북쪽에 위치하여 시민들이 많이 등산하는 산 중의 하나라고 하였다. 중간 중간에 등산하는 분들이 많았다.

▲ 디지털 허수아비
ⓒ 최장문
▲ 밑에서 바라본 관산성
ⓒ 최장문
삼국사기 진흥왕편에서는 '백제 성왕이 서기 554년 7월에 대가야의 군사와 함께 신라의 관산성을 치다가 신주군주 김무력에게 패배하여 구천(狗川)에서 신라의 장수 고간도도에게 포로가 되어 좌평 4명과 함께 죽음을 당하였으며 이만구천육백인의 백제 군사 중 돌아간 자가 없다'고 기록되어 있다.

▲ 관산성 오르는 길과 우물터
ⓒ 최장문
관산성 전투에서 백제 성왕의 죽음은 6세기 한반도에서 신라의 전성시대를 알리는 신호탄임을 비춰볼 때 중요한 역사성을 띠는 사건이며 장소이다. 하지만 현재 학계에서는 관산성의 정확한 위치를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고 한다. 실제로 관산성에 올라보면 3만 병력이 공격할 만큼 산이나 성이 크지 못하였다.

▲ 관산성 전투 지역을 설명하고 있는 조일권 사무국장님
ⓒ 최장문
▲ 경사가 가파른 곳에 오르내리기 용이하게 동아줄이 매어 있었다. 그런데 그 동아줄이 사람에게는 도움을 줄지언정 나무에게는 이런 아픔을 주고 있었다.
ⓒ 최장문
조일권님은 관산성 전투라는 옥천의 문화 자원이 제대로 정비되지 못하여, 시민과 학생들에게 활용되고 있지 못하는 것을 무척 아쉬워했다.

대전의 계족산성이나 옥천의 관산성은 아직까지 신라성인지, 백제성인지 명확히 밝혀지고 있지 않다. 실제로 발굴해보면 많고 적음의 차이만 있을 뿐 양국의 유물이 동시에 나온다. 아마도 접경지역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 당시 이 지역의 백성들은 성 쌓고 전쟁 치르느라 고생 깨나 했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옥천에서 경치 좋기로 소문난 용암사에 도착한 것은 11시가 훌쩍 넘어서였다. 이 절은 법주사 말사이며 신도는 3000여 명으로 옥천에선 제일 큰 절에 속한다고 하였다. 대개 절은 사통팔달 기가 잘 통하는 명당에 세우는데 특히 용암사가 그렇다고 하였다. 날씨 좋은 날은 추풍령까지 보인다고 한다.

▲ 용암사 쌍삼층석탑
ⓒ 최장문
한 가지 아쉬운 것은 쌍 삼층석탑 바로 밑에 자리 잡은 송신탑이었다. 과거의 삼층 석탑과 현재의 철탑이 왜 이리도 조화가 안 되는 것일까? 바라보면 바라볼수록 숨도 막히고 시야도 막혀 오감이 괴로웠다. 존재하는 것은 모두 이유가 있다고 하지만 존재의 이유와 과정이 의심스러웠다.

하지만 대웅전 뒤편에 있는 마애석불에 오르면 그 답답함과 괴로움은 날아가 버린다. 자연석 암벽을 파고 그 안에 불상을 도드라지게 새겼는데, 색을 칠한 듯한 붉은 바위색이 눈에 띈다. 함께 간 신익수 선생님(남대전고)은 부처의 전신을 고스란히 응축해 놓은 것은 처음 본다고 하였다. 김기용 선생님(중앙고)은 하루 종일 보고 있어도 질리지 않을 것 같다고 하였다.

▲ 용암사 마애석불
ⓒ 최장문
나는 미륵불의 립스틱을 바른 듯한 세속적인 입술과 좀 똥똥한 얼굴로 욕심 많고 얕은 고집이 있어 보이는 얼굴이 밉지 않았다. 동네 어디선가 많이 본 듯한 얼굴이었다.

▲ 선생님들이 용암사 마애석불에 푸~욱 빠져있다.
ⓒ 최장문
앞을 보면 뭇 사람보다 조금 큰 미륵부처가 소원을 들어줄 양 나의 마음을 빨아들이고, 뒤를 보면 멀리 추풍령 고개가 보일 듯이 탁 트인 산과 하늘이 나의 눈을 즐겁게 해준다. 다음에 가족과 함께 오리란 말을 연발하며 차에 올랐다.

덧붙이는 글 | 6월 4일(일) 대전역사교사모임 선생님 7명이 옥천의 향토사연구회 사무국장 조일권(49) 선생님의 안내로 옥천 관산성-용암사-육영수 생가-고인돌-선돌-조헌 묘소를 답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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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가 세월속에서 문화의 무늬가 되고, 내 주변 어딘가에 저만치 있습니다. 자세히 보고, 오래보면 예쁘고 아름답다고 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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