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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탈문에 안치된 사천왕 중 하나가 짓밟고 있는 잡귀의 일그러진 모습
해탈문에 안치된 사천왕 중 하나가 짓밟고 있는 잡귀의 일그러진 모습 ⓒ 문일식
해탈문은 이 문을 통과함으로써 번뇌와 속박을 벗고 자유로운 해탈의 상태에 도달한다는 의미입니다. 무위사의 해탈문은 특이하게도 사천왕상이 모셔져 있습니다. 무섭지도 않고, 온화하지도 않은 지극히 평범한 상들입니다. 재밌는 것은 사천왕상이 밟고 있는 잡귀들인데 대체로 사람을 많이 닮았습니다. 특히 한 잡귀는 사천왕의 발에 얼굴을 밟히고 있는데 일그러진 얼굴모습이 참 재밌습니다.

국보 13호인 극락보전의 전경
국보 13호인 극락보전의 전경 ⓒ 문일식
해탈문을 들어서면 낮은 계단을 오르고 저 멀리 국보 13호로 지정된 극락보전이 눈에 들어옵니다. 커다란 느티나무가 서 있고, 그 아래 단정한 극락보전이 자리 잡고 있어서 무척 아름다운 풍경을 자아냅니다.

해탈문에 들어서면 보이는 커다란 느티나무와 극락보전의 조화로운 모습
해탈문에 들어서면 보이는 커다란 느티나무와 극락보전의 조화로운 모습 ⓒ 문일식
기둥 위에 공포가 하나씩 얹힌 주심포 양식이며 단아한 맞배지붕을 가지고 있는 극락보전은 조선초 세종때 지어진 건물로 언뜻 보기에 봉정사의 극락전이나 수덕사의 대웅전을 연상시킵니다. 조선초기의 건물이라 고려시대 건축물의 특징인 주심포양식을 그대로 전수받은 듯합니다. 극락보전 앞에는 전형적인 두 기의 괘불걸이가 있고, 그 가운데에는 연화무늬를 새긴 배례석이 있어 눈길을 끕니다.

극락보전에 안치된 목조 아미타 삼존불과 그 뒷편으로 아미타 후불벽화가 보입니다
극락보전에 안치된 목조 아미타 삼존불과 그 뒷편으로 아미타 후불벽화가 보입니다 ⓒ 문일식
무위사 극락보전은 한마디로 보물이 가득한 집입니다. 조선 세종때 지어진 극락보전에는 목조 아미타삼존불이 주존불로 안치되어 있고, 조선 성종때 후불탱화인 아미타후불벽화와 아미타래영도, 그리고 내부벽화가 그려집니다.

아미타래영도와 내부벽화는 지난 1983년 해체작업을 하면서 모두 뜯어서 벽화보존관에 보관 및 전시하고 있고, 총 29점에 이르는 벽화는 일괄하여 보물 1315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극락보전 내부에 현존하는 것은 목조 아미타삼존불과 아미타 후불벽화, 그리고 그 뒷면에 그려진 수월관음도가 있는데 이들 모두 보물 1312호, 1313호, 1314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이밖에도 극락보전 좌측에는 선각대사 편광탑비와 삼층석탑 한 기가 있습니다. 선광대사 형미는 통일신라 말기의 스님으로 고려 태조 왕건을 도왔는데, 궁예가 왕건을 의심하여 죽이려 하자, 왕건을 두둔하다가 오히려 죽임을 당했다고 합니다. 후에 왕건이 고려를 건국하고 나서 선각대사라는 시호를 내렸습니다. 편광은 탑의 명칭이고, 보물 507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극락보전 앞마당의 풍경.. 느티나무 아래 마련된 평상에서 스님과 방문객이 차를 나누고 있습니다.
극락보전 앞마당의 풍경.. 느티나무 아래 마련된 평상에서 스님과 방문객이 차를 나누고 있습니다. ⓒ 문일식

건물들이 여기저기 동떨어져 있어 다소 공허함이 감돌기도 하지만, 가장 운치가 있는 곳은 바로 극락보전 앞에 있는 종무소 앞마당입니다. 커다란 느티나무 아래 평상이 놓여 있어 무더운 여름에도 시원함이 절로 느껴질 듯합니다. 사찰의 경건함과 위엄있는 모습은 절대 보이지 않았습니다. 평상에 누워있기는 껄끄러울지 모르겠지만, 평상에 앉아 멋드러진 극락보전을 눈에 담는 것 또한 좋을 듯합니다. 주지스님인 듯한 분과 함께 몇 분이 차를 나누는 모습이 너무나도 좋아보였습니다.

무위사를 나와 가다보면 월출산 자락 아래로 펼쳐진 광활한 차밭의 풍경
무위사를 나와 가다보면 월출산 자락 아래로 펼쳐진 광활한 차밭의 풍경 ⓒ 문일식

해탈문을 나서면 또다시 아스팔트길. 타임머신을 타고 다시 속세로 돌아온 듯 했습니다. 무위사에서 북쪽으로 내달리면 얼마 안가 광활한 차밭이 나타납니다. 갑작스런 차밭의 깔끔한 풍광에 감탄이 절로 나옵니다.

이 차밭은 단일 다원으로는 제주도 다음으로 두 번째로 큰 약 10만여평의 차밭으로 태평양에서 설록차를 재배하는 다원입니다. 월출산 자락과 널찍한 평원에 조성된 차밭은 기암괴석이 연이어 펼쳐진 월출산과 맛깔스런 조화를 이뤄냅니다.

월출산 아래로 펼쳐진 차밭의 풍경
월출산 아래로 펼쳐진 차밭의 풍경 ⓒ 문일식

이곳을 지나가다 보면 차를 안 세울 수 없습니다. 차를 세울 곳은 마땅히 없지만, 차량소통이 한적한 곳이어서 도로변에 잠시 세워두거나 차밭 사이로 난 시멘트길에 잠시 주차를 해도 됩니다. 찻잎을 따는 일이 아니라면 누가 와서 뭐라 하지 않는 이곳에서 분위기 있는 사진 한 장 찍는 것도 괜찮을 듯합니다. 월출산쪽으로 급경사를 따라 올라서면 이 다원 최고의 절경을 만끽할 수 있습니다.

태평양 장원다원의 일렬로 늘어선 차밭과 서리방지용 팬이 어울어진 모습...
태평양 장원다원의 일렬로 늘어선 차밭과 서리방지용 팬이 어울어진 모습... ⓒ 문일식

이 다원은 보성의 대한다원처럼 굽이굽이 이어지지 않고 일직선으로 질서정연한 모습입니다. 특이한 것은 대관령이나 영덕에서 볼 수 있는 바람개비가 있는데, 이는 서리를 방지하기 위한 팬이라고 합니다. 물론 대관령이나 영덕에 있는 거대한 풍력 바람개비와는 비교도 안 되게 작습니다. 차밭의 푸르름을 만끽하고 나면 기분마저도 깔끔하고 개운해집니다.

도로 양옆에 조성되어 있는 차밭을 지나 탑전마을에 들어서면 그냥 지나쳐서는 안 될 문화유산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고요함속에 정적마저 흐르고, 돌담으로 이어진 길을 따라 차분히 들어서면 월출산의 화려하고 위엄있는 능선을 배경으로 7m가 훨씬 넘는 탑이 서 있습니다.

월출산의 배경으로 우람하게 서있는 월남사지 3층석탑
월출산의 배경으로 우람하게 서있는 월남사지 3층석탑 ⓒ 문일식

탑을 보는 순간 '와'하는 감탄사가 절로 나옵니다. 월출산의 기개 넘치는 모습도 그렇지만 탑이 가지는 웅장함에 압도당하기 때문입니다. 고려시대 만들어진 이 탑은 월남사지 3층석탑으로 불리는데, 예전에는 탑명에서도 알 수 있듯이 월남사라는 사찰이 있던 곳입니다. 언제 폐사되었는지는 기록에 나타나 있진 않지만 사세가 꽤 컸던 모양입니다. 이곳 마을의 돌담에는 간혹 석물의 흔적이나 기단석(건축물의 기단을 만들었던 길게 다듬은 부재) 등이 담장의 재료로 쓰이고 있는 것도 눈에 띄었습니다.

좌로부터 정림사지 5층석탑, 비인 5층석탑,월남사지 3층석탑이며, 비슷한 모습이 많이 보입니다.
좌로부터 정림사지 5층석탑, 비인 5층석탑,월남사지 3층석탑이며, 비슷한 모습이 많이 보입니다. ⓒ 문일식

이 탑은 백제의 석탑양식을 가지고 있는데, 좁은 기단이나 지붕돌 형식만 보더라도 부여의 정림사지 5층석탑이나 서천의 비인 5층석탑의 모습과 흡사한데, 지붕돌의 반전이 없다는 게 큰 차이점입니다. 월남사지 3층석탑은 보물 298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들어온 길을 되짚어 나가다보면 외진 곳에 비각이 하나 있습니다. 월남사를 창건한 사람으로 알려진 진각국사비입니다. 진각국사 혜심은 최씨 무신정권과의 각별한 인연으로 월남사를 창건하게 되었다고, 죽어서도 그의 업적을 기린 비석을 남겼습니다. 용의 머리와 거북의 등갑을 가진 귀부와 함께 깨진 비신(비문이 새겨진 몸체)만이 남아 있고 이수는 없습니다.

좁은 비각 안에 가득 들어차서 사진은 찍을 수 없었지만, 귀부의 꼬리가 무척 인상적이었습니다. 징그럽다 할 정도로 큰 꼬리가 등갑을 타고 스멀스멀 오르는 듯 했습니다. 귀부의 꼬리 중 아마도 가장 크지 않을까 싶습니다.

낯선 인기척에 놀란 황소 한 마리가 뚫어지라 쳐다본 뒤 아무 일 없다는 듯 다시 풀을 뜯고 있습니다. 봄기운을 만끽 하고 있는 정감어린 풍경이었습니다.

월남사지를 끝으로 서울로 상경하는 길은 생각만 해도 아찔했습니다. 그 아찔함을 해소하는 길은 그동안 보고 느꼈던 여행의 여로를 곱씹어보는 게 유일한 해소책입니다. 더없이 깨끗한 자연과 그 속에 자리잡은 역사의 흔적들을 새록새록 떠올리며 서울로의 머나먼 길을 재촉했습니다.

덧붙이는 글 | 유포터에 송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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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의 아름다운 자연과 역사를 느낄 수 있는 글과 사진을 남기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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